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22년 8월 19일
ISBN: 978-89-374-5599-5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80x230 · 220쪽
가격: 20,000원
분야 인문/역사/문화
33년을 기다렸다!
정조의 열망이 만들어 낸 지상 최대의 축제!
정조의 치세, 그 절정의 순간!
한국사 최대의 정치 이벤트가 시작되다!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을묘년(1795년) 화성 행차를 다룬 『의궤, 8일간의 축제』가 출간되었다. 조선 후기 르네상스를 이끈 개혁 군주로 잘 알려진 정조는 극적인 삶으로 유명하다. 소설과 영화, 드라마 등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대부분은 세손 시절의 고난이나 즉위 직후의 암살 위협 등 ‘젊은’ 정조에게 초점을 맞춘다. 정조의 일부분만 보여 줄 뿐, ‘대왕’으로 불리게 한 치세 전체를 조망하지는 못한다.
『의궤, 8일간의 축제』는 정조의 치세 중에서도 절정의 순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이 책에서 정조는 20년 가까이 재위한 원숙하고 노련한 왕이다. 오랜 분투 끝에 얻어 낸 왕권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신하들은 숨죽인 채 왕의 다음 행보를 주시하는 중이었다.
1795년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는 해였다. 왕은 화성에서 잔치를 열기로 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향했다. 행차는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규모가 컸다. 6000명에 달하는 수행원은 1킬로미터가 넘는 행렬을 이루었고, 그 안에 포함된 군사의 수는 도성 병력의 절반에 육박했다. 정조가 기획하고 연출한, 한국사 최대의 정치 이벤트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출발에서 귀환까지 총 8일간은 정조의 명으로 만든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낱낱이 기록되었다. 『의궤, 8일간의 축제』는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바탕으로 정조의 여정을 준비 과정에서 후일담까지 시간순으로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 낸다. 또한 조선의 기록 유산 중에서도 화려한 그림으로 이름난 의궤에 걸맞게 이 책의 본문에도 약 120컷의 컬러 이미지를 실어 보는 즐거움을 더했다.
이 책의 원작인 KBS 대기획 「의궤, 8일간의 축제」는 『원행을묘정리의궤』 속 화성 행차를 압도적 영상미와 충실한 고증으로 재현해 내 화제를 모았다. 휴스턴 국제영화제 대상, 대한민국 콘텐츠 대상 대통령 표창 등 다수의 상을 받은 ‘명품 다큐’를 책으로 재구성한 『의궤, 8일간의 축제』는 방송 내용을 온전하게 옮겼을 뿐만 아니라 콘텐츠를 추가하고 최신 연구 성과까지 반영한 ‘결정판’이다.
머리말
프롤로그
220년 전으로 들어가는 문
지상 최대의 축제
구름처럼 모여든 백성
지상 최대의 축제
과인에게는 깊은 뜻이 있다
더 살펴보기 어머니를 위해 만든 가마, 자궁가교
백성들 속으로
왕의 행렬, 창덕궁을 출발하다
반차도로 만나는 그날의 행렬
더 살펴보기 이중, 삼중의 국왕 경호
원행의 난코스, 한강을 건너는 방법
새로운 길
더 살펴보기 정약용과 서용보의 악연
검게 드리운 먹구름
큰비가 내리다
화성행궁의 밤
더 살펴보기 사중지공 공중지사
61명의 합격자
대성전을 참배하다
문무 별시를 개최하다
더 살펴보기 문무 별시 합격자 명단
더 살펴보기 화성행궁의 모습과 주요 건물 명칭
축제의 두 얼굴
아버지의 무덤 앞에 선 아들
죄인의 아들
서장대 군사훈련
국왕의 친위 부대, 장용영
더 살펴보기 오래전부터 준비된 정조의 원대한 계획
오늘은 기쁜 날
봉수당 회갑 잔치
더 살펴보기 봉수당 진찬연에 등장하는 음식들
통쾌할 수 있지만 여기서 그친다
신풍루에서 쌀을 나눠 주다
노인들을 위해 잔치를 열다
방화수류정
밤하늘의 매화꽃
미래로 나아가는 길
축제는 끝나지 않는다
더 살펴보기 왕의 숨은 귀, 암행어사
기억의 유포
파격적인 선택, 『원행을묘정리의궤』
정교하게 편집된 기억의 유포
에필로그
정조와 함께 사그라진 개혁의 불꽃
이미지 출처
의궤란 무엇인가?
의궤 중의 의궤, 『원행을묘정리의궤』
의궤(儀軌)는 국가의 주요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정리한 도서다. 조선은 왕실의 혼인이나 장례 같은 의식의 준비 및 진행 과정을 기록해 남김으로써 후세에 참고하고 모범으로 삼을 수 있게 했다. 조선 왕조의 의궤는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2011년에는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 의궤가 돌아오면서 다시 한번 대중의 관심을 받았다.
『의궤, 8일간의 축제』에서 다루는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의궤 중의 의궤’로 불리는, 수많은 전문가가 최고로 꼽는 의궤다. 우선 다른 의궤들이 한두 권 분량인 데 비해, 여덟 권이나 된다. 또한 5~10부 정도로 만들어졌던 관행과 달리 102부나 제작되어 널리 유포되었다. 완성도도 매우 높았는데, 기록은 혜경궁이 탄 가마의 제작법에서 기생의 복장과 막일꾼의 품삯까지 적을 정도로 상세했고, 그림은 원근법과 투시도법 같은 서양화 기법을 채택할 정도로 혁신적이었다.
『의궤, 8일간의 축제』만의 콘텐츠
채색 복원된 『원행을묘정리의궤』 「반차도」 최초 수록!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그림들은 당대 최고의 화원들이 그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인 작품은 「반차도」로, 화성으로 가는 수행원 1772명과 말 786필이 그려져 있다. 실제 행렬보다 압축되어 있다고는 하나, 그 엄청난 규모가 감탄을 자아낸다. 다만 당시 인쇄본의 특성상 채색이 되어 있지 않은데, 「의궤, 8일간의 축제」 제작팀은 전문가에게 의뢰해 본래에 가까운 색을 찾아 주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채색된 「반차도」는 그동안 영상으로만 볼 수 있었는데, 이번에 『의궤, 8일간의 축제』가 출간되면서 드디어 지면으로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 책 『의궤, 8일간의 축제』의 본문(40쪽~71쪽)에 총 32장으로 나누어 게재된 「반차도」를 보면 우의정 채제공과 병조판서 심환지 같은 조정 중신들도 눈에 띄지만, 훈련도감과 장용영의 군사들이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림 속 군사들은 활기로 가득 차 실제로 움직일 것만 같다. 김홍도에 버금가는 풍속화가인 김득신 같은 화원들은 그림에 생동감을 불어넣었고, 「의궤, 8일간의 축제」 제작팀의 채색 복원은 현장감을 더했다.
『의궤, 8일간의 축제』 속 결정적 장면들
– 한양이 아닌 화성에서 회갑 잔치를 연 이유
법도대로라면 왕의 거둥길에 왕실 여성은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굳이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성행궁(경기도 수원시)까지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간 까닭은 무엇일까?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가 동갑이므로, 회갑 잔치를 생부가 묻힌 현륭원(경기도 화성시) 가까이에서 열어야 한다고 주장해 뜻을 관철했다.
– 이미지 정치의 달인 정조
정조는 선전과 소통의 중요성을 이해한 왕이었다. 당연히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행사를 백성들에게 보여 주고 싶어 했다. 소식을 들은 구경꾼이 각지에서 도성 안으로 몰려들었고, 정조는 행차 시작 전날에 숭례문의 야간 통행금지를 일시적으로 해제해 호응했다.
백성들이 왕의 얼굴을 쉽게 볼 수 있도록 어가 행렬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길을 골라 나아갔다. 구경꾼이 다가와도 쫓아내지 못하게 했다. 가까이에서 본 왕의 모습은 위엄이 넘쳐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왕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백성도 몰려들었다. 행차 마지막 날, 정조가 직접 처리한 고충만 127건이었다. 민폐를 끼칠 수도 있었던 행차는 정조의 노력과 배려로 축제가 되었다.
– 한강에 다리를 세우다
한양에서 남쪽을 오가려면 한강을 건너야만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한강은 폭이 매우 넓다. 게다가 배를 타기에는 인원이 너무 많았다. 정조가 택한 방법은 용산 나루에서 노량진까지 가로지르는 배다리의 건설이었다.
한강에 배다리를 놓는 것은 정조가 처음이 아니었다. 선대의 연산군은 민간의 배 800척을 동원해 배다리를 만들었는데, 경제적이지도 못했고 원성이 자자했다. 정조는 철저한 준비와 연구로 36척만으로도 배다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배는 강제로 징발하는 대신에 주인들에게 경제적 보상을 약속해 반발이 없게 하고 자발적 참여를 유도했다.
36척의 배를 개의 이빨처럼 지그재그로 맞물리게 연결한 뒤, 그 위에 판자를 덮고 잔디를 깔았다. 양옆에는 난간을 설치하고 무수한 깃발을 꽂아 위엄을 더했다. 길이 약 300미터, 폭 약 10미터의 거대한 배다리를 수천 명이 일사불란하게 통과하는 장관은 장안의 큰 화제가 되었다.
– 잔치를 앞두고 벌인 현륭원 참배와 군사훈련
사도세자는 죄인이었다. 영조가 정조를 효장세자의 아들로 입적시키기는 했지만, ‘죄인의 아들’이라는 의심의 눈초리는 정조를 평생 따라다녔다. 회갑연 전날, 정조는 현륭원을 참배했다. 배봉산(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 묻혀 있던 아버지를 1789년에 이곳으로 옮긴 이래로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찾았다. ‘효’라는 가치를 내세운 왕에게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신하는 없었다.
현륭원에서 돌아온 정조는 갑옷으로 갈아입고 말 위에 올라 서장대로 향했다. 서장대는 새롭게 조성한 난공불락의 요새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화성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군사를 지휘하기에 적합했다. 이제 정조가 직접 탄생시키고 육성한 최정예 친위 부대인 장용영이 등장할 차례였다.
3700명의 장용영 군사가 왕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칼과 창, 화살, 조총, 화포가 빛을 내고 불을 뿜으며 화성의 밤을 밝혔다. 군사훈련은 새벽 5시까지 이어졌다. 지켜보는 신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는 충분한 광경이었다.
– 잔칫상을 두 번이나 받다
윤2월 13일, 마침내 회갑 잔치가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열렸다. 손님의 수나 상차림의 화려함으로 볼 때 최고의 잔치였다. 수개월이 지난 같은 해 6월 18일, 혜경궁은 창경궁 연희당에서 한 번 더 잔칫상을 받았다. 혜경궁이 6월생이고 사도세자가 1월생이라는 점을 짚어 보면, 두 차례의 회갑연이 지닌 의미는 새롭게 다가온다. 어쩌면 화성에서 열린 잔치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 취하지 않은 자는 돌아갈 수 없다
회갑 잔치가 열리던 화성행궁 봉수당으로 돌아가 보자. 술잔이 돌고 흥겨움이 고조되자 정조는 건배사를 외쳤다. ‘불취무귀(不醉無歸)’, 즉 취하지 않은 자는 돌아갈 수 없다는 말이었다. 함께 행복에 취하자는 이 건배사는 전날의 현륭원 참배와 서장대 훈련으로 심기가 불편해진 이들의 마음을 달래는 화해와 용서의 메시지였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상을 높였고 강력해진 왕권을 과시했지만, 동시에 반대파에 손을 내밂으로써 정조는 통합을 꿈꾸었다.
– 정교하게 편집된 기억을 유포하다
“통쾌할 수 있지만, 여기서 그친다.” 우려 속에서 시작된 정조의 축제는 모두의 축제로 끝났다. 복수는 없었다. 한양으로 돌아온 정조는 행복했던 축제의 8일을 담은 의궤와 병풍을 제작해 여러 곳에 배포했다. 새로운 파국과 비극을 불러올 수도 있었던 행차는 이제 경축과 번영의 상징으로 기억될 터였다.
대립의 정치를 넘어 화해의 정치로
정조 시대를 이해하게 해 주는 최고의 지침서
원작의 대표 연출을 맡은 최필곤 PD는 정조가 화해의 정치를 추구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총 110장의 그림이 수록되었지만, 현륭원을 참배하는 장면은 그 어느 그림에서도 찾을 수 없다. 정조는 33년 전에 죽은 아버지를 한시도 잊지 않을 만큼 효심이 지극한 아들이기는 했으나, 반대 세력을 자극하지 않도록 배려할 줄 아는 현실적인 정치가이기도 했다.
정조의 을묘년 화성 행차는 정치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다만 그동안에는 학술적인 접근이 주가 되다 보니 그 중요성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18세기 말 조선의 복잡다단한 정국 속에서 정조가 꿈꾼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통해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엇일까? 220여 년 전으로부터 온,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이해하는 데 이 책은 최고의 지침을 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