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문학사의 ‘거대한 뿌리’ 김수영 시인의 육필 원고를 영인한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민음사에서는 그간 두 차례에 걸쳐(1981, 2003) 『김수영 전집』(시 177편 수록)을 발행한 바 있으나, 이번 책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은 기존의 원고뿐 아니라 초고에서 시상 메모까지 현존하는 354편의 육필 시 원고를 모두 담은 새로운 정본이다. 오랜 시간 동안 시인의 육체적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원고지를 통해 시의 수정과 가필, 행갈이의 조정 과정 등 착상에서부터 최종 발표본에 이르는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김수영 시인은 최근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시인 중 하나이지만 그에 관한 자료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 책은 김수영 시인 연구의 초석이 될 방대한 자료를 제시함으로써 좀 더 폭넓은 연구의 가능성을 열었다.
기존 김수영 시 연구의 한계를 뛰어넘을 기념비적 출판현존하는 전체 179편의 시 수고 포함, 총 354편의 육필 시 원고 수록
김수영 시인은 급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전, 단 한 권의 시집만을 출간했다. 생전에 남긴 유일한 시집 『달나라의 장난』과 여기저기 산재된 발표 지면 외에는 자료가 없어, 여러 연구자들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연구에 한계가 있었으며 자의적 해석과 비평도 적지 않았다.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은 시인의 작품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 모두 담고 있어 그간의 연구를 확연히 뛰어넘을 수 있는 획기적 자료가 될 것이다. 특히 인쇄된 작품에선 볼 수 없었던 육필의 흔적을 통해,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김수영 시인이 시의 형식미에도 예민하게 신경 썼음을 알 수 있다. 일본어, 영어, 한국어를 모두 거쳐 간 시인이 한국어를 시적 형식으로 정착시키려고 한 고투가 역력하다. 이는 문학 작품이 입말로 전달되던 구어적 소통을 넘어 인쇄된 문자의 시각적 형태로 탄생한 것이 20세기 문학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라는 점과 맞물리며, 이 책이 김수영 시인 개인만의 세계가 아닌 한국 현대 문학을 꿰뚫는 큰 맥을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은 시인 작고 후 40여 년의 시간 동안 원고 보관에 심혈을 기울인 유족들의 노고에 엮은이의 7년간의 자료 조사와 연구가 덧붙여진 결정체다. 무엇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적고 정리한 김수영 시인의 습관은 유족들에게도 이어져 귀중한 자료로 남았다. 부인 김현경 여사는 시인과 관련된 것이라면 작은 종이쪽 하나도 고이 간직하고 있으며, 누이 김수명 선생은 자택에 화재가 났을 때 시인의 원고들을 제일 먼저 챙겨 나왔을 정도였다. 일제 말기부터 한국 전쟁까지, 격변을 겪은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방대한 분량의 원고들이 남아 있는 시인은 거의 없다. 혼란기에 다수의 자료들이 사라진 상황에서 이 원고들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 문학사 연구의 보고인 것이다. 이 책 출간을 계기로 김수영 시 세계가 한층 더 밝게 열릴 수 있을 것이며, 우리나라 문학 연구 패러다임에 큰 변화를 가져 올 것이다.
김수영 초기 시의 난해성은 시인 의식 내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가 남긴 그 시기의 원고를 보면 표현 형식을 확정하기 힘든 외부적 언어 상황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의 물리적 표현으로서의 문자 표기의 혼란은 시적 형식의 수립 과정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병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초고와 원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 현대 문학의 형성 과정에서 겪어 온 물리적 형태의 생성과 변화, 즉 육필 초고에서 인쇄된 시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이 책에 수록된 원고에 기록되어 있다. 한글 표기법의 변화, 원고지 사용법의 혼란, 한자 사용 방식, 그리고 세로쓰기에서 가로쓰기로 바뀌기 전의 시적 형식의 시각화 모색 과정 등 예술 형식으로서의 시를 문화적 제도로 정착시키는 과정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이 책에 담겨 있다.
― 해제 중에서
구성 및 내용
이 책은 크게 5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김수영 전집』에 사용되었던 원고를 모은 것이며, 2부는 수첩이나 공책에 남아 있던 시상 메모와 초고를 모은 것이다. 3부는 부인 김현경 여사가 소장하고 있던 여벌의 육필 원고와 부인 정서본 원고이며, 4부는 발표된 지면을 스크랩해 시인이 수정하거나 가필한 것을 모은 것이다. 5부에는 『달나라의 장난』 출간 이전에 시인이 시집 발간용으로 정리해 놓은 원고를 실었다.
1부의 내용 중 가장 눈에 띄는 발견은 김수영 시인의 최초 발표 작품 「묘정의 노래」 게재지를 확인한 것이다. 국내 어느 도서관에도 남아 있지 않아 그동안 찾을 수 없었던 《예술부락》을 확인함으로써 발표 연도나 시어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2부는 정서되기 이전의 메모와 초고들을 모은 것이다. 「김일성 만세」 등 김수영 시인 40주기를 기념하여 언론에 소개됐던 내용도 모두 포함되었지만 이 책에서는 모두가 작품이라고 판단하여 게재한 것은 아니다. 최대한의 자료를 제공하여 김수영 시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시적 단상이 남아 있는 메모와 초고를 그대로 실었다. 3부는 여벌의 원고들을 통해 여러 판본을 비교해 볼 수 있도록 했으며, 4부는 이미 발표된 후에도 시인이 수정하고 가필한 흔적을 보여 줌으로써 텍스트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했다. 5부는 시인 생전에 시집 출간을 위해 직접 정리한 원고들이다. 생전의 유일한 시집 『달나라의 장난』은 1959년에 발간되었는데 이미 1958년에 ‘달나라의 작란’이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계획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목차에서부터 판권까지 꼼꼼하게 챙긴 흔적을 통해 작품에 대한 시인의 치밀한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새로이 밝혀진 사실들
김수영의 첫 발표 시 「묘정의 노래」가 게재되었던 《예술부락》의 지면이 처음 확인되었다. 《예술부락》은 1946년 1월 1일에 처음 발간되어 같은 해에 3집까지 발간된 팸플릿 규모의 잡지다. 이 잡지를 확인함으로써 지금까지 김수영이 처음으로 시를 발표한 연도로 알려져 있던 1945년이 1946년으로 정정되었다. 그와 함께 ‘고요히’로 알려져 있던 시어가 발표 지면에는 ‘고오히’로 되어 있는 것이 밝혀지는 등, 앞으로 김수영 시 텍스트 확정에 있어 많은 논란이 예상되는 요소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육필 원고를 통해 「65년의 새해」에서 ‘새해’가 아닌 ‘새 해’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새해’를 ‘새 해’로 띄어 쓰면 새로운 태양이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발견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원고에 지워진 부분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시인의 일기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확인할 수 없어 분실된 것으로 알려진 ‘숫자’라는 시는 사실 이후에 「황혼」으로 제목이 바뀌어 발표됐음을 밝혔다.
그 외에도 김수영 시인의 시 중에서는 보기 드문 사랑 시 「겨울의 사랑」 초고가 이 책에서 처음 공개되었으며, 검열로 발표하지 못한 「김일성 만세」 원고도 게재되었다. 시인이 한때 사랑했던 N 씨에게 바친 것으로 보이는 「겨울의 사랑」은 시의 마지막에 완성작임을 뜻하는 돼지 꼬리 표시가 남아 있지만 시인이 발표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날카로운 시어들로 당대의 정치 현실과 대항했던 시인의 감성이 잘 드러나 있는 초고로, 시인의 또 다른 일면을 볼 수 있다.
1부 시 전집 수록 원고
2부 미발표 시 원고 및 초고
3부 여벌 육필 원고 및 부인 정서본
4부 신문ㆍ잡지 발표 지면 수정ㆍ가필본
5부 시집 『달나라의 작란』 가편집 원고
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