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처 마틴
원제 Pincher Martin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22년 10월 31일 | ISBN 978-89-374-6419-5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32x225 · 328쪽 | 가격 14,000원
시리즈 세계문학전집 419 | 분야 세계문학전집 419, 외국 문학
수상/추천: 노벨문학상, 부커 상
“우리를 현재 있는 그대로 상정하면 천국은 완전한 무(無)일 거야.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은. 알겠어?
우리가 생명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일종의 검은 번개일 거라고.”
『파리대왕』으로 영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윌리엄 골딩의 문제작
대서양 한복판에서 조난된 해군의 생존을 건 치열한 사투
극한에 몰린 인간의 영혼과 광기에 관한 집요한 탐구와 충격적인 깨달음
▶ 참혹하고 격렬하게 현실적이다. 다시 읽기를 강요하는 독특한 작품. – 말런 제임스(자메이카 소설가)
▶ 이 작품은 최고에 가까운 묘기이자 신기다. ─ 《업저버》
노벨 문학상과 부커 상 수상 작가이자 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 문단을 대표하는 작가 윌리엄 골딩의 소설 『핀처 마틴』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으로 출간되었다. 첫 소설인 『파리대왕』에서 골딩은 외딴섬에 고립된 소년들이 원시적인 야만 상태로 퇴행해 가는 과정을 그렸다. 인간 사회를 우화적으로 묘사한 이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이후 영화와 연극으로도 만들어졌다. 첫 작품의 성공 이후『상속자들』(1955),『자유 낙하』(1959), 『첨탑』(1964), 『피라미드』(1967) 등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한 골딩은 1980년 부커 상, 198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1988년 영국 왕실에서 훈작사 작위를 받으며 문학적 진가를 증명했다. 주로 계급과 문명, 야만 등의 문제에 천착한 작품을 집필해 온 골딩의 1956년 작 『핀처 마틴』은 죽음의 공포와 거대한 자연에 짓눌린 인간의 정신이 맞닥뜨리는 한계에 관한 치밀한 탐구이다. 인류나 사회가 아닌 한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여 불안, 자의식, 자기중심주의에 갇힌 인간 본성에 관한 탁월한 성찰로 골딩의 문학관이 가장 잘 드러나는 철학적인 작품이다.
■ 죽음의 공포와 실존의 위기를 맞닥뜨린 인간 정신
소설은 ‘그’가 암흑 속에서 눈을 뜨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대서양 한복판에서 구명대 하나에 의지해 발버둥 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 ‘그’는 시각, 촉각, 청각 등 자신의 감각을 일깨우는 데도 어려움을 느낀다. 몸을 간신히 추슬러 올라간 암석 위를 탐사하며 물과 식량을 찾는다. 미역 줄기를 모아 구조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사투를 벌이는 도중, 번개의 섬광처럼 떠오르는 과거의 파편들을 하나씩 떠올린다. 그는 자신이 함선에서 좌초된 영국 해군 임대위인 크리스토퍼 마틴임을 깨닫는다. 내면의 목소리가 회상하는 과거 기억들은 죽음의 위기에 놓인 극한의 현재와 교차되어 ‘그’의 몸과 마음을 모두 한계점까지 내몬다.
“제정신이란 현실을 알아보는 능력이야. 내가 처한 현실은 무엇이지? 나는 대서양 한복판의 암석 위에 외로이 있어. 내 주위로는 광대한 넓이에 빙빙 도는 물이 있고. 하지만 이 암석은 고체야. 이 암석은 내려가서 해저와 합류하고, 또 그 해저는 내가 알아 왔던 바닥들과, 해안 및 도시들과 합쳐지게 되지. 이 암석은 고체고 움직일 리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 해. 이 암석이 움직인다고 하면 그럼 내가 미친 거야.” – 본문 중에서
대서양 한복판에서 분투하는 생존기로 시작하는 『핀처 마틴』은 과거의 기억과 한계에 부딪힌 마틴의 정신이 광기로 스러져 가는 과정이 교차하며 인간 내면의 심오한 성찰로 변모한다. 마틴은 현실을 직시하기를 명령하는 내면의 목소리와 오직 생존만을 목표로 하는 본능적인 자기중심주의 사이에서 고통받고 방황한다. 최후의 순간, ‘검은 번개’가 내리치며 마틴이 마주하게 되는 충격적인 진실은 독자에게 지금까지 몰입하며 읽어 온 연대기를 반전시키는 놀라운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
■ 원형과 상징으로 이룩한 골딩의 자전적 신화
처음으로 인류가 아니라 한 개인을 주인공으로 집필한 소설인 만큼, 골딩은 전작에 등장한 그 어떤 인물보다 주인공 핀처 마틴에 자신의 생애를 닮은 조건들을 많이 부여했다. 해군 임대위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해 비스마르크호 격침 및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 기여했던 골딩은 핀처 마틴을 함선에서 좌초한 해군 임대위로 설정했다. 또한, 옥스퍼드 브래스노스 칼리지에 들어갔고, 집필 활동을 하며 연극 배우로 활동했던 경험까지도 핀처 마틴과 같다. 섬 전체를 하나의 연극 무대 삼아 주변 환경을 무대 배경에 비유하는 구절이 다수 등장하며,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 『햄릿』,『헨리 4세』 및 그리스 신화의 인물들을 암시하고 패러디하는 독백들이 군데군데 등장한다.
크리스토퍼 마틴이 ‘핀처(Pincher)’ 마틴으로 불리는 것은 영국 해군에서 성씨에 맞춰 별명을 붙이는 풍습에서 유래한다. ‘꼬집는 사람’이라는 뜻의 ‘핀처’는 마틴의 육체적인 욕망을 상징하는 말로 볼 수 있다. 별명 그대로 그는 마치 집게발을 가진 것처럼 원하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탐욕적으로 꼬집는다. 집게발이 마틴의 신체적인 욕구의 핵심임을 증명하듯이, 작중에서 마틴의 손이 집게발로 환각처럼 보이는 장면이 등장한다. 마지막에 ‘무(無)’에 점령당하고 나서 마틴의 욕심의 결정체인 집게발만이 남기도 한다. 『핀처 마틴』은 단순한 상황과 플롯을 기반으로, 『오디세이아』와 같은 신화적 원형과 상징이 많이 반영된 골딩의 자전적인 ‘신화’라고 할 수 있다.
■ 편안한 깨달음에 저항하는 시(詩)적 서사
『핀처 마틴』은 쉽게 읽히는 작품이 아니다. 살풍경한 바다와 암석 더미를 그리는 서술과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는 주인공의 붕괴하는 내면을 그리는 시적 묘사가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고 있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골딩은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소설보다 시를 먼저 쓰기 시작한 시인이었다. 열일곱 살쯤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34년 데뷔작 『시집(Poems)』을 발표했다. “시를 쓰지 못하여 산문을 쓴다.”고 말했던 골딩의 산문은 단어 하나하나가 함축적이며 때로는 통상적인 영어 문법에도 얽매이지 않는, 시적 허용과 리듬이 눈에 띄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의 줄거리를 평론가들마다 다르게 파악하고 있으며, 어떤 평론가는 “읽을 수 없다(unreadable).”라고 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압박감에 짓눌린 한 인간의 정신에 관한 강력한 탐구는 소설 자체가 일종의 광기인 것을 깨닫게 하고, 독자 또한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 실제가 아닌 것들에 관한 심오한 감정들을 추체험하게 한다. 골딩은 서사를 이끄는 과정에서 타협하지 않고, 완전한 설득력으로 마틴의 의식이 무너지는 과정을 살뜰히 묘사했다.
이런 주인공의 의식이 죽어 가는 과정을 다룬 만큼, 작중에서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과거의 사건들이 퍼뜩퍼뜩 떠오르면서 마치 암호를 풀어 보라는 듯이 퍼즐 조각들을 던진다. 다시 읽어 본다면 핀처 마틴이 작품 내내 마치 바늘로 눈을 찌르는 듯한 예리한 깨달음들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골딩의 자전적인 요소가 가미된 것은 물론, 여러 상징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그리스 고전 및 셰익스피어 문학에 대한 언급이 상당한 만큼 이 작품은 읽을 때마다 의미가 드러나는 새롭고 난해한 작품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작품 해설』 중에서
■ 본문 중에서
그는 사방으로 몸부림치고 있었고, 본인 몸이라는 뒤틀며 발버둥질하느라 얽히고설킨 모양의 중심부였다. 위도 아래도 없었고, 빛도 없었고 공기도 없었다.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게 느껴지더니 새된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살려 줘!” (7쪽)
“우리를 현재 있는 그대로 상정하면 천국은 완전한 무(無)일 거야.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은. 알겠어? 우리가 생명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일종의 검은 번개일 거라고.” (94쪽)
“내가 죽으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97쪽)
“바라야 하는 목표는 구조되는 거야. 그러려면 최소한의 필수 조건은 생존이야. 이 몸이 견뎌 내도록 유지해야 해. 몸에다 식수와 식량과 쉼터를 공급해야 해. 그렇게 수행할 때 어쨌든 그 과제가 수행되기만 한다면 잘 수행되는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아. 명줄이 끊어지지만 않으면 이렇게 섬뜩한 막간극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다 어떤 미래를 이어 줄 테니까. 그게 1번. (110쪽)
잠은 죽겠다고, 인격 같은 건 꺾인 채로 완전한 무의식으로 들어가겠다고 동의하는 행위이자, 우리는 땜질된 가(假)구조들이며 우리가 지극히 우리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매일매일 한숨을 돌리지 않으면 보조를 맞추지도 못한다는, 필멸성에 내포된 바를 너무도 솔직하게 인정하는 행위였다……. (124쪽)
“우리 구더기들은 일주일 내내 거기 있거든. 있지, 중국인들은 진짜배기 진미를 준비하고 싶으면 주석 상자 안에다가 물고기 한 마리를 묻어 둔단 말야. 조금 있으면 쪼끄만 구더기들이 죄다 고개를 디밀고 나와서 먹어 치우기 시작하거든. 조금 있으면 물고기가 없어. 구더기만 있지. (…) 작은 놈들이 쪼그마한 놈들을 먹어. 중간 크기 놈들이 작은 놈들을 먹고. 커다란 놈들이 중간 크기 놈들을 먹어. 그러다 보면 커다란 놈들이 서로서로 먹어 치워. 그러다 보면 두 마리, 또 그러다 보면 한 마리만 남게 돼서 물고기 한 마리가 있던 자리에 이제는 한 마리의 거대한, 최후의 승기를 거머쥔 구더기가 남는 거지. 그게 진미거든.” (186쪽)
“그건 뭔가 내가 기억하고 있던 거였어. 다시 기억해 내지 않는 편이 낫겠다. 잊어버리는 걸 기억하자. 광기일까?”
광기보다도 나쁜 것. 제정신이다. (234쪽)
“이제 할 만큼 했나, 크리스토퍼?”
그는 입술을 쳐다보았다. 그 입술은 그 말들만큼이나 뚜렷했다. 오른쪽 입꼬리 근처에서 미세하게 티끌만 한 침이 입술에 합류했다.
“내가 저런 말을 절대 고안해 냈을 리가 없는데.” (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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