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프루프북] 우리가 푸른 물에 가까이 가면
■워터프루프북은?
워터프루프북은 채석장이나 광산에서 버려지는 돌을 재활용한 친환경 방수 종이 ‘미네랄 페이퍼’로 제작되었습니다. 물에 완전 젖더라도 변형 없이 다시 말려서 보관할 수 있습니다. 해변가, 수영장, 계족, 욕조 등 습기에 구애 없이 워터프루프북을 마음껏 즐겨 보세요!
민음사 ‘워터프루프북’ 다섯 번째 시리즈가 출간되었습니다. 2018년 『해가 지는 곳으로』, 『보건교사 안은영』 등 미더운 국내 작가들의 장편소설로 첫 선을 보인 워터프루프북이 2022년, 개성 있는 국내 작가의 단편소설을 큐레이션한 단편소설 앤솔러지로 돌아왔습니다. ‘젖지 않는 책’ 워터프루프북은 “사용자를 위한 디자인으로 활용도를 높였다”는 평과 함께 세계 3대 디자인 어워드로 꼽히는 IF 디자인 어워드 ‘2020 커뮤니케이션 부분’ 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요. 2022년 여름 선보이는 워터프루프북 다섯 번째 시리즈는 민음사에서 펴냈던 국내 작가들의 소설집 중, 가장 익숙한 키워드를 가장 낯설게 보게 하는 작품을 엄선하여 2종으로 구성하였습니다. 바로 ‘가족’, 그리고 ‘푸른 물’이라는 두 단어를 풍부하게 곱씹게 해 주는 소설들입니다.
두 개의 키워드로 나뉜 2종의 워터프루프북에는 각 세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가족’의 서로 다른 얼굴을 그려낸 『가족이란 이름을 한 꺼풀 벗겨 내면』에 수록된 소설은 최진영 작가의 「가족」, 조남주 작가의 「여자아이는 자라서」, 박서련 작가의 「미키마우스 클럽」입니다. ‘푸른 물’에 대한 딴청, 논쟁, 그리고 기억을 담은 『우리가 푸른 물에 가까이 가면』에 수록된 소설은 김기창의 「천국의 초저녁」, 민병훈의 「여섯 명의 블루」, 정영문의 「물오리 사냥」입니다. 여섯 편의 소설들은 모두 우리가 보편적으로 떠올리는 단어에 대해 갖는 생각을 조금 바꾸어 놓습니다. 우리가 휴가 때면 일상과는 조금 다른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분위기로 삶을 조금 바꾸는 것처럼요.
각각의 소설들은 ‘가족’이라는 단어를 표면으로부터 예리하게 한 꺼풀 벗겨 내거나, ‘푸른 물’이라는 단어를 멀찍이 서서 보기보다는 단어의 근처까지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그리고 여섯 편의 소설은 공통적으로, 단어의 표면 아래에 불안하고 복잡한 그림자가 깃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가족은 힘이 되고 소중하다거나, 여름의 물가는 시원하고 청량하다거나 하는 것이 우리가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는 단어들의 이미지라면, 여섯 편의 소설을 읽고 난 뒤 우리는 가족의 무례와 오해와 폭력에 대해, 물가의 불쾌와 슬픔과 생사(生死)에 대해 생각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과 오래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드는 익숙한 불편함, 물가를 오래 들여다볼수록 느끼는 이유 모를 불안감. 각각의 소설들은 그런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가 어렴풋이 떠올리는 여름의 이미지와 피부로 와닿는 진짜 여름의 온도와 습도가 다른 것처럼, 쨍쨍하기보다 습하고 흰 뭉게구름보다 어두운 비구름이 자주 보이는 것처럼, 워터프루프북에 수록된 여섯 편의 소설을 읽은 느낌도 상상 속의 단어가 실제로 주는 다양한 의미를 감각하는 일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단어들이 단순할 때보다 복잡할 때, 생각보다 단어가 가진 색감이 환하지 않고 탁할 때, 우리의 마음이 무거워지고 곤란해지겠지만 그 느낌을 부러 멀리하지는 말아 주세요. 한여름에 쏟아지는 폭우처럼, 익숙한 단어의 낯선 이면을 보는 일은 생각보다 우리의 속을 시원하게 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가벼운 책장을 넘기는 사이 우리는 아마도 여름을 새롭게 감각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소년은 몸이 아픈 홀어머니 밑에서 산호초에 살고 있는 물고기들을 잡아 생계를 꾸려 가고 있다. 그런데 수온 상승으로 극심해진 백화 현상 때문에 산호가 죽어 나갔다. 산호가 터전이던 물고기들 역시 피해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살 곳을 잃어 가는 물고기 중에는 소년이 사랑에 빠진 물고기도 있었다. 눈이 크고 화려하고 유려한 자태를 지닌 그 물고기는 소년의 첫사랑을 닮았다. 소년의 첫사랑인 소녀는 바닷물이 점점 차오르는 것을 염려한 부모님을 따라 2개월 전 다른 섬으로 이26 주했다. 소년은 소녀가 그리워 밤이면 바다를 바라보며 눈물을 훔쳤다. 소년은 생계를 위해서 산호 아래 몸을 숨기고 있는 그 물고기를 잡아야 했지만, 그 물고기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러나 산호가 완전히 사라지면 그 물고기 역시 살아남기 어려웠다. 소년은 방법을 찾아야 했다. 소년은 산호와 물고기를 구해 달라고 호소하는 동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다.
-「천국의 초저녁」, 김기창
나아지는 건 없다. 이렇게 기억을 끄집어내도. 유리가 없는 창문으로 들어오던 빛과, 길게 늘어진 너의 그림자, 교복 속으로 흐르던 땀, 멀리서 울린 종소리, 이런 것들만 떠올라. 그리고 그 건물의 철거를 시작할 때쯤, 너는 더 이상 이곳에 없었지.
배를 한 척 사 볼까. 직접 고기를 잡는 일은 어때. 먼 바다까지 나가면 많이 잡힌다던데. 아니면 최대한 먼 곳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괜찮겠지. 네가 말하던 반대편.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먼 곳으로. 그럴 수 없겠지만. 결국 사람들 손에 끌려 나가 다시 견디는 일을 시작하겠지만.
이곳 바다와는 다른, 파란 바다를,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럼 너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까.
-「여섯 명의 블루」, 민병훈
우리는 잠시 말없이 강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실종자는 그냥 실종된 채로 놓아두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어, P가 말했다. 그는 그를 찾는 사람들에게는 명목상의 존재일 뿐이지만 그가 존재하는 곳에서는 실재하겠지. 어쩌면 실종이란 그를 찾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야.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내가 말했다. 모르겠어, P가 말했다.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는 거야. 우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용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자 나의 생각들 또한 그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나 자신 또한 그 생각들과 함께 떠내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오리 사냥」, 정영문
천국의 초저녁 * 김기창 11
여섯 명의 블루 * 민병훈 29
물오리 사냥 * 정영문 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