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솔뫼, 안은별, 이상우의
서울‧도쿄‧베를린 세 도시발 교차 일기
마주 보고 말하는 대신
서로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시간을 쓰기
시차와 상상으로 완성되는 우리의 대화법
읽기 전에 7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생각하는 친구들
서울의 박솔뫼 11, 23, 31, 49, 56, 62, 84, 125, 147, 192
도쿄의 안은별 14, 27, 44, 77, 109, 121, 149, 181
베를린의 이상우 19, 34, 53, 71, 105, 138, 162
친구의 일기
권도은 39│김준언 66│로빈 91│케이타 115
김연재 133│송 곳 142│이한울 158│황지연 177
부록: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 주고받은 메일들 201
박솔뫼·안은별·이상우, 세 친구의 서울‧도쿄‧베를린 세 도시발 교차 산문집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소설가 박솔뫼는 시공간을 인식하는 독특한 문체와 시선으로 오래도록 독자와 평단 모두의 사랑을 받아 왔으며, 연구자 안은별은 『IMF 키즈의 생애』 등의 저작물을 통해 해당 세대 개인의 생애사를 들여다보면서도 그 삶에 사회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해 왔다. 소설가 이상우는 소설이라는 장르에 없었던 요소를 거듭 시도하며 그만의 문학적 자리를 점한 작가다.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은 고유한 창작물, 연구물을 통해 문학적·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흔적을 새겨 온 세 작가의 첫 번째 공동 산문집이다.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은 박솔뫼, 안은별, 이상우가 각각 서울, 도쿄, 베를린에 머물며 같은 기간 동안 각자 쓴 글로부터 시작된 책이다. 문예지 《릿터》에 「0시 0시+ 7시」라는 제목으로 2021~2022년에 걸쳐 1년 동안 연재되었던 글을 바탕으로, 드라마 작가 권도은, 음악가 케이타, 바리스타 김연재, 사진가 송곳 등 ‘친구의 일기’ 여덟 편을 더해 완성되었다. 도서 말미의 화보 지면에서는 세 작가가 작업을 위해 주고받았던 아이디어가 담긴 메일과 더불어 세 도시의 생생한 사진을 만나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도시의 일상을 담은 일기이자, 사랑하는 친구를 떠올리며 쓴 편지이기도 하고, 고유하고 즐거운 공동 작업을 완성해 가는 작업 일지이기도 한 이 책은 깊은 대화에의 열망을 품고 있다.
질병의 확산, 전쟁 발발 등 나쁜 쪽으로 질주하는 세계에서 문학, 예술, 연구, 우정, 기억, 사랑 등은 점점 지키기 힘든 가치가 되어 간다. 이것들은 활발한 대화와 교류 속에서 피어나지만, 우리는 사람들과 직접 만나는 일에서부터 많은 제약을 감수해야 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새로운 대화법일 것이다.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은 박솔뫼·안은별·이상우가 제시하는 새로운 소통 방식의 가능성이다. 이 대화법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잃어버리고 말았던 가치들을 향해 다시 서서히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시차와 상상으로 완성된 새로운 대화법의 제안
《릿터》에 세 작가의 글이 연재되었던 2021~2022년은 전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퍼지고, 전쟁이 발발한 때다. 삶과 신념이 통째로 흔들리고 일상의 많은 것이 변화를 겪어야 했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채 주고받는 짧은 안부와 대화로는 담지 못하는 마음과 장면들이 해소되지 못하고 쌓여만 갔다. 그때 세 작가는 각자의 일상을 쓰고, 그것을 서로 공유하는 것만을 원칙으로 삼은 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도시에서 마주한 수많은 기쁨과 슬픔에 대하여 바로 손을 흔들고 말을 건네는 대신 순간적으로 밀려드는 생각들을 모두 기록하고 서로 나누었다. 그렇게 1년 동안 모인 글들 사이에는 수많은 우연적 겹침이 발생하였다. 안은별이 일본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기쁨에 대해 기록하면, 이상우는 자전거나 마차를 타고 베를린 시내를 거니는 감각에 대해 쓴다. 박솔뫼는 꿈속에서 길을 헤매다 상냥한 이에게 약도를 건네받는다. 도시마다 삶마다 존재하는 시차로부터 벌어지는 수많은 우연은 커다란 상상을 위한 공간이 된다. 글을 통해 친구를 떠올리고 상상하다 마침내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날이 온다면, 우리는 서로를 더욱 다정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우연이 선사하는 기쁨을 무한히 확장시킨다면
새로운 대화법이 선사하는 우연한 마주침의 기쁨을 발견한 세 작가는 이 형식을 보다 확장해 보기로 했다. 각자의 삶 속에서 스쳐 지났던 이들을 책 속에 초대하여 그들의 이야기와 함께 엮여 보기를 택한 것이다. 그 결과 드라마 작가 권도은, 음악가 케이타, 바리스타 김연재, 사진가 송곳 등 친구들 8인의 글들이 박솔뫼, 안은별, 이상우 세 작가의 글들 사이를 거닐게 되었다. 이들이 글들 사이에서 발생시키는 더욱 많은 스침과 겹침 들은 곧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을 광장과 같은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우리가 실제 광장에서 누군가를 마주쳤을 때 바로 인사를 건네고 피상적인 대화를 나누다 각자 갈 길을 가는 것과 달리,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이라는 이상한 광장에서는 상대의 시선, 태도, 문체, 일상 등이 오롯이 담긴 이야기를 천천히 읽어 내게 된다. 세 작가가 개발해 낸 새로운 대화법은 이렇게 다른 친구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이러한 시도는 책 바깥의 우리에게도 새로운 대화 방식이 가능하리라는 희망과 여운을 준다. 만약 오랜 친구의 반짝이는 면에 대해 직접 대화해 본 적이 없다면, 또는 물리적으로는 멀리 있지만 늘 마음으로 응원하는 친구가 있다면, 책을 덮은 뒤 그들에게도 세 작가가 선보인 새로운 대화법을 제안해 볼 수 있겠다.
친구를 지키는 방법
좋지 않은 방향으로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모두 너무 바쁘다. 바쁜 삶 속에서 잃어 가는 많은 것들 중에는 ‘친구’가 있을 것이다. 소설가 이상우는 자신의 소설이 해외에 번역 출간이 된다면, 그 책에 늘 자신을 반가이 맞아 주던 단골 식당 주인 ‘나가유미 씨’에 대한 감사를 적고 싶었다고 하나, 그사이 코로나19로 인한 불황을 버티지 못한 것인지 식당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이상우는 이 책에 “너무 늦기 전에, 적어도 내가 지금보다 더 많이 잊어버리기 전에 짧게나마 써 둔다.”는 결심으로, “나가유미 씨와 그의 가족이 행복했으면 또 그들이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쓴다. 그가 나가유미 씨에 대해 기록하는 마음은, 『바로 손을 흔드는 대신』을 통해 가깝거나 먼 친구들에게 낯선 방식의 대화를 걸어 보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세상의 속도를 좇아가기 힘들어 정작 소중한 것들을 모두 뒤에 둔 채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이가 있다면, 박솔뫼·안은별·이상우가 마음과 삶을 나누는 방식을 시도해 보자. 어쩌면 우리는 잃어버린 친구를 홀로 추억하는 하루를 보내는 대신, 소중한 친구들과 느리지만 영원한 대화를 나누는 든든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 본문에서
여기에서 저기로 간다는 것, 혹은 갔다가 돌아온다는 것은 반복되는 루틴이라고 해도 매번 새로운 단 한 번의 사건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갈 길을 가는 다른 사람들이나, 거대한 인프라와 치밀한 약속들의 체계와 사람들이 합을 맞춰 춤을 추는 탈것들이 그러한 것처럼, 서로가 전혀 그 얼굴을 마주한 적 없는 장소와 사건들을 이으며 시간과 공간을, 사회라는 픽션을 만들어 낸다. 매일 거의 똑같이, 그러나 완전히 같지는 않게 덧붙이면서.
-「도쿄의 안은별: 시간과 공간을 생산하는 중」, 17쪽에서
이렇게 또 손을 흔드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나는 초등학교 1학년이고 다니던 학교는 100년도 넘은 광주 시내의 오래된 학교이다. 그때 나는 같은 반 친구들과 나란히 운동장에 서 있었다. 시내에서 일을 마치고 우연히 운동장을 둘러보던 아빠는 나에게 크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순간 이렇게 운동장에 서 있는데 나도 같이 손을 흔들어도 되는지 모르겠고 집이 아니라 학교에서 아빠를 마주치는 것에 왠지 멍해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가만히 쳐다만 보았다. 아빠는 계속 손을 크게 흔들었다. 손을 계속 흔들던 아빠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내가 선생님과 아이들과 함께 교실로 돌아갔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에서 아빠는 왜 대답을 안 했느냐고 못 알아본 거냐고 물었고 나는 아마 인사를 해도 되는지 몰라서 못했다고 말했던 것 같다.
-「서울의 박솔뫼: 손 흔들기」, 63쪽에서
어느 장소에서 살아갈 허락을 받는 일. 허락을 받으며 살아가는 일에 대해서 베를린에 오고 나서부터 더 생각하고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 놓이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사실들이 온 순간에 감지된다. 단지 체류 허가증의 문제를 떠나,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경우들로 이 사라짐, 증명의 감각을 매일 매 순간 온몸으로 부딪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게 기울어진 경사를 기어서라도 올라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올라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거대한 산이 있을 것이다. 당장은 투명하지만 돌이켰을 때 돌이켜보는 시선의 반사됨으로 영원히 빛나고 있을 산이 있을 것이다.
-「베를린의 이상우: Raul Lovisoni&Francesco Messina 「Prati Bagnati Del Monte Analogo」」, 107~108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