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Chimera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0년 1월 29일
ISBN: 978-89-374-6240-5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32x225 · 488쪽
가격: 15,000원
시리즈: 세계문학전집 240
분야 세계문학전집 240
포스트모더니즘의 이정표가 된 존 바스의 전미도서상 수상작
고답적인 모더니즘 문학에 맞서 새로운 소설 형식을 선보인 작가 존 바스
고전 천일야화와 그리스 신화에 대한 신선한 해석
이야기하기에 대한 이야기, 리얼리티와 허구의 경계를 허무는 독특한 시선
▶ 비극적이면서도 매력적이고, 한 마리 뱀이 만들어 내는 미끈한 곡선만큼이나 우아하다.
―《워싱턴 포스트》
▶ 바스가 꿈꾸는 세상이란 바로 『천일야화』의 세계에서처럼 이야기가 죽음마저도 유예하는 힘을 갖는 세상, 사람들이 괴물의 머리에 올올이 심긴 뱀마저도 “사랑스러운 여인의 머리카락”으로 여길 수 있는 상상력이 넘치는 그런 세상일 것이다. 가공의 괴물 키메라처럼 세 편의 픽션으로 이루어진 『키메라』는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가능성을 약속하는 새로운 신화이기도 하다. ―이운경 |「작품 해설」 중에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기수라 불리는 존 바스의 『키메라』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240번)으로 출간되었다. 1960년대 미국 문단에 큰 파문을 던진 논문 「고갈의 문학(The Literature of Exhaustion)」을 통해 사실주의 문학에 종언을 고한 존 바스는 토머스 핀천, 조지프 헬러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작가이기도 하다. 이미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된 『연초 도매상』에서 흥미진진한 역사소설로 허구와 실재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그가 『키메라』에서는 고전 『천일야화』와 그리스 신화 속으로 뛰어든다. 잘 알려진 고전을 다양한 서술 기법으로 유쾌하게 패러디하면서, 현대 작가들이 당면한 ‘소재의 고갈’이라는 위기 상황을 보도록 성찰하는 이 작품은 소설을 통해 자신의 문학관을 직접 실현해 나간 존 바스의 역작이다.
전미도서상(National Book Award) 수상 작가임에도 바스의 작품은 특유의 복잡한 서술 기법 덕택에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이 많지 않았다. 특히 1970년대 한 차례 번역되어 나온 『키메라』는 헌책방에서도 구하기 어려워 애호가 사이에서는 번역본이 존재한다, 아니다 논란이 분분했던 희귀 작품이다. 존 바스의 『연초 도매상』을 번역한 이운경 선생의 노력으로 마침내 빛을 본 세계문학전집의 『키메라』는 독자들에게 최대한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독자들이 바스식 유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세심하게 주석을 달았고, 이전 번역본에서 시대 분위기 탓에 살리지 못했던 성적인 코드도 모두 살렸다. 곱씹을수록 재미있는 유머를 즐기며 미로 같은 이야기 속을 탐험하다 보면 어느새 더 이상 유령 도서가 아닌, 실재하는 따끈따끈한 『키메라』만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것이다.
■ 차례
두냐자디아드
페르세이드
벨레로포니아드
■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서 재해석한 『천일야화』와 그리스 신화
첫 번째 이야기 「두냐자디아드」의 주인공은 『천일야화』의 셰헤라자데와 두냐자데 자매이다. 처녀와 동침한 후 다음 날 아침이면 살해해 버리는 샤리알 왕의 광기를 멈추기 위해 셰헤라자데는 미래에서 온 마신의 도움을 받는다. 저자 존 바스를 꼭 닮은 이 마신은 창작 부진에 시달리는 20세기의 작가로, 탁월한 이야기꾼인 그녀를 평생 사모하며 존경해 왔다고 말한다. 마신은 자신의 시대에서 읽은 『천일야화』 속 이야기들을 셰헤라자데에게 전해 준다. 그리고 셰헤라자데는 그 이야기들을 매일 밤 이어가면서 천 일이나 수명을 연장해 마침내 왕의 공포 정치를 끝내는 데 성공한다. 마신 또한 이들 자매와 조우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창작 부진의 늪에서 빠져 나온다.
이어지는 「페르세이드」와 「벨레로포니아드」는 그리스 신화의 영웅 페르세우스와 벨레로폰의 이야기를 토대로 하면서도, 주인공들을 마흔 살의 중년으로 설정함으로써 영웅들의 속살을 드러낸다. 두 주인공 모두 사그라지는 영웅 과업의 기억과 날로 쇠퇴해 가는 체력 속에서 방황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지만 결과는 사뭇 다르다. 페르세우스는 신전에 머무르며 신녀 칼릭사와 함께 자신의 인생사와 영웅으로서의 이력을 탐구한다. 젊은 시절에는 괴물을 퇴치해 안드로메다 공주를 구출하고 메두사의 목을 베며 명성을 떨쳤으나 이십 년 뒤에는 결혼 생활도 파탄에 이르고 왕 노릇도 권태로워진, ‘요령을 잃어버린’ 불행한 중년이 되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메두사의 목을 베면 회춘하여 젊은 시절의 영광을 누릴 수 있다고 믿고 과거의 노정을 되밟기로 한다. 생명을 주는 존재로 새롭게 태어난 메두사의 진실한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미망에 휘둘리던 페르세우스가 어리석은 회춘의 꿈을 버리는 순간, 그는 별이 되어 영원한 영웅으로 남게 된다.
반면 벨레로폰은 마흔 살 생일을 앞두고 자신의 평탄하기만 한 인생에 좌절한다. 전형적인 영웅의 궤적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생일 전날 「페르세이드」를 우연히 입수해 읽고 페르세우스를 모방해 과거의 영웅적 모험들을 되밟기로 결심한다. 벨레로폰은 젊은 시절부터 페가수스를 타고 키메라를 퇴치하는 등 영웅들의 삶의 패턴을 좇는 데 열심이었다. 말하자면 영웅 신화학이라는 수업에서 A학점을 받음으로써 진짜 영웅이 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모방으로만 이루어진 그의 삶은 올림포스를 향해 날아오르다 천상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추락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충돌 직전 벨레로폰은 「벨레로포니아드」라는 책의 글자와 문장과 종잇장으로 변신하면서 부분적이나마 불멸성을 성취한다. 「벨레로포니아드」는 벨레로폰(벨레루스를 죽인 자)이었지만 벨레로폰(살인자 벨레로폰)으로 살다가 벨레로폰(벨레루스의 목소리)이 된 인물의 삶을 그린 이야기인 것이다.
■ ‘고갈된’ 전통 문학을 극복하는 존 바스만의 새로운 ‘이야기’
바스는 첫 번째 이야기 「두냐자디아드」에서 소재와 형식의 고갈에 직면한 작가의 분신을 등장시켜 현대 문학의 위기를 보여 준다. 목숨을 잃지 않으려면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 셰헤라자데는 ‘무엇을’ 써야 할지 몰라 방황하는 마신에게 동지이자 훌륭한 전범(典範)인 셈이다. 마신이 미래에서 전해 주는 『천일야화』의 이야기 속 이야기들과, 셰헤라자데와 두냐자데가 처한 독특한 상황은 각각 서로의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데, 이 해법의 공통분모는 바로 ‘이야기하기’, 그 자체이다. 셰헤라자데가 마신을 불러냈던 마법의 주문, “보물을 여는 열쇠가 바로 보물 그 자체이다.”는 곧 소재의 고갈에 맞닥뜨린 현대의 작가들에게 이야기하기 자체가 바로 새로운 이야기임을 설파하는 바스의 외침이다.
『키메라』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형식면에서 새로운 소설 기법을 실험하는 데 주력한다.「두냐자디아드」에서 셰헤라자데의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은 곧 작가의 창작 부진 문제가 해결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셰헤라자데의 이야기를 현실 속에서 읽은 작가가 거꾸로 셰헤라자데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거나, 그 안에서 소재를 발견한 작가가 창작하는 작품이 바로 이 「두냐자디아드」라는, 이야기 구조의 역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비선형적인 서술 구조는 세 편의 이야기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여인 국가 아마존의 유래를 아랍 세계(「두냐자디아드」)에서 찾는 동시에 그것을 그리스 신화 세계(「벨레로포니아드」)에도 끼워 넣으면서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의 존재를 담보하는 증인이 된다. 하나의 픽션이 다른 픽션의 리얼리티를 증명해 주는 형국이다. 사자의 머리와 염소의 몸통, 용의 꼬리를 가진 괴물 키메라처럼 『키메라』에 담긴 세 편의 이야기들은 이러한 식으로 기묘하게 접합되어 있다.
결국 이야기의 리얼리티가 서로 다른 관점들의 집합에 불과한 상황에서 무엇이 픽션이고 무엇이 실제인지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이러한 점은 「벨레로포니아드」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벨레로포니아드」는 대화, 독백, 인터뷰, 강의록, 연구 자료, 편지 등 여러 가지 형식이 섞인 변화무쌍한 텍스트이다. 그리스 신화의 벨레로폰 이야기뿐 아니라 앞의 「두냐자디아드」, 「페르세이드」도 직간접적인 패러디의 대상이 된다. 벨레로폰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는 19세기의 글이 불쑥 나타나 그의 신화적 영웅 인생의 길잡이가 되는가 하면, 소설 속에 삽입된 벨레로폰의 신화에 대한 자료를 벨레로폰 자신이 직접 평가하기도 한다. 이렇게 시간의 질서가 뒤바뀌고 안과 밖, 허구와 실제의 경계가 해체되는 것이다. 종국에는 주인공인 벨레로폰 자신이 「벨레로포니아드」 자체가 됨으로써 바스는 소설의 내용과 형식의 구분마저도 허물어뜨린다. 「두냐자디아드」에서처럼 마신으로 등장하지 않더라도 그는 이미 소설 전체에서 이야기를 요술처럼 부리는 마술사 같은 작가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