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외로움, 배신과 망명으로 점철된
위대한 예술가이자 위대한 생존자의 초상
1887년 러시아 변방에서도 유대인 빈민촌에서 태어난 샤갈이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가족과 이웃에게는 ‘화가’라는 단어조차 낯선 개념이었다. 샤갈이 동네에서 유일한 미술 학원이었던 유리 펜의 화실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가족이 ‘화가’라는 것이 ‘사진사’처럼 일종의 밥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의 나중은 창대해져서, 마티스,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사의 거장이 되었고, 그 누구보다도 오래 살아서 생존 예술가로서 가장 큰 영예를 누렸다. 그러나 샤갈의 인생 여정은 시기와 경쟁, 가난과 외로움, 학살과 망명, 그리고 가족의 비극으로 점철된 참혹한 20세기 역사의 축소판이었다. 샤갈이 예술적 경쟁자들뿐 아니라 자신을 이용한 화상, 정적, 착취자들에게 복수하는 길은 오로지 끝까지 살아남는 길뿐이었다. 재키 울슐라거의 『샤갈』은 격정의 세월을 살다 간 샤갈의 98년 인생에서 내면의 두려움과 예술적 갈등, 그리고 생존의 열망을 가장 깊이 있게 드러내 주고 있으며, 깐깐하기로 유명한 샤갈 재단 측에서 제공한 귀중한 사진 자료를 가장 많이 수록한 책이다.
★ 그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은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화가
샤갈은 처음부터 기존의 예술과 갈등을 빚었다. 첫 번째 스승 유리 펜의 사실주의 화실을 뛰쳐나와 당시 유럽 예술의 주요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철저한 소외 속에서도 상징주의 문학을 흡수했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자유로운 감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샤갈은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다른 화가들과 정서적으로 달랐고, 자신이 태어난 곳의 유산으로부터 끌어내어 그림에 경험의 직접성을 부여했다. 화가로서 첫 번째 작품으로 꼽는 「죽은 자」(1908)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삶과 죽음에 대한 강박을 풀어낸” 초기 걸작으로, 사실주의 전통을 배제하면서도 인생의 부조리한 이야기를 담아냈고, 프로이트의 심리학 시대를 예고했다.
샤갈의 첫 번째 도약은 프랑스에서 이루어진다. 미술세계파의 수장 디아길레프는 제자 샤갈이 프랑스에 따라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지만, 무일푼이면서도 운 좋게 파리 땅을 밟은 샤갈은 당시 혁명적이었던 인상파, 부드러운 색의 앵티미즘에 끌리기도 하고 입체파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온갖 경향들이 피어나고 있는 예술의 중심지에서 샤갈은 그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샤갈은 입체파에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 정신을 흡수하면서도 자신의 독창성을 잃지 않기 위해 긴장, 저항과 타협 속에서 걸작들을 쏟아냈다. 파리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 비평가인 기욤 아폴리네르의 관심을 사로잡은 「약혼녀에게 바침」(1911)은 샤갈을 프랑스 예술계에 “낯선 이국의 침입자”처럼 보이게 했다. 이 시기에 날아다니는 인물, 인격화된 농장의 동물들, 러시아 마을 등이 샤갈의 주요 테마로 자리 잡기 시작했으며, 그것들은 형태와 색채를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신비로운 힘과 호소력이 부여되었다. 러시아를 몽환적인 환상으로 변형한 「나와 마을」(1912)처럼 프랑스 모더니즘은 샤갈의 소재들에 새로운 표현 기법을 제공했다. 아무리 아방가르드의 첨병 도시 파리라 할지라도 초현실주의와 정신분석이 20세기를 휩쓸기 전이었던 1910년대에 샤갈의 목 없는 형상, 관능적인 소, 지붕 위로 날아다니는 짐승들의 환각적인 세계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미술 평론가 야코프 투겐홀트는 프랑스의 모든 그림들은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형식에서 비롯되었지만 샤갈은 무의식적인 본능, 구속받지 않는 풍부한 색채, 샤갈이 모더니즘의 역사에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서양 미술에서의 형식, 즉 의식의 이성주의에 도전하는 표현적이고 신비로운 감성”이었다.
문학을 전공한 미술평론가이자 전기 작가인 저자는 이 책에서 샤갈의 예술을 일반 독자들도 이해하기 쉽게 샤갈의 모든 예술적 원천을 드라마틱하게 이야기로 들려주고 있으며, 이 책은 샤갈 재단이 유일하게 인정한 가장 권위 있는 샤갈 전기라고 할 수 있다.
★ 러시아, 유대인, 그리고 벨라
샤갈은 여자 친구 테아의 집에 놀러 갔다가 그녀의 친구 벨라에게 첫눈에 반한다. 벨라는 나중에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한다. “테아는 숨쉬기가 힘든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두 눈 속에서는 불꽃이 너울거렸다. 무슨 일이니? 내가 너에게서 뭘 빼앗은 거니?” 샤갈은 더 이상 테아를 그리지 않았고, 벨라의 영향으로 그녀에게 고전적인 기품을 부여한 「검은 장갑을 낀 약혼녀」(1909)를 그렸다. 샤갈이 벨라를 만날 때는 그녀가 유대 하시디즘의 열정을 새로운 종교, 즉 예술로 갈아치우고 난 때였다. 벨라는 러시아 전체에서 네 명의 최우수 학생 가운데 하나였고, 러시아 여성 가운데 3퍼센트만 들어갈 수 있는 모스크바의 게리에르 여자대학교에 들어간 수재였다. 보수적인 유대인촌에서 이 젊은 커플은 마을에서 하나의 센세이션이었다. 벨라는 샤갈이 혼자 머무는 초가집에 매일 찾아갔고, 테아는 자신이 누드모델을 섰다고 소문을 내고 다니는가 하면 아름다운 벨라를 사모하던 청년은 샤갈에게 가짜 편지를 쓰기도 했고, 부유한 보석상이었던 벨라의 부모는 막내딸을 가난한 청년에게 줄 수 없다며 수선을 피웠다. 샤갈은 벨라와 결혼하는 1915년에 그 유명한 「생일」을 그렸고, 이후 아름다운 연인들 연작을 쏟아 냈다.
샤갈에게 벨라는 단순히 아름다운 뮤즈가 아니었다. 샤갈이 아무리 문화적으로 빈곤한 고향 마을에서 벗어나려고 했어도, 그의 예술의 원천은 러시아 유대인촌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흡수한 러시아 문화이었다. 「산책」에서 샤갈의 손에 쥐고 있는 파랑새(스타니슬라브스키가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연출하여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품), 어릴 적 이웃집 아저씨가 가르쳐 준 바이올린 연주(유대인 가족의 애환을 그린 유명한 뮤지컬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 연상시키는 이미지), 어머니의 초라한 가게에 찾아온 늙은 거지(「붉은색의 유대인」과 「기도하는 유대인」 연작의 주인공)와 괘종시계, 의인화된 소와 수탉, 유대인 마을의 지붕 위로 날아다니는 인물들 모두 조국 러시아의 유산이다. “모든 화가는 어디선가 태어나지요.” 1940년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샤갈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가 나중에 다른 환경의 영향들에 반응할지라도, 어떤 본질, 그러니까 출생지의 특정한 ‘향취’는 그의 작품에 들러붙어 있습니다. … 초기의 영향들이 남기는 중요한 흔적은 이를테면 그 화가의 필치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프랑스에서 태어난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과 나무들의 특징에서,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반 고흐의 지평선과 구불구불함에서, 스페인에서 태어난 피카소의 아라비아적인 장식들 속에서,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모딜리아니의 15세기 이탈리아의 선적인 느낌에서 분명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러시아에서 태어난 샤갈이 프랑스와 미국에서 망명자로 살면서 가족과도 연락할 수 없고 결코 조국 러시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때, 샤갈이 유대인으로서, 그리고 러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지탱해 준 것은 바로 벨라의 존재였다. 샤갈에게 벨라는 유대인의 러시아가 구체화된 존재였다. “벨라는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 그녀는 구름과 나무와 집들과 더불어 드비나 강에 비친 비테브스크 언덕 위의 다람쥐였다.” 샤갈은 벨라에게 그림이 “맘에 드는지 묻기 전에” 작품을 끝내는 법이 결코 없었다. “벨라는 정말로 나를 ‘느꼈다.’ 그녀는 내 미친 듯한 창조물들의 일부였고, 그 창조물들은 결코 그녀에게 낯선 것이 아니었다.” 샤갈과 벨라는 그림을 팔 때도 한 편의 완벽한 커플이었다. 컬렉터가 그림 값을 물으면 표정이 풍부한 샤갈은 천진한 얼굴로 자신은 돈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대답하면서 벨라를 불렀고, 벨라는 클라이언트 뒤에서 손짓하는 샤갈의 신호에 따라 값을 불렀으며, 샤갈의 예술관에 감동한 고객은 돈을 깍지 않았다.
샤갈 곁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있었다. 장남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어머니는 아들 곁에 벨라가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곧 눈을 감았다. 병약한 벨라가 망명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 때 샤갈은 캔버스들을 벽을 향해 돌려놓고 생애 처음으로 붓을 놓고 만다. 이후 샤갈의 아들을 낳은 버지니아는 벨라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샤갈을 떠나지만, 꽤 많은 바바는 샤갈의 배후에서 강력한 아트 딜러가 된다. 벨라가 낳은 딸 이다는 나치가 프랑스를 점령했을 때 샤갈을 먼저 미국에 보내고 아버지의 그림들을 지켜 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자신이 아버지에게 소개해 준 바바의 영향력에 밀려 화가의 꿈도 펴지 못한 채 알코올중독자가 된다. 이 책은 벨라에 대한 잊지 못할 뛰어난 초상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을 뿐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무대 디자이너로서의 샤갈과 샤갈의 후반기 인생까지도 흥미롭게 들려주는 귀한 자료다.
★ 위대한 예술가일 뿐 아니라 위대한 생존자의 일대기
샤갈은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인간으로서 끊임없이 생존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삶을 살았다. 화가가 되려고 고향의 빈민촌과 러시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모험을 감행해야 했고,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했으면서도 소련 공산주의 정권의 희생자가 되었으며, 절대주의 화가 말레비치와의 경쟁에서 처절하게 패하고 영원히 조국을 떠나야 했다. 샤갈이 프랑스의 국민작가 라퐁텐의 동판화에 매진한 것은 프랑스 예술가로서 인정받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다시 나치의 학살을 피하기 위해 구사일생으로 제2의 고향 프랑스마저 등을 졌지만, 예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프래그머티즘의 나라 미국에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에 위기를 겪어야 했다. 파리의 가난한 예술가촌에서 샤갈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도용당할까 두려워 작업실 문을 밧줄로 꽁꽁 동여매고 지내는가 하면, 도살된 소를 가져다가 그리던 생 수틴의 방에서 피가 흘러나오자 비명을 지르던 소심쟁이었다. 어느 날 미국의 백만장자가 나타나 찌질한 생 수틴의 그림들을 모두 사 가자 여전히 가난한 샤갈은 충격을 받는가 하면, 베를린 전시를 통해 독일 표현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면서 유명세를 탔으나 독일 화상 헤르바르트 발덴에게 모든 걸 착취당하고는 깊은 불신에 빠진다. 1944년 정신적으로나 예술적으로 모든 것을 의존했던 벨라가 죽었을 때는 자신의 무능함에 대한 자괴감으로 삶의 의지마저 잃어버리는 위기를 겪었고, 두 번째 여인 버지니아에게 배신을 당했을 때는 깊은 상처를 극복하는 데 사력을 다해야 했다.
그러나 샤갈은 오뚝이와도 같은 생존력을 가진 인간이었다. 샤갈은 1945년 러시아 출신인 스트라빈스키와 디아길레프의 무용극 「불새」의 무대 디자인에 올인함으로써 다시 생존의 돌파구를 마련한다. 연극배우였던 벨라와 러시아 상징주의 연극에 영향을 받은 샤갈에게 ‘무대’는 본향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획이었고, 러시아 문학인 「불새」는 러시아에서 「음악」(1920), 「유대인 극장의 소개」(1920) 등의 걸작을 쏟아 내던 절정기의 러시아 시기와 벨라와 함께 열정을 바쳤던 무대인 「알레코」 작업의 연장선에 있었다. 「불새」는 또다시 샤갈의 무대였고, 《뉴욕 타임스》는 “샤갈의 무대 디자인이 공연을 훔쳤다.”라고 적었다.
이처럼 샤갈은 끊임없이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모험에 뛰어들어야 했으며, 평생을 망명자로, 핍박받는 자로 고난의 삶을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샤갈의 그림이 끈질기게 환기시키는 것은 ‘인간’이었다. 전쟁의 공포가 다가올 때 그린 「백색의 십자가」(1938)는 인간의 고통과 심리를 어떤 화가보다도 절절하게 보여 준다. 암울한 시절 모두가 ‘추상’으로 도피할 때,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을 향해 움직이는 뉴욕 미술계에서 샤갈의 서사적인 그림들은 별난 구식처럼 보였지만, 샤갈은 시대의 역행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시적인 대상을 고수함으로써 전통적으로 회화가 주는 세련된 감동을 순수하게 지켜 냈다. 추상화가들이 ‘초월’을 논할 때, 샤갈은 여전히 ‘인간’의 고뇌와 시련을 적나라하게 그렸던 것이다. “전쟁으로 분열되고 대학살의 공포로 질린 사회”에서 샤갈의 그림은 사랑과 종교라는 뚜렷한 메시지를 전했으며 잃어버린 인간의 세계를 보여 주었으며, 샤갈의 서사적 세계는 당대 그 어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독특하고 예술이었다.
샤갈은 나중에 프랑스로 돌아와 제왕과도 같은 마티스, 피카소와 한동네에 살면서 많은 에피소드들을 남겼다. 특히 풍만한 여자를 좋아하던 피카소는 샤갈의 집에서 비쩍 마른 버지니아를 보고 기분이 나빠져 비아냥거리는가 하면, 도자기 공장에서 자신을 피해 나가 버린 샤갈을 놀리려고 수탉과 암소 같은 샤갈의 소재들로 여봐란듯이 도자기를 빚어놓았다. 하지만 경쟁자에 대해 결코 좋은 말을 하는 법이 없던 피카소도 마티스가 작고한 후에 샤갈이 생존 화가 가운데 “색을 진짜로 이해하는 유일한 화가”라고 고백했다. 1960년대에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천장 디자인으로 가르니에 극장을 샤갈의 것으로 만들었으며, 메틀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의 벽을 장식하는 「음악의 승리」와 「음악의 원천」을 완성함으로써 샤갈은 당대 유럽과 미국 양쪽 모두에서 최고의 생존 화가로 추앙받게 된다.
샤갈 Marc Chagall
마르크 샤갈은 1887년 7월 7일 러시아 국경마을 비테프스크에서 여덟 명의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화가’라는 단어조차 낯선 가난한 유대인촌에서 그림을 그리기로 결심하고 가족을 설득하여 당시 유일한 미술학원이었던 유리 펜의 화실에 들어간다. 그러나 스승의 사실주의 화풍에 식상하여 190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행을 감행한다. 거기서 거장들의 걸작들을 연구하고, 곧 「죽은 자」, 「검은 장갑을 낀 약혼녀」와 같은 초기 대표작을 그렸다. 한편 1909년 무일푼의 화가 지망생에게 첫 번째 여자 친구 테아가 누드모델이 되어 주지만, 샤갈은 그녀의 친구 벨라와 첫눈에 반해 영혼의 동반자를 찾게 된다.
샤갈은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스승이었던 레온 박스트는 제자가 파리에 따라오는 걸 경계했다. 1910년 간신히 파리로 간 샤갈은 20세기 예술의 중심지에서 입체파 화가들 및 아방가르드 시인들과 교우했고, 인상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시기와는 달리 색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이때 샤갈의 특징적인 소재들인 소와 닭, 바이올린 연주자, 고향 마을 풍경, 어머니 가게의 괘종시계가 등장했으며, 「나와 마을」, 「바이올린 연주자」 등 가장 유명한 그림들을 그렸다.
1914년 샤갈은 베를린의 슈트름 화랑에서 처음으로 갖은 개인전을 계기로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며 명성을 떨쳤고, 1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러시아에서 「기도하는 유대인」 연작을 시작했다. 또 벨라의 청혼자들의 방해와 벨라 집안의 반대를 극복하고 1915년 그녀와 결혼하여 「생일」과 ‘연인들’ 연작을 그렸다. 그러나 볼셰비키 정권 아래서 미학과 정치를 둘러싼 갈등에서 샤갈은 절대주의 화가 말레비치의 적수가 되면서 조국의 현실에 환멸을 느끼고 1922년 러시아를 떠나 망명을 떠났다. 파리에서 샤갈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품인 『라퐁텐 우화집』의 동판화 작업을 성공적으로 해냄으로써 프랑스 화가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으며, 샤갈의 시적인 그림들은 곧 인기를 끌었다.
2차 세계대전을 앞두고는 「백색의 십자가」와 같은 정치적인 그림으로 대응했고,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피해 1941년 구사일생으로 미국으로 도피했는데, 1944년 아내 벨라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처음으로 붓을 놓는다. 일생일대의 위기에 빠진 샤갈이 다시 새로운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 계기는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의 무대 디자인이 크게 성공하면서부터다. 그러나 딸 이다는 샤갈의 안위와 예술을 위해 가장 헌신적인 노력을 쏟았지만, 샤갈과 재혼한 꽤 많은 바바의 영향력에 밀려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노년의 샤갈은 1948년 제2의 고향 파리로 돌아와 제왕과 같은 피카소, 마티스와 한 동네에서 경쟁자이자 친구로 살면서 재미난 에피소드들을 남겼고, 1960년대에는 파리 오페라극장의 천장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의 벽화를 그려 유럽과 미국 양쪽에서 당대 최고의 예술가로 인정받는다. 1985년 3월 28일 샤갈은 프랑스 생폴에서 평생의 망명 생활을 마친다.
1부 러시아
1장 “내 슬프고도 즐거운 마을” 비테프스크, 1887-1900년
2장 펜의 화실에서 비테프스크, 1900-1907년
3장 금지된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1907-1908년
4장 첫 번째 여자친구 비테프스크와 상트페테르부르크, 1908-1909년
5장 벨라 비테프스크, 1909년
6장 레온 바크스트 상트페테르부르크, 1909-1911년
7장 “초자연적이군!” 파리, 1911-1912년
8장 블레즈 상드라르 파리, 1912-1913년
9장 “나의 잔인한 천재” 파리, 1913-1914년
10장 고향 비테프스크, 1914-1915년
11장 결혼 페트로그라드, 1915-1917년
12장 인민위원 샤갈과 공산당원 말레비치 비테프스크, 1917-1920년
13장 샤갈의 특별석 모스크바, 1920-1922년
2부 망명
14장 슈투름 베를린, 1922-1923년
15장 고골의 죽은 넋 파리, 1923-1924년
16장 “빛과 자유” 파리, 1924-1927년
17장 예언자들 파리, 1928-1933년
18장 방랑하는 유대인 파리, 1934-1937년
19장 백색의 십자가 파리와 고르드, 1937-1941년
20장 미국 뉴욕, 1941-1944년
21장 버지니아 뉴욕과 하이폴스, 1944-1948년
22장 유럽으로 돌아가다 오르주발과 베네치아, 1948-1952년
23장 바바 방스, 1952-1960년
24장 큰 벽의 시대 방스와 생폴, 1960-1970년
25장 “나는 괜찮은 화가였소.” 생폴, 1971-198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