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어난 영상 미학의 터치, 한 폭의 수채화 같은 소설
중견 작가 조성기가 2년 만에 신작 소설집. 연작 소설의 성격을 띤 「종희의 아름다운 시절」과「종희의 서러운 시절」, 그리고 실험적 글쓰기가 돋보이는「타타르인의 참혹한 시절」 세 편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의 두 단편은 원산 출신의 실향민 이종희 씨를, 세 번째 작품인「타타르인의 참혹한 시절」은 6·25당시 한국에 남아 있던 유일한 타타르인 가족을 취재해 소설화한 것이다.
15년 동안 간직해 온 아름답고 서러운 이야기
이종희 씨는 작가와 그의 가족이 세들어 살던 집의 안주인이었다. 원산 출신의 실향민이었던 그녀는 종종 옛 시절들을 회억했고 작가는 소설로 쓰기로 작정하고 긴 기간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것이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그때 녹취한 10개 가량의 테이프가 낡은 가방에 오랫동안 들어 있었다. 지금까지 열 번 가까이 이사를 다니면서도 그 가방을 챙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그러나 포스트 모던의 화두가 난무하는 시대에 가방처럼 낡은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작업으로 여겨졌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2년 전 영화 「아름다운 시절」을 보고 나서야 작가는 이종희 씨의 테이프를 다시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 소설에도, 멀리서 바라보는 절제된 시선의 롱데이크 기법을 도입해 종희의 인생을 펼쳐보이고 있다. 종희의 삶을 \’아름다운 시절\’과 \’서러운 시절\’로 가름하는 것은 다름아닌 한국 전쟁이다. 함경도 원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종희는, 전통적인 현모양처의 자애로움과 신여성의 지성을 겸비한 아름다운 아가씨로 자라나는 중이다. 그러나 전쟁과 함께 닥친 가족의 이산과 피난 생활로 이어지는 그녀의 서러운 시절이 시작된다. 부모님을 북에 두고 오빠들과 월남한 종희는 부산 피난민 수용소에서 탈출해 강인한 생활력으로 살아가며 가족 상봉의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한국에서 겪은 타타르인의 수난사
서울대 김성곤 교수로부터 소설집의 \’압권\’이라는 찬사를 받은「타타르인의 참혹한 시절」은 6.25 당시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던 타타르인 가족의 수난을 소재로 하고 있다. 명동 근처에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던 이들은 미군 첩자로 오인받아 중강진까지 끌려간다. 추위와 배고픔으로 미군 포로들은 하나둘 쓰러져가지만 이들만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버티어낸다. 이들을 지탱하는 것은, 자신들이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타타르인 즉 칭기즈칸의 후예라는 신념이다. 휴전 협정으로 극적으로 목숨을 구한 이들은 미국으로 떠나 그곳에 자리 잡는다. 88올림픽 때 다시 서울을 찾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전쟁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서울은 성형 미인과 연예인 바람 그리고 한켠에서는 학생들의 분신 자살과 도시 빈민들의 고단한 삶으로 얼룩진 기형적인 모습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이 작품 역시 작가가 타타르인을 실제로 만나 취재한 결과물이다. 작가는 이들의 수난사를 소설의 중심에 두고, 그 사이사이 냉혹한 동물 세계의 원칙을 환기시킴으로써, 서로 무자비하게 죽이는 6·25 전쟁과 동물의 세계를 대조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이를 통해 이종희 씨가 이산 가족이 될 수밖에 없었던 \’동물학적인 상황\’을 그린 것이다.
상처를 보듬는 화해의 노래
지난 8·15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 장면들을 보면서, 작가는 몇 년 전에 작고한 이종희 씨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작가는 이종희 씨를 비롯해 이산의 아픔 속에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오신 모든 분들을 떠올리며 이 소설집을 상재했다. 한편으로는 이산의 아픔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의 이해를 얻고자 하는 작은 바람도 보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