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은하가 나의 은하를 관통하는 찬란하고 고통스러운 순간
다시 사랑하고, 다시 살아가는, 필멸의 존재들을 위한 강기원의 시집
마주 보기가 아닌 하나 되기. 자기 자신과 완전한 하나가 되고, 나아가 누군가와 그 모든 것을 나누어 갖는 것. 이 시집에는 하나의 은하가 다른 은하를 관통하며 새로운 은하로 합쳐지는 그 강렬하게 빛나는 순간이 담겨 있다.
1997년 등단한 이래, 2006년 『바다로 가득 찬 책』으로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하기까지 강기원은 줄곧 해체 직전 혹은 해체 직후의 신체, 붕괴와 합일의 경계에서 유영하는 정신을 생생하고 정념 어린 시어로 기록해 왔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 시집인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에 이르러 그녀는 경계 상황의 위태로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간과 심장을 나누어 갖는’ 사랑의 순간과 ‘내 안의 열기가 식어 가는’ 한밤의 공허 사이, 모든 것이 ‘거울을 보듯’ 명료해지는 하나 됨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강기원의 시는 자신을 향한 고해성사와 닮았다. 모든 가면을 벗고 거울 앞에 나아가 진정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어두운 밤. 육체를 산산이 분해하고 영혼 깊은 곳까지 해부하는 지독하게 솔직한 응시 이후에 그녀의 시는 그 누군가와 다시 “만나게 될 때”를 위한 기원(祈願)으로 화하는 것이다.
■ 가면 너머, ‘얼굴’과 ‘얼굴’이 마주 보는 밤
강기원이 그리는 소통/ 구원은 진정한 ‘얼굴’을 찾는 것에서 시작된다. “거울 앞에서 낯선 이목구비를” 그리면서 자신이 아닌 자신으로 “무너지듯 잠자리에”(「웃는 데드마스크」) 드는 밤, 시인은 문득 가면을 의식하고 가면 너머의 것을 소망한다. 때로는 테헤란로 한복판에 서 있는 늑대 한 마리의 푸른 눈 안에 깃든 선명한 야성을, 때로는 텅 빈 밤의 욕조에서 내 안의 공허를 자각하는 순수한 혼란을 일부러 일깨우며 ‘얼굴’을 찾아가는 여정 가운데 시인은 읽는 이에게도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거울을 함께 직시하게 한다.
밤의 식탁에서 나는 쓴다/ 사흘쯤 굶어도 식욕이 없는 자/ 신발 사이즈는 커지고/ 브래지어는 B컵에서 A컵으로/ 거울을 닦지 않는 자/ 립스틱은 점점 진해지고/ 뼈의 피리를 지녔으면서도/ 느린 재즈의 선율에 눈 감지 않는 자/ (……)/ 이제 눈물샘마저 막힌 채/ 혀가 굳어 가는 퍼스나/ 새벽이 오는 식탁에서 나는 쓴다/ 쓰고 지운다
―「퍼스나」 에서
절망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며 의문을 품기도 하고 외로워하기도 하는 진짜 ‘얼굴’이 그 거울에 비친 순간, 비로소 우리는 ‘하나의 눈동자’로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일체의 시간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 고통스러울지언정, 다시 사랑이다
시인은 사랑이 결코 “데칼코마니로 마주 보기”가 아니며 오히려 고통을 수반하는 “접붙이기”이자 “상처에 상처를 맞대고 서로 멍드는 일”(「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정의한다. “온도도 굵기도 다른 너와 나의 핏줄”을 힘겹게 꿰매 놓아도 “하나가 된 둘 사이에서”(「아플리케」) 는 순간순간 올이 풀려 나가고, “다 달라서 꼭 맞아”라는 한마디를 믿고 시작한 두 사람의 퍼즐 놀이는 “맞출수록 어긋나는 너와 나의 요철”(「두 사람을 위한 퍼즐 놀이」)에 좌절되곤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신할 수밖에 없는 사랑의 숙명, 다시 서로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을 시인은 놀라울 정도로 농밀한 공감의 언어로 묘파하고 있다.
나의 7그램에
너의 7그램을 합해도
여전히 7그램인 곳
(……)
비로소 네가 너인 곳
내가 나인 곳
(……)
아무튼 그곳에서 만나
눈부시게
캄캄한
정오에
―「정오의 카페 7그램」에서
고통스러울지언정, 다시 사랑이다.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부시도록 캄캄한 정오, 그 기적과도 같이 행복한 절망의 시간을 그려 낸 시인은 어쩌면 우리의 삶과 우리의 갈망과 그 모든 어긋남에 대해 가장 결정적인 것을 밝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 작품 해설 중에서
타자와의 교접에서 시인의 상상력과 에너지는 더욱 빛난다. 「인형」이나 「로제타석」 같은 작품에서 그려지고 있는 감각과 감수성은 타자와의 사이에 다리를 하나 놓는 역할을 하는데, 이 다리 위에서 비로서 일련의 ‘투신-사랑’ 시편들이 보여 주고 있는 놀라운 활력의 불꽃놀이가 펼쳐진다. 이 시편들에서 우리는 관습의 안락의자를 차고 나와 작두날 위에 서 있는 시인을 만나게 된다.
-유준(문학평론가)
■ 추천의 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있다. 오래된 질문이고 대답들도 시도되었다. 글쓰기를 촉발하는 마음 안팎의 여러 사물과 상황을 한껏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문학의 미덕이라면, 이 시집의 작품들이 보여 주는 ‘나’는 그러한 미덕을 지니고 있다.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이런 \’나\’를 꾸밈없이 드러내고 있는데, 따라서 \’가면\’이라든지 \’퍼스나\’ 같은 말들이 이 시집의 내용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도 좋을 터이다.
「방황하는 피」인 그 ‘나’는 테헤란로 한복판에서 “빙하의 박동을 감지하던/ 뜨거운 심장”을 갖고 있는 늑대를 보는데 이러한 환시(幻視)를 하는 피는 아직 싱싱하다고 할 수 있다. 늑대의 푸른 눈과 시인의 눈이 겹쳐지면서 야성의 툰드라가 펼쳐지니…….
-정현종(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