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혜진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22년 10월 21일
ISBN: 978-89-374-7237-4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7x188 · 312쪽
가격: 15,000원
분야 한국 문학
“아줌마, 근데 아줌마는 좋은 사람이에요?”
“아니, 좋은 사람은 아니야.”
“왜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왜냐하면 매일 사람들한테 이렇게 사과 편지를 쓰고 있거든.”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악인
용서받지 못한 가해자
어쩌면 가혹한 누명을 뒤집어쓴 피해자
역경에 굴복한 패배자
시련 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린 얼간이…
지금 그녀는 어떤 사람일까?
끝난 듯한 이 삶은 다시 시작될 수 있을까?
경청 7
작가의 말 309
김혜진 신작 장편소설 『경청』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2012년 등단 이후 2013년 첫 장편소설 『중앙역』을 펴낸 작가는 이후 『딸에 대하여』를 비롯해 『9번의 일』 『불과 나의 자서전』 등 모두 7편의 소설책을 펴내며 누구보다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 결과는 문단과 대중의 폭넓은 지지. 10년 사이 김혜진은 대체 불가한 이름이 되어 한국문학에 새로운 색깔을 더하고 있다.
특히 지난 4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엄마와 딸이 서로가 속해 있는 세계로 다가서는 과정을 밀도 높은 긴장감과 현실적인 연대의식으로 풀어낸 소설 『딸에 대하여』가 프랑스의 세계적인 출판사 갈리마르에서 출간되며 작가를 향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호평받는 『딸에 대하여』는 현재까지 전 세계 16개국 언어로 번역되었다. 실로 많은 이들이 김혜진의 차기 장편소설을 기다려 왔다.
『경청』은 그간 김혜진 소설이 천착해 왔던 주제, 즉 타인을 향한 이해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 의식과 맥을 같이 하지만 기존의 작품들과 전혀 다른 시선을 제공하며 세상과의 소통을 시도한다. 세상으로부터 철저하게 차단당한 뒤 인생이 멈춰 버린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번 소설은 빠르게 판단하는 것에 익숙해진 세상을 상대로 어떤 판단도 할 수 없는 침묵의 순간을 쌓는다. 인물이 변해 가는 사이, 세상을 판단하는 우리의 속도에도 변화가 시작된다. 경청의 시간이 온다.
■ 국민 상담사에서 공공의 적으로
임해수는 삼십 대 후반의 심리 상담 전문가다. 자신의 감정에 대해 자신할 뿐만 아니라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날 이후, 신뢰받는 상담사 임해수의 일상은 중단됐다. 내담자들에게 자신 있게 조언하던 임해수의 자리 역시 사라진다. 지금 해수가 있는 곳은 모욕의 한가운데. 세간의 구설에 오르며 대중의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 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차례로 이어진 퇴사 통보, 이별, 끝 모를 자기연민……. 일과 삶의 세계로부터 모두 추방된 임해수의 삶은 캔슬컬처의 면면을 보여 준다. 그녀의 존재는 한순간 세상으로부터 ‘취소’당했기 때문이다.
■ 보내지 못하는 편지
세상과 담을 쌓은 채 혼란에 잠겨 있는 임해수는 매일 밤 편지를 쓴다. 자신에게 반성과 사과를 요구하며 ‘진정한 뉘우침’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향해 쓰는 글이다. 사과인 듯 항의인 듯, 후회인 듯 변명인 듯, 그러나 그녀는 어떤 편지도 완성하지 못한다. 완성되지 못한 편지는 끝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폐기되기를 반복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나는 것은 자기연민과 자기합리화의 무한 반복. 그 사이에서 스스로를 잃어 가는 모습은 독자들을 죄와 벌에 대한 심오한 질문과 마주하게 한다. 어쩌면 가장 가혹한 벌이란 스스로를 벌해야 하는 상황이 아닐까. 밤마다 자신을 옭아매는 원망과 울분, 학대에 가까운 자기비하와 자기부정으로 전쟁이 벌어지는 임해수의 내면과도 같은.
■ 고양이 구조하기
편지 쓰는 시간을 제외하면 산책하는 것이 일과의 전부인 해수의 시선에 길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온다. 굶주렸지만 사람을 경계하는 고양이는 어딘가 아픈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고양이 주변을 서성이던 해수는 고양이의 이름이며 이 길 위에서 고양이가 살아온 나날에 대해 알려주는 아이를 만난다. 그러는 동안 해수는 쉽게 구조되지 않는 고양이와도, 이따금 만나 순무에 대해, 또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아이와도 조금씩 친밀해진다. 낯모를 존재들과 함께하는 순간들만이 침잠해 있는 그녀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시간이다. 그녀는 점점 더 고양이 구조에 몰입한다. 고양이를 위험으로부터 구조해 내는 일이 막다른 길에서 방향을 잃고 멈춰 선 자신을 구조하는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 판단하지 않는 일
누구나 살면서 잘못을 하고, 잘못한 사람은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책임져야 하는 몫과 감당해야 하는 고통의 적정량에 대해서는 누가 말해 줄 수 있을까. 법의 언어가 지시하지 않는 곳에서 우리는 반성과 사과에 대해, 진정한 뉘우침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앞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신을 벌하고, 한편으로는 자신과 화해하며 다시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물음을 던지고 또 던지며 방황하는 사이 해수에게도 변화가 일어난다. 어느 순간부터 해수의 일상에서 편지 쓰는 시간이 줄어든다. 말하고 싶은 세계에서 듣고 싶은 세계로 건너간 걸까. 그녀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고 있는 걸까.
『경청』은 모두의 비난을 받고 있는 한 사람을 향해 어떤 입장도 취하지 않는다. 그저 그가 자신의 삶에서 치르고 있는 대가가 무엇인지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을 고집스러울 정도로 완고하게 유지할 뿐이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악인, 용서받지 못한 가해자, 어쩌면 가혹한 누명을 뒤집어쓴 피해자, 역경에 굴복한 패배자…… 그러나 그 고집스러운 관찰자의 시선 속에서 우리는 그를 판단하고 싶은 욕망을 유보하게 된다. 그를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끝내 주저하게 된다. 무엇인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고, 때로는 그것이 더 중요한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 본문에서
“그녀는 오래도록 감정을 내보이지 않고 살았다.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대체로 견딜 만했고 쉽게 잊었다. 그녀는 자신이 감정을 통제한다고 믿었다.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불가능해진 지금, 그녀는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이전의 삶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10쪽)
”환한 낮에는 모든 게 쉽게 드러나고, 사람들은 드러난 것들에 대해 떠드는 걸 좋아하니까. 시야가 좁아지는 한밤에야 사람들의 무시무시한 호기심도 비로소 잠이 드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어두운 쪽을 골라 디디며 공원을 한 바퀴 더 돈 다음 공원 입구 쓰레기통 앞에 멈춰 선다. 그런 뒤엔 반듯하게 접은 편지를 꺼내고 그것을 찢어 버린다. 거기 담긴 자신의 감정을 폐기하겠다는 듯이. 두 번 다시 그런 감정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듯이.“ (11쪽)
”남들과 선을 긋는 말들. 다른 사람들을 멀리 내모는 말들. 결국 자신의 올바름과 정의로움을 도드라지게 하는 말들, 그러나 그녀에게 그 모든 말들은 차이가 없다. 사람들의 말은 그녀가 지나온 시간들을 상기키시니까. 여전히 모든 게 조금도 잊혀지지 않았다는 증거니까. 언제까지나 이런 식으로 끈질기게 자신의 이름이 회자될 거라는 경고니까. 그건 그녀의 자격지심이고 피해 의식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녀는 휘말리고 싶지 않다. 그게 무엇이든, 어떤 일이든, 더는 연루되고 싶지 않다.“ (15쪽)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펜을 들어 아무거나 쓰기 시작한다. 새하얀 편지지 위에 동그랗고 길고 뾰족한 무늬가 어지럽게 생겨난다. 어쨌든 읽을 수 있는 글자는 아니다. 그녀는 태주에게 말을 전할 자신이 없다. 그건 불가능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가지런하게 나아가는 이런 반듯한 형식으로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28쪽)
“그녀는 환하고 넓은 길과 어둡고 좁은 길 사이에 위치한 자신의 집을 돌아본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한 상태로 상반된 두 세계의 경계가 된 집. 그녀는 정처없이 떠오르는 기억을 따라 걷는다. 그러면서 어떤 기억을, 어떤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지난날의 자신을 상기한다.” (34쪽)
“그녀의 눈에도 순무의 상태는 좋지 않아 보인다. 그녀는 한 손으로 해를 가린 채 다른 한 손을 흔들어 본다. 순무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본다. 환한 햇살 속에서 그녀와 순무의 눈이 마주친다.”(46쪽)
“어느 순간, 그녀는 자신과 그 작은 생명체 사이에 어떤 가느다란 유대감이 생겼났음을 알아차렸다. 인간과 동물. 언어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이. 다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는 정도로, 아주 최소한의 행위만 허락된 관계. 서로에게 완벽하게 무지하다는 난관 속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진심이 순무에게 전해졌음을 느꼈다. 아니, 그것은 이상한 확신이고 터무니없는 바람일지도 모른다.”(88쪽)
“동정, 연민, 연약하고 가여운 동물에게 느끼는 흔해 빠진 감정.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자신이 인타까워하는 것이 순무를 사로잡은 고통인지, 그런 고통에 노출된 삶인지, 고통을 견뎌 온 지금까지의 시간인지, 얼마가 될지 모르는 앞으로의 시간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것이 순무에 대한 것인지, 자신에 대한 것인지, 그 둘이 뒤섞인 것인지도.”(109쪽)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선택일 수 있고, 때로는 뭔가를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말을 그녀는 삼킨다. 그런 이유로 그녀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니니까. 이것은 결정이라기보다는 보류에 가까운 선택이니까.”(155쪽)
“오전에 보는 순무는 나른하고, 오후에 보는 순무는 기진맥진하며, 밤에 보는 순무는 약간의 생기가 있다. 새벽은 그녀가 짐작하기 어려운 시간이다. 순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새벽을 보내는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157쪽)
“그녀는 거기까지 쓰고, 끝까지 쓰기 위해 몇 개의 단어를 고쳐본다. 내부적으로라는 말을 은밀하게로 바꾸고 비밀스럽게라는 단어를 추가한다. 준비라는 단어를 모의, 작당, 공모, 같은 단어로 바꿔보기도 한다. 무표정에 가까웠던 편지에 어떤 표정이라 할 만한 것이 어른거리기 시작한다. 그녀가 단 한 번도 내보이지 못했던 감정들. 부적절한 마음들. 드러내는 즉시 보복으로 돌아올 단어들. 그러므로 이것은 다시금 보낼 수 없는 편지가 되어버린다.”(164쪽)
■ 추천의 말
좋은 소설은 말하는 입보다 듣는 귀에 가까울 것이다. 쉽사리 꺼내놓을 수 없는 마음을 품은 사람 곁에 조용히 머무는 소설이라는 귀. 김혜진 작가는 인물이 머뭇거릴 때 같은 곳을 바라보며 침묵한다. 침묵으로 대신하는 마음까지 최선을 다해 듣는다. 인물이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애써 꺼내어 독자에게 전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물에 대한 진심어린 배려와 존중을 느끼며 나 또한 존중받는 기분이었다. 타인의 섣부른 판단과 위로에 기대지 않고, 나를 위한 말을 내 안에서 건져낼 수 있었다. 그처럼 신중하고도 단단한 힘을 『경청』은 내게 주었다.
-최진영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