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과 현실, 정상과 기형이 빚어낸 폭력의 벽을 무너뜨리는 놀랍도록 매혹적인 치유의 언어
작가 김이은이 『마다가스카르 자살예방센터』 이후, 4년 만에 아홉 편의 단편을 묶어 두 번째 소설집 『코끼리가 떴다』를 내놓았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상황을 장악하는 작가 김이은의 당당하고 힘 있는 목소리”에 주목했으며, 문학평론가 류보선은 “우리 시대의 상징 질서에서 배제된 기괴한 현상, 괴상망측한 인물들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한편으로는 우리 시대의 상징 권력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상징 권력을 넘어설 수 있는 구체적 가능성을 탐색해” 온 작가라고 김이은을 평한 바 있다.
그녀가 이번에는 사진과 글이 어우러진 독특한 소설집을 펴냈다. 이미지는 이제 텍스트의 일부가 되었고, 소설은 상상 그 이상으로 비상하고 발전하였다. 그녀는 『코끼리가 떴다』에서 “오늘날을 거대한 지각변동의 시대로 규정하고 그 안에서의 윤리를 문제적이고 야심만만하게 집중적으로 제시”(문학평론가 류보선)하며 “폐쇄된 골방의 환각보다 더 무섭고 그로테스크한 바깥세상의 현실”, “그 환상적 세계를 나약하고 무기력한 외톨이들의 심리를 묘파함으로써 ‘정상적’인 사회의 비정상성을 드러내는 ‘다른 리얼리티’, ‘다른 언어’의 층위를”(문학평론가 박진) 열어 보인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지적과 같이 “의학이 되기를 꿈”꾸는 김이은의 문학은 달콤하고 몽환적이며, 때로는 놀랍도록 매혹적인 치유의 언어를 발산함으로써, 그 “친밀하고 부드러운 문장들이” “굳어 있는 것들을 녹여 흐르게 하”는 데 성공한다. 독자들은, 이 소설집이 작중인물뿐만 아니라, 어느덧 이 책을 읽는 이들의 마음의 상처까지도 아우르고 보듬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 혼돈의 시대, 내적 치유와 소통의 언어
『마다가스카르 자살예방센터』가 서사를 에워싼 폐쇄적 회로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반복되다가 상상력을 통해 비약했다면, 작가의 두 번째 소설집 『코끼리가 떴다』는 닫힌 공간 속으로 보다 집요하게 뛰어들면서 역설적인 방식으로 또 다른 통로를 찾는 인물들의 위태로운 삶을 보여 준다. 작가가 마련한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들 낙오자들이거나 제대로 된 기회 자체를 배분받지 못한 시스템의 오류들이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의 몸을 유폐함으로써 위험한 바깥세상으로부터 도피처를 얻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건조하고 황폐한 몸, 상처 나고 무기력해진 몸은 이중으로 소외되고 한없이 추락한다. 그들은 신체에 내린 황폐함과 불모성 등의 재앙을 운명처럼 떠안기도 하지만, 가능성과 욕망을 회복하기 위해 자기 치유의 노력을 시도한다. ‘타인’과 ‘나’ 사이에 소통의 기미를 찾고 타인의 몸을 감싸 안음으로써 현실과 상처를 견뎌 나간다. 여기에 이 소설집의 또 다른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작가는 세파(世波)에 밀려다니느라 몸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육체를 처음 가졌을 때처럼 자신의 모든 감각을 활짝 열라고. 공들여 배치된 사진들이 이를 돕고 있다. 또 마음의 흉터를 가리느라 웅크린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으니 당신이 쓰고 있는 가면을 긍정하라고, 그러면 본래의 얼굴을 되찾게 될 것이라고. 작가 김이은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단절과 불통, 공포와 폭력을 넘어선 고독한 전언 ‘앨리펀트 맨’
김이은의 소설 속에서 신화적 모티프와 동서양의 고전, 다양한 국적의 단어들, 그 단어들의 어원에 대한 풍부한 출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를 통해 공들여 의미 있는 전언을 던지는 이 작가의 소설 속에서 언어의 위력을 다시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말과 욕구, 필요 사이의 간극은 김이은의 소설 속에서 해소되지 않는 ‘웅얼거림’이나 ‘웅성거림’을 통해 드러난다. 그것은 특정 누군가의 고통이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좌절과 박탈감에 속한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는데 도무지 말이 되어 나오질 않”는 이상한 언어들, “입속으로 말이 되지 않는 언어를 우물거”리는 존재감 없는 사람들.(「가슴 커지는 여자 이야기」) 이들 앞에 동물원의 수습 조련사 ‘엘리펀트 맨’이 있다면, 그는 이들의 ‘웅얼거림’을 향해 기꺼이 귀를 열고 고개를 기울이고 몸을 앞당기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몸의 기능을 회복하고, 부드럽게 흐르도록 하는 심율(心汩)의 과정은 자기희생을 통한 모성적 치유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 스스로가 통각을 회복하고 고통받을 권리를 되찾는 행위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그것은 “평소엔 전혀 느껴지지 않던” 몸의 “진동”을 느끼는 것이고, “몸이 있는 체”하면서 주는 진통을, “진짜 여자의 몸이 소리를 내고 아프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는 일과 같기 때문이다.(「외계인, 달리다」)
김이은의 엘리펀트 맨은 퇴화하는 인간의 고통받는 몸을 가지되, 동물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복화술사로 환생했다. 사회적 문제를 개인의 불행으로 체화하고 또 다른 통로를 개시하는 것, 그것은 ‘다른 리얼리티’의 불온함이 ‘다른 인식’의 가능성으로 연결되기 위한 김이은식 모색이며, 문제적 언어로 명명될 그녀만의 독특한 문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