“내가 네게 질 것 같으냐.”
더는 밀려날 수 없어 일단 멈춰 둔 삶 앞에서
손수 만든 사랑을 파먹으며 시간을 견디기,
이 사랑이 진짜일까 고민하는 대신
마음껏 흥얼거리다 가끔 한입 나누기
소설가 권혜영의 첫 소설집 『사랑 파먹기』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2020년 《실천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권혜영은 데뷔작 이후 발표한 첫 작품 「당신이 기대하는 건 여기에 없다」가 2021년 문학과지성사 ‘이 계절의 소설’에 선정되며 일찍이 평단의 주목을 받아 왔다.
소설가 권혜영은 삶도 게임처럼 잠깐 멈추었다 재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겠다는 듯 일시정지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선보인다. 게임은 완전한 멈춤이 가능하지만 진짜 삶은 자비 없이, 마치 인물들의 비참한 상황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계속된다. “이 상황에서 작가가 베푸는 연민이 환상”(소설가 이희주)이라는 평처럼, 권혜영의 인물들은 각자 서 있는 자리에서 어김없이 기묘한 일들에 휘말린다. 이때 권혜영이 인물들에게 베푼 환상은 환상으로만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현실에서 멀어졌던 인물들을 다시 삶 속에 되돌려놓음으로써 권혜영의 작품은 더욱 깊은 울림을 획득한다. 짜릿한 환상이 단지 유예된 현실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인물들은 슬프지만 이다음을 도모할 수 있다. 『사랑 파먹기』를 덮은 뒤, 독자들 역시 눈앞에 놓인 각자의 슬픔 너머 다시 이어질 현실을 보다 덤덤히, 그리고 기꺼이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누워 있는 상태에서 바라보는 세상
삶의 물살이 너무 빠를 때, 그래서 그 물살이 나와는 상관없이 흘러가기에 바쁠 때, 권혜영의 인물들은 일단 멈춰 선다. 멈춰 선 채로 이대로 살 방법은 없을지 궁리한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비상계단에 갇히고도 맨손 운동을 하거나 계단 틈으로 떨어지는 등 여러 시도를 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휴대폰에 저장된 노래를 들으며 계단참에 가만히 누워 있기로 한다.(「당신이 기대하는 건 여기에 없다」) 화장실에 갈 때까지도 메신저로 보고하라는 팀장의 불합리한 요구를 묵묵히 따르다 어느 날 문득 도서관으로 도피한 ‘나’는 그날로부터 100일째 도서관에 산다.(「다음 챕터」) 인물들은 누운 채로도 살 수 있는 방법에 골몰하며 자신만의 새로운 삶의 질서를 발명해 낸다. 삶의 물살이 ‘나’를 지나쳐 흘러간다면, ‘나’ 역시 물살과는 관계없이 물살 위에서, 혹은 깊은 물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듯이.
내가 만든 사랑으로 살기
누운 자리에서 사랑은 일용할 양식이다. ‘누운 채로 살기’라는 삶의 방식을 개발해 낸 인물들은, 파먹고 살 만한 사랑 역시 제힘으로 만들어 낸다. 그 사랑이 만질 수 없는 먼 곳에 있을지라도,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일지라도 문제될 것은 전혀 없다. 인물들은 이렇게 묻는다. “진짜가 아니면 어때서? 가짜를 추구하면 안 되는 건가? 꼭 진짜 사람과 몸을 맞대고 하는 진짜 사랑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 건가?”(「사랑 파먹기」) 스스로 선택할 수 없었던 삶의 비루한 조건들과 걷지 말고 뛸 것을 종용하며 나를 떠미는 삶의 비정함보다는, 진짜가 아닐지라도 내가 직접 고르고 만들어 낸 사랑 쪽이 오히려 현실적이다. 직접 만든 사랑을 하나씩 품에 안아 든 인물들은 또 하루를 살아갈 만한 양식과 함께 눈을 뜬다.
다음 챕터 앞에서
그렇다면 내가 개발한 삶의 질서 속에서 내가 만든 사랑을 파먹고 사는 일만으로도 과연 충분한 걸까? “권혜영의 세계가 하지 않는 것은, 소설집의 일그러진 표정을 특별한 종류의 사랑과 희망으로 쉽사리 대체하는 일”(평론가 최가은)이라는 해설처럼, 『사랑 파먹기』에 묶인 소설 일곱 편의 결말들은 해피엔딩이라 결론 내리기에는 어딘가 찝찝한 구석이 있다. 음악인으로서의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봐 주는 청자가 등장하였다고 해서(「유예하는 밤」) 내일이 극적으로 바뀔 리 없고, 쓸모없는 물건을 넣으면 가끔 ‘대박’이 굴러 나오기도 하는 미끄럼틀을 발견하였다고 해서(「띠부띠부 랜덤 슬라이드」) 그것이 모든 불행을 보상해 줄 리도 없다. 삶의 파도를 견디기 위해 나만의 작은 세계를 수도 없이 부려 놓은 인물들은 결국 자신이 그것들을 딛고 다음 단계로 향해야 함을 알고 있다. 마지막 수록작 「다음 챕터」의 주인공이 문득 내일로 넘어가야 할 이유를 고민할 때 작은 열기를 내뿜는 것과 같이, 『사랑 파먹기』는 우리의 불투명한 미래에 촛불 하나만큼의 작은 온기를 선사한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미약하지도 않은 이 불꽃은 우리의 하루를 꼭 맞게 밝혀 줄 것이다.
■ 작품 소개
띠부띠부 랜덤 슬라이드
▶ 궁극적으로 누워 있는 상태를 꿈꾸며 실업급여 180만 원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나’. 어느 날, 빵을 먹고 획득한 희귀 띠부씰을 중고 거래하러 나간 놀이터에서 처음 보는 미끄럼틀을 발견한다. 미끄럼틀을 둘러싼 아이들 중 그 누구도 미끄럼틀을 타지는 않고, 저마다 챙겨 온 물건들을 미끄럼틀 안으로 굴려 보내기 바쁘다. 그날 밤, ‘나’는 쓸모없는 물건들을 잔뜩 챙겨 놀이터를 다시 찾는다.
당신이 기대하는 건 여기에 없다
▶ 3교대 마지막 조 근무를 마친 뒤 자정이 넘은 시각 귀가하여 겨우 잠에 빠지려는 찰나, 화재경보기가 요란스레 울린다. 다음 날 출근 전까지 잘 수 있는 시간을 가늠하며 비상계단을 내려가는데 아무리 내려가도 계단이 끝없이 이어진다. 휴대폰을 들여다보아도 전화도 인터넷도 먹통이다. 오늘 밤, 나는 과연 잠들 수 있을까? 이 비상계단의 출구는 어디일까?
여분의 해마
▶ 오랫동안 사랑해 온 나의 아이돌 해마. 구하기 힘든 포토카드를 거래 후, 집에 와 확인해 보니 미세한 스크래치가 보인다. 괜히 비싼 값을 주었나 하는 후회도 잠시, 스크래치가 커지더니 사진 속 해마가 내 방 안으로 튀어나온다. 영상과 사진으로만 만나던 아이돌이 눈앞에 나타나다니, 나는 해마에게 데면데면 말을 걸어 본다.
사랑 파먹기
▶ ‘최애’ 아이돌의 사건사고에 지친 세나, 여전히 세나가 좋아하던 아이돌을 사랑하는 정인, 사랑은 자신에게 멀고 먼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하루하루 살아가기에 바쁜 윤주. 셋은 우연한 계기로 한 카페에서 스친다. 세나는 포토카드를 처분하러 왔고, 정인은 이를 구매하기 위해, 그리고 윤주는 그곳에서 일일 아르바이트 중이다. 사랑에 열광하고, 사랑에 지치고, 사랑에 무심한 이들 셋을 동시에 구원할 사랑이 이 세상에 있을까?
유예하는 밤
▶ 좋으니까 계속한다는 마음으로 음악을 해 온 혜진은 이제 음악도 삶도 그만두려고 한다. 할 만큼 했고,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고, 무너졌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지막을 기다리며 누워 있을 때, 혜진의 유튜브 채널 알림이 울린다. 혜진의 노래를 너무 잘 듣고 있다는 응원의 댓글이 달린 것이다. 그런데 댓글을 단 사람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혜진은 그가 알고 있는 자신이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들개들의 트랙 리스트
▶ 누나 부부가 런던 여행을 즐기는 동안 강아지를 돌봐 주기로 한 ‘나’. 쾌적하고 넓은 집을 구경하다 문득, 밴드 멤버들에게 오늘은 연습실을 빌리는 대신 이곳에서 연습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한 제안을 하는 리더 형. 설상가상 강아지도 보이지 않는다.
다음 챕터
▶ ‘나’는 벌써 100일째 도서관에 산다. 씻는 것은 이른 아침 도서관 화장실에서 하고, 부족한 잠은 영화감상실에서 가장 긴 영화들을 택해 보충한다. 그러고는 하염없이 책을 읽는다. 지척에 집을 두고 ‘나’가 도서관에 사는 이유는 무얼까. 도서관살이는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 본문에서
아이들이 미끄럼틀을 타고 놀지 않는 모습이 기이했다. 아이들은 미끄럼틀의 계단과 원형 통로 두 곳에 양분되어 골똘한 얼굴이다. 구멍 끝 주위에서만 맴돌며 구경한다. 미끄럼틀 꼭대기 계단참에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웃는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구멍에 바짝 붙어선다. 어떤 아이는 한숨을 푹푹 내쉰다. 어떤 아이는 기쁨에 겨운 함성을 지른다. 그러다가도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 얘들아, 방금 그거 뭐야? 내가 묻자 옆에서 구경하던 초등학생이 답한다. 이거 띠부띠부 미끄럼틀인데요.
-「띠부띠부 랜덤 슬라이드」에서
계단 아래 계단. 그 아래 다시 또 계단. 끊임없이 이어지는 계단의 구렁텅이였다. 발밑으로 펼쳐진 공간의 밑바닥이 가늠되지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나보다 아래에 위치한 사람의 검은 머리통. 그리고 가운데로 수렴하는 계단뿐이었다. 통화 연결음은 들리지 않았다. 나는 계단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핸드폰을 살폈다. 액정 화면의 상단 바에 통신이 불가능하다는 그림이 깜빡였다.
“저기 혹시 지금 몇 층인지 아는 분 계실까요?”
-「당신이 기대하는 건 여기에 없다」에서
윤주는 진짜 같은 가짜 스테이지를 보며 생각했다. 진짜가 아니면 어때서? 가짜를 추구하면 안 되는 건가? 꼭 진짜 사람과 몸을 맞대고 하는 진짜 사랑이 아니면 의미가 없는 건가? 그럼 나 같은 사람은 평생을 고독 속에서 의미 없이 사랑 없이 홀로 살아야 하나?
여섯 명의 가짜 소년들이 무대 앞쪽으로 오더니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간격으로 도열해 섰다. 순정 만화에서 튀어나온 자가 하나, 둘, 셋, 선창하자 모두가 우렁차게 단체 구호를 외쳤다. in the end! 우리는 아쿠아입니다!
-「사랑 파먹기」에서
나는 도서관에 산다.
열심히 공부하느라 도서관에 산다는 관용적 표현이 아닌 문자 그대로 그곳에서 먹고 자고 생활한다는 의미이다.
도서관은 오전 7시에 문을 열지만 그때는 칸막이 책상이 있는 학습 열람실만 이용할 수 있다. 내가 주로 머무는 문헌 정보실과 전자 정보실은 9시부터 개방한다. 그래서 7시부터 9시까지 두 시간 동안은 몸을 씻고 커피를 마시고 학습실 좌석에 앉아 대기를 한다.
-「다음 챕터」에서
■ 추천의 글
이 소설집의 제목은 ‘사랑 파먹기’인데, 떠올리면 손가락으로 자기 심장을 찌꺼기까지 긁어 먹는 모습이 떠오른다. 제 살을 파먹는 고통 속에서만 굶주림과 목마름이 가실 때. 환상이 우리를 위해서가 아닌 우리가 환상을 위해 복무할 때. 그때 우리의 진짜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이희주(소설가)
권혜영은 반복되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유난히 일그러지는 표정 하나를 포착하여 확대한 후, 그것을 끝까지 뒤쫓는다. 슬픔인지, 좌절인지, 광란인지 모를 이 특수한 표정을 흉내 내며 그의 뒤에 바짝 들러붙던 우리는, 해당 표정의 기원으로 보이는 이상한 지점에 도착하게 된다. 길의 끝에서 마주친 그 표정 뒤에는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얼굴이 놓여 있다.
-최가은(문학평론가)
띠부띠부 랜덤 슬라이드 7
당신이 기대하는 건 여기에 없다 45
여분의 해마 77
사랑 파먹기 119
유예하는 밤 167
들개들의 트랙 리스트 197
다음 챕터 231
작가의 말 271
작품 해설
미래-증명, 잠시 중단합니다_최가은(문학평론가) 275
추천의 글_이희주(소설가) 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