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폴 오스터가 선보인 슬립스트림 문학의 절정을
성취한 작가 애나 캐번의 최고 걸작
어슐러 르 귄, 커트 보니것, J. G. 밸러드, 차이나 미에빌을 사로잡은
20세기 디스토피아 소설의 정전(正典)!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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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의 말
악몽 같은 상상력
질주하는 몽환
파국의 로맨스
내가 살던 세상 대신에 이제 곧 얼음, 눈, 고요, 죽음만이 존재하게 될 것이었다. 폭력도 전쟁도 피해자도 더는 없으며 얼어붙은 침묵, 생명의 부재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인류의 궁극적 성취는 자기 파괴뿐만 아니라, 나아가 모든 생명의 파멸이리라. 생동하던 세계가 죽음의 행성으로 변화하는 것 말이다. -본문에서
“캐번이 쓴 얼어붙어 가는 세계는 곧 침략이다. 얼음이 당신을 향해 다가오고, 당신을 포위하고, 당신을 침략하고, 당신을 그 속에 사로잡는다. 적도의 열대 지방으로 비행기를 타고 달아나도 안도감은 일시적일 뿐, 얼음이 결국 당신을 따라잡는다.” -크리스토퍼 프리스트
“유일무이한 작품!” -도리스 레싱(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오늘날 가장 신비한 작가 애나 캐번은 『아이스』를 통해 매혹적인 세계를 창조해 냈다. 캐번의 강렬한 작품 세계와 겨룰 수 있는 현대 작가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J. G. 밸러드
“진실로 환상적이고 경이로운 작가를 골라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애나 캐번을 선택하겠다.” -패티 스미스
“우리 시대에 가장 위대하고 독창적인 작가.” -《가디언》
“애나 캐번은 예언자였다. 『아이스』의 비전, 이를테면 기후 변화와 전쟁 위기가 이제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뉴요커》
애나 캐번은 아직 우리에게 생소한 작가이지만 현대 소설의 독특한 흐름을 이룬 ‘슬립스트림 문학(SF 작가 크리스토퍼 프리스트의 정의에 따르자면 “독자들에게 낯선 관점에서 익숙한 광경이나 사물을 마주한 듯 ‘타자성’을 유발하는 작품”을 일컫는다.)’의 예언자이자 완성자이고, 실험적 기법과 독창적 시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은 물론 공연 예술, 음악과 미술 등 광범위한 영역에 현저한 영향을 끼친 우리 시대의 거장이다. 그중에서도 작가가 사망하기 일 년 전에 발표한 유작 『아이스』는 평단과 대중을 모두 사로잡은 최고 걸작이자 현대 SF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결정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SF 문학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시작되었고, 애나 캐번의 『아이스』를 통해 또 다른 정점에 다다랐다. 따라서 우리는 『아이스』를 그 무엇으로도 분류할 수 없다.” -브라이언 올디스(휴고상, 네뷸러상 수상자)
애나 캐번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도리스 레싱을 비롯해 진 리스, 아나이스 닌, J. G. 밸러드, 크리스토퍼 프리스트, 어슐러 르 귄 등 내로라하는 작가들에게 일제히 상찬받았을 뿐 아니라, 초현실적이고 서사 파괴적이며 대담하도록 실험적인 글쓰기를 통해 카프카, 보르헤스, 칼비노 등 독보적인 문학 세계를 선뵌 대문호에 비견되기도 했다. 또한 『아이스』는 ‘슬립스트림 문학’이라는 용어가 미처 문단에 자리 잡기도 전에, 전대미문의 기상천외한 글쓰기를 성취함으로써 훗날 J. G. 밸러드의 ‘지구 종말 시리즈( 『크리스털 세계』 등)’, 어슐러 르 귄의 『어둠의 왼손』 등 페미니즘 SF, 우리에게도 익숙한 무라카미 하루키와 폴 오스터, 영화감독 스파이크 존즈(「존 말코비치 되기」)에 이르기까지 무궁무진한 공명(共鳴)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아이스』를 필두로, 애나 캐번의 경이로운 작품들은 단지 예술적 창작물에 그치지 않고, 그의 불행과 고통, 절규로 가득한 삶 자체를 반영하고 있다. 아버지의 부재(자살)와 어머니의 외면, 좌절당한 꿈과 강요된 혼인(어머니의 전 애인과 결혼해야만 했다.), 억압적인 결혼 생활, 지옥의 밑바닥처럼 아득한 우울과 치명적인 약물 중독은 애나 캐번의 인생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본명으로 발표한 (보다 자전적인) 초기 작품들뿐 아니라, 대표작 『정신 병동에서』와 『아이스』에서도 이러한 어둠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한편 굉장한 여행가(세계 일주를 할 정도였다.)이자 속도광(자동차 경주 애호가였다.), 심도 있는 정신 분석학 경험자(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제자, 루트비히 빈스방거와 인연을 맺기도 했다.)로서 다채로운 모티브, 착란적 서사, 거침없이 내달리는 문장을 완성한 애나 캐번은 주제와 기법, 모든 면에서 삶을 예술로 승화해 냈다. 도리스 레싱의 찬사대로 “유일무이한 작품”인 『아이스』는 이제껏 그 누구도 가닿지 못한 기이하고 불길하며 불가지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더불어 제2의 물결 페미니즘이 대두하기에 앞서 여성의 왜곡된 섹슈얼리티, 가정 폭력 문제, 가부장제의 성 착취 구조 등을 적나라하게 고발했으며, 기후 위기와 세계 대전의 출현을 경고함으로써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아니 더욱 절실한 문제의식과 비전(vision)을 고취했다.
이 세상 것으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새하얀 무엇인가가 덤불 울타리 위로 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울타리 중간이 어슴푸레하게 비어 있는 곳을 지나쳤고, 그 틈새를 흘끗 들여다보았다. 한순간이었지만 내가 내쏘는 불빛은 마치 탐조등처럼 고정된 채 그 여자의 나신을 밝혔다. 아이처럼 가냘프고, 생기 없이 쌓인 눈의 희뿌연 색과 대비되는 환한 상앗빛 몸. 그 여자의 머리카락은 넓게 펼쳐진 유리처럼 밝게 빛났다. 그 여자는 내 쪽을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 여자는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장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처럼 단단하고, 반짝이는 얼음으로 이루어진 그 장벽의 중심에 그 여자가 있었다. -본문에서
공포는 그 여자가 살아가는 환경 그 자체였다. 타인의 진심 어린 친절을 그녀가 알았더라면, 모든 게 달라졌을 터다. 나무들은 고의적인 악의를 가지고 그 여자의 앞길을 가로막는 듯 보였다. 평생토록 그 여자는 스스로를 아무에게도 구원받지 못할 희생자로 여겨 왔는데, 이제 이 숲마저 사악한 힘으로 그녀를 파괴하려는 것이다. -본문에서
그 여자에게 내재된 무언가가 틀림없이 부당한 폭력과 공포를 요구했다. 그렇게 그녀는 내 꿈을 망쳐 놓으면서 내가 감히 발을 내디딜 생각조차 못 했던 어두운 장소에까지 나를 데려갔던 것이다. 이제 우리 중 누가 피해자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희생양이었는지도 모른다. -본문에서
그동안 무의미하게 방랑했음을 생각하니, 저 눈보라와 똑같은 광기의 열병이 내 안에서도 타올랐다. 광란의 춤을 추는 눈의 결정체는 우리의 삶 그 자체였다. 그 여자의 이미지 또한 그 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수은처럼 흘러내리는 은빛 머리카락도 순식간에 그 광란에 휩쓸려 갔다. 그 환상적인 춤의 섬망 속에서는 폭력을 행사하는 자와 폭력의 희생자를 구별할 수 없었다. 모든 무용수가 공허의 가장자리를 따라 빙빙 도는 죽음의 무도에서 두 존재의 구별은 실상 무의미했다. -본문에서
『아이스』는 돌연 시작한다.(“나는 길을 잃었다.”) 시대와 장소, 심지어 등장인물의 성별과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은 채로 불길한 추위 속에서 첫 장면이 펼쳐진다. 도무지 믿을 수 없고 정체 불명의 화자인 ‘나’는 군인이거나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공작원, 혹은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그는 긴 해외 생활을 마친 뒤, 때아닌 추위가 엄습해 오는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굳이 이곳까지 찾아온 까닭은 단지 임무나 연구를 마쳤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그에게는 다른 목적이 있다. 그의 머릿속을 온통 헤집어 놓고, 지독한 강박에 시달리게 하는 한 가지 이유, 바로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이곳에 당도했다. 그 여자를 언제 만났던가? 이야기는 느닷없이 매서운 얼음에 서서히 잠식당해 가는 달빛 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그 여자의 모습을 그려 내며, 더 먼 과거로, 마치 점프컷을 하듯 거침없이 뛰어 들어간다. 그 여자에게는 한 남자가, 교도소장이기도 하고 독재자이기도 하며 그 여자의 목숨을 멋대로 쥐고 흔드는 악령이기도 한 남자가 있다. 주인공은 그들 부부를 만났고, 그들의 기형적인 관계를 목격했으며, 그리고 그 여자에게 사정없이 빠져들었다. 공회전하는 세 사람의 대화는 또다시 단절되고, 무시무시한 얼음의 습격이 이어진다. 화자는 사나운 칼바람을 뚫고, 얼어붙은 바다를 가로지르고, 온갖 역경과 고초를 불사하며 오로지 그 여자를 추적한다. 하지만 여자는 악독한 용에게 사로잡힌 중세의 고귀한 여왕처럼, 남편과 그의 부하들에게 완전히 감금당한 채 우물 같은 어둠 속에 갇혀 있다.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 여자를 만날 수 없고, 교도소장 혹은 적대적인 남편의 폭력과 권위에서 결코 놓여나지 못한다. 시공간을 초월한 혼란, 무절제한 환각처럼 주인공의 추격은 자꾸만 뒤엉켜 가고, 그사이 전 지구적 전쟁과 파멸적인 얼음의 침식이 숨통을 조여 온다. 여자에 대한 광기 어린 집착, 산산이 부서진 기억의 편린, 얽히고설킨 부조리한 현실 탓에 급기야 주인공 ‘나’는 스스로를 의심하며 차차 자아를 잃어 가고, 심지어 여성의 남편, 즉 교도소장과 자신을 동일시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잔혹한 추위와 시퍼런 얼음은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끊임없이, 그리고 무심하게 파괴해 나간다. 이 불가피하고 절대적인 절멸의 순간 앞에서 세 사람은 계속 운명의 주사위 놀이를 이어 갈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