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집

한정희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00년 5월 2일 | ISBN 89-374-0343-9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42x225 · 300쪽 | 가격 7,500원

책소개

여성 특유의 내면 묘사가 탁월한 한정희 씨가 7년 만에 내놓은 창작집
작가는 사랑의 고통에 침식된 내면의 지층을 섬세하게 탐사한다.그것은 사랑의 상처를 극복하는 일이라기보다는사랑의 상처 때문에 상실한 자기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이다.

편집자 리뷰

*문학평론가 이남호의 서평에서
 
『유리집』에 실린 한정희의 소설들은 한결같이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사랑은 화사한 봄날의 꽃밭 같은 것도 아니고
소란스러운 이기적 욕망의 경기장 같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랑은 항상 혼자서 감내해야 하는
내면의 고통스런 물결이며 혼란이며 결핍이다.
작가는 사랑의 고통에 침식된 내면의 지층을 섬세하게 탐사한다.
그것은 사랑의 상처를 극복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사랑의 상처 때문에 상실한 자기 정체성을 되찾는 과정이다.
이것은 특히 「사마라의 약속」 같은 작품에서 잘 나타난다.
시인 박목월은 커피 속에 녹아드는 설탕을 두고 “암갈색 심연(深淵)” 속으로의
“정결한 투신(投身)”과 ‘고독한 용해(溶解)”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한정희 소설의 주인공들도 이와 같다.
그들은 사랑의 상처로 인한 존재의 암갈색 심연 속으로 정결하게 투신하고
그 속에서 고독하게 용해한다.
그리하여 존재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낸다.
이러한 사랑과 존재의 변증법 속에서
우리는 점점 희귀한 것이 되어가는 내면적 정직함과 성숙을 만날 수 있다.
아울러 잘 손질된 잔디밭같이 단정하고 편안한 문장과 그 속에 핀 몇 송이 꽃 같은
아름다운 비유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유리집』을 읽는 기쁨이다.
 
 
 
 
여성 특유의 내면 묘사가 탁월한 한정희 씨가 7년 만에 내놓은 창작집
여성 문학이 여성 현실의 복합성을 그려내면서도 그런 현실을 넘어설 수 있는 틀을 가져야 된다는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의 입론을 세우는 일은 매우 지난한 작업을 필요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정희의 작품은 오늘의 여성이 갖는 현실 인식의 정도를 잘 짚어내고 있다. – 최상윤(동아대 교수)
 
 
1 홀로 존재하는 방법에 미숙한 존재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불타는 폐선」을 두고 “축축한 감상주의와 너무나 원거리에 있는 문체”로 인해 “강점으로 드러나든 혹은 취약점으로 드러나든 통념상의 여류 개념을 넘어서고 있다.”고 평한 바 있다. 이처럼 이색적인 여류작가로 평을 받던 한정희 씨가 이번에는 30대 여성이 삶에서 겪는 딜레마를 조금의 가감도 없이, 매우 사실적으로, 아주 고통스러울 정도로 있는 그대로 그리고 있다. 하지만 내면 묘사가 탁월하다는 평을 듣는 작가의 명성에 걸맞게,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순간들, 표현해 내기 힘든 순간들을 포착해서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능력이 뛰어나다.
 
나는 남편의 혼외정사를 주제로 한 드라마에 나 자신이 이미 조연으로 출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것은 너무 새롭고 새로워서 결코 떠맡고 싶지 않은 배역이었다. 그 늪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커다란 두 날개를 아무리 퍼덕여 봐도, 배신이라는 차가운 물에 흠뻑 젖은 날개는 휘젓는 고통만 더할 뿐, 그 늪 속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불륜을 저지른 것은 남편인데,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었다. 나는 이 세계와 아무 연관도 안 돼 있는 듯하다. 남편을 포함하여 모든 것들이 방수옷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내게서 흘러내려 버린다. (「사마라의 약속」)  
 
작가는 이번 작품집을 ‘사랑’이라는 주제로 묶어내고 싶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홀로 존재하는 방법에 미숙한” 인간들의 사랑을 담고 있다. 특히 전업주부들은 ‘가족의 연대에 길들여져 있어서 자칫 서로를 향한 구속력을 사랑이라고 쉽게 착각한다.” 「이웃집으로 들어가다」에서 남편의 외도를 발견한 주인공은 잠시 이것이 그의 인생에 찾아든 축복이니, 선물이니 하는 고상한 생각에 빠져보기도 하지만, 결코 소설이나 영화처럼 되지는 않는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아를 성찰하느니 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것이다. 「유리집」은 부부 사이의 대화가 뜸한 30대 중반의 여인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남편으로 인하여 겪는 고통의 심리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입센의 『인형의 집』에 나오는 \’로라\’와 이 작품의 \’나\’에 대해 비교해 보면, 로라는 자신의 이상적 자아를 찾기 위해 집을 뛰쳐나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적극성을 띠는 반면 「유리집」의 주인공 \’나\’는 변화된 환경 속에서 자신을 끼워 맞추어 가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현실에 대한 극복 자세를 시도하고 있다. 작가는 이처럼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 \’여자의 밝은 감정이 박탈당하는 순간\’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는데 이는 단지 여기에 자주 등장하는 30대 후반, 중년에 들어가기 시작한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 듯하다. 작가가 주는 메시지는, 인간은 결국 모두가 홀로 존재하는 데 미숙한 존재들이며 여기에 우리 모두가 해당되는 것이다.
 
 
2 배신을 고스란히 맞이하는 것   
「사마라의 약속」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는 한 여인이 다시 삶에 대한 진지함을 찾는 투쟁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나\’는 정신적 여행을 마치고 이제는 배신을 고스란히 맞이하는 것이 내 몫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3년 전의 아픈 상처에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한 \’나\’는 폐암에 걸린 몸으로 남편과 일본 여행을 온다. 사람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부터 가장 심한 상처를 입히기 시작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이 세상이 지옥이다. \’나\’는 지금 남편이 의도적으로 나에게 배신감을 주려고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나를 배신한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토록 괴로워하였고, 뒷걸음쳐 \’죽음\’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미 나 자신의 삶을 마치 마취 당한 채 벽에 꽂혀서 박제가 되어가는 것을 자신과는 무관한 하나의 삶처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한정희 씨의 작품 전체에 흐르고 있는 또 하나의 주제는 삶을 감내해 내는 것이다. 작품 속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부르르 떨거나 소리치거나 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에서 도망가려고 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개척하지도 않는다. 소리 없이 인내하거나 받아들이거나 기다린다. 하지만 이들이 결코 힘없는 존재로 비치지는 않는다. 작가의 눈에 비친 세계는 누구나 자신이 감당해 내야 하는 몫이 있다는 것이다. 
「유리집」은 또한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한다. 집은 사회 생활에 지친 심신을 북돋워내는 장소로서의 기능을 한다. 그러나 \’유리집’이란 밖과의 차단을 요구하지만, 유리의 속성이 무방어적으로 자신을 노출하고 있기에 안을 보호하지도 못하고 바깥 세계와 교호하지도 못하는 불구의 집인 것이다. 이처럼 유리집이 집의 역할을 해줄 수 없기 때문에 작품 속에서 유리집이 완성된 후에 남편은 사라지고, 남자가 유리집을 가져가지만 풍뎅이는 곧 사라지고 만다. ‘유리집’과 변신한 풍뎅이라는 환상적인 사물을 통해 일상적 현실을 다양한 관계로 접촉시킨 기능으로 재미를 더해주는 이 작품은 결국 우리 인간이 나약한 존재로 완전히 보호받을 수도 없는 공간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임을 말해 준다.     
 
 
3 정해진 길을 통과하고 있을 뿐
 
작가는 미궁에 빠진 현실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정희 씨는 나이가 들수록 삶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고 한다. 「해바라기를 보았다」에서 작가는 고독이라는 형벌을 가하게 하는 사람은 자신의 적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주인공 ‘나’는 자신을 홀로 서 있게 만든 승희라는 여자를 잊지 못하고 살아가는 남자다. 잠깐의 실명 기간이 그에게는 삶에 대한 진리를 깨닫는 시간이었다. 인간의 고통스러운 운명을 견디어내는 힘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한 발작 물러나서 그것을 과소평가해 버리면 세상이 작아 보인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선택이나 의지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길을 통과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가해진 고독으로 절망하던 주인공이 어느 날 문득 자신의 삶이 바로 승희의 그림자를 견뎌내야 하는 삶임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침묵의 게임」은 기다림에 관한 얘기다. ‘나’에게는 삶에 지쳐 방황할 때 찾아가 안식을 취하곤 했던 남자가 있었다. 애인과의 심리전에 지쳤을 때나 작품 활동에서 오는 중압감을 회피하고 싶을 때.
벨이 울렸다. 갑자기 온몸의 세포들이 물기를 한곳으로 모으며 바짝 수축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벽에 부딪쳤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는 전화벨 소리를 숨을 죽이며 무심코 세고 있다. 하나… 둘 그리고 세 번째 울림 끝에서 나는 수화기 위에 손을 올린다.(「침묵의 게임」)
‘나’는 국선에서 「아이」라는 작품으로 이미 학생 때 상을 탄 경력이 있는 촉망받는 조각가였다. 깍지를 끼고 무릎 위에 턱을 괴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단발머리 게집아이였다. 그러나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그가 마련한 공간 속으로 깊이 침잠해 있던 나는 어느 날 ‘그 사람’을 만난다. 그리고 중년 세대들이 흔해빠지게 저지르는 부정의 한가운데 놓이게 된다. ‘그 사람’이 주는 메시지는 삶에 의문을 던지도록 여유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이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 사람’은 여전히 편안하다. 그리고 ‘나’는 내 젊은 날의 혼돈을 지켜봐 준 ‘그 사람’이 내 마음에 그토록 완벽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이야기에서는 무엇인가에 대해 집념을 품었던 나와, 그러나 지금은 안락한 공간 속에 침잠해 있던 나 사이의 갈등이 하나의 커다란 줄기를 이루고 있어서 다시 만난다. 흘러간 세월에 그냥 몸을 맡겨 버린 자신의 삶에 아련히 서글퍼지면서 내가 그토록 갈망하다. 그러던 중, 자신의 열정을 접은 것에 대해 잠재된 불만을 일깨워 주는 사람을 중년이 되어서 다시 만난다. 흘러간 세월에 몸을 맡겨 버린 자신의 삶에 아련히 서글퍼지면서 ‘내가 그토록 갈망하고 얻고 얻으려 했던 것’을 이제는 찾게 된다.

목차

1. 사마라의 약속2. 작은방3. 풍경4. 해바라기를 보았다5. 침묵의 게임6. 유리집7. 이웃집으로 들어가다

작가 소개

한정희

1950년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소설 부문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불타는 폐선』과 『유리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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