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천수호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09년 3월 30일
ISBN: 978-89-374-0770-3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4x210 · 120쪽
가격: 8,000원
시리즈: 민음의 시 153
분야 민음의 시 153
지금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바치는 천수호의 첫 시집.
아찔하도록 붉은, 그녀의 시어에 취한다.
현기증 나도록 생생한 삶의 순간들, 천수호의 시는 그러한 순간을 직격한다. 등단작인 「옥편에서 ‘미꾸라지 추(鰍)’자 찾기」에서부터 시종일관 깔끔하고 순도 높은 이미저리(imagery)로 시단을 사로잡았던 그녀가 내놓은 첫 시집은 눈에 담는 순간 정련된 생의 진정성이 떠오른다. 서정시의 본령이 감각과 표현의 명징함에 있다면 천수호의 재능은 그 본령을 확실히 딛고 서 있다. 그녀의 진정성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닿는 감각의 예민함과 그 감각의 풍경을 또렷이 그려 내는 표현의 명료함. 확실히 이런 ‘언어’를 만나는 것은 드문 일이다. 하물며 그것이 이번처럼 시인의 첫 시집일 경우는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설명 불가능한 시적 감흥의 순간마저 명확하게 포착해 내는 시인의 뛰어난 시력은 숙련된 시의 문법과 결합하여 잘 벼린 시어를 낳았다. 이러한 시어를 통해 비로소 농밀한 붉은 꽃으로 피어난 생명력, 그 날카로운 발화(發花)의 순간이 바로 이 시집이다.
■ 세계를 맺는 무수한 겹눈의 단상
천수호가 바라보는 세계는 잠자리의 겹눈에(「빨간 잠」) 맺힌 수많은 각도의 시선 속에 한순간 들어와 각인되는 ‘나’와 ‘당신’의 단상이다. 이런 단상들로 세계를 소묘하는 시는 흔하다. 하지만 그녀의 시는 이런 단상들 하나하나가 모두 놀라울 정도로 투명한 명징함을 띠고 있다는 데에서 일반적인 소묘와 다르다. 천수호의 영오한 겹눈에 맺힌 단상들은 저마다 날카로운 정밀 묘사의 필치로 새겨져 있다. 시인이 맺은 상(像)에는 일말의 모호함도 없다.
그런 명민함에 대하여 문학평론가 남진우는 “군더더기 없는 단정한 언어로 대상의 핵심을 낚아”챈다고 감탄했으며 시인 최승호 역시 “말을 최소화하면서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능력”이 “예리한 칼을 든 조각가”를 연상시킨다고 평했다.
수평선을 가운데 두고 사진을 찍는다
검은 바다 한 장이 호치키스처럼
가마우지를 찰깍, 깨문다
부리까지도 깜깜한 지독한 그늘이다
-「가마우지 바다」에서
바다 위를 휙 날아 지나가는 새 한 마리가 던지는 지독한 그늘, 그 순간을 포착한 한 장의 사진과도 같은 극세한 감각의 선명함이 이 시집의 모든 페이지에 “칸칸마다 플래시”로 (「필름 속 우화」) 터져 나온다. 그 생생한 포착과 조우하는 순간, 우리는 오직 시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잊었던 생의 편린을 되찾게 되는 것이다.
■ 명암의 미학, 시인으로 살아가기
시인으로서 천수호의 자의식은 명암의 미학에 있다. 그늘에서 빛을 바라는 그녀의 현실 인식은 그녀가 발하는 모든 언어에 속속들이 배어 있어, 시의 기원이 된다.
“세상 온갖 것들 다 품어” 보려는 이구아나의 배 속에 드리운(「그늘」) 것과 같은, “내밀한 근친의 비밀”을(「나는 기형이에요」) 묻은 씨방에 드리운 것과 같은, 명백한 어둠 가운데 모색하는 그녀는 가장 어두운 순간에조차 참 또박하여 절대 흐린 날도 어둔 날도 없는 언덕의, “오도카니 그 모습 다 드러내”는(「외딴집」) 불빛의 순간을 낙관한다.
빙글빙글 도는 밤의 블랙홀에
다시 빠지지 말아야 한다
(……)
지푸라기만 한 햇살이
한순간, 빛살을 터뜨린다
저 놀라운 빛의 번식력
-「한순간」에서
도시의 어둠 속,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품어, 한순간 터지는 빛살 가운데 오도카니 드러내는 그 현기증 나는 치유의 순간. 천수호는 그 순간을 담아낼 수 있는 언어를 가진, 아주 특별한 시인이다.
■ 작품 해설 중에서
천수호에게 감각과 상상력은 서로에게 물과 바람의 역할을 하며 무성해지는 하나의 숲과 같다. 그녀의 관심은 자연과 자연적인 것이 황량한 무채색의 도시에 어떻게 여전히 생명력을 공급하는가에 있다.
천수호는 도시를 포용하고 정화하는 자연의 역할에 깊은 신뢰를 보내면서도 자연의 권능에 대한 경외나 예찬에 쉽게 함몰되지 않는다. 동일한 맥락에서 그녀는 도시와 도시적 삶의 부정성에 경도되지도 않는다. 그녀의 관심은 자연과 자연적인 것이 황량한 무채색의 도시에 어떻게 여전히 생명력을 공급하는가에 있다. 역으로는, 도시가 결코 완전히 축출할 수 없을 자연에 어떻게 계속 의존하고 있는가에 있다. 이 점에서 천수호가 생각하는 시란 도시의 어둠을 순간순간 흩트리는 “지푸라기만 한 햇살”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에 전면적인 변화를 일으키지는 못한다고 해도, 그 가녀린 빛살의 번식력은 감탄할 만한 것이다. 천수호의 시가 기필코 모방하려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연이 지닌 “저 놀라운 빛의 번식력”일 터이다.
외딴보다 더 외딴 세계를 노래하며 “외딴보다 한 굽이 더 돌아가는 나”는, 천수호의 단정한 첫 시집이 타자와 세계를 향한 부지런한 걸음들로 가득해지기까지 그 최초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천수호를 통해 외딴보다 더 외딴 것들이 비로소 형체와 이름을 얻게 되기를, 천수호가 “오도카니 그 모습 다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랄 일이다. 그 적막하고도 따뜻한 축복의 몫을 천수호가 기꺼이 자임하고 있으니, 그녀에 대한 믿음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 김수이(문학평론가 |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
■ 추천의 말
시인 천수호가 심려하는 대상들, 바꾸어 말해 자꾸 그녀를 열고 나오려 하는 대상들은 오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붉은 현기증에 시달리며, 아무리 내던져도 버려지지 않는 아우성에 몸서리치는 존재들이다. 당김과 풀림의 중심에서 위태롭게 서 있는 그들을 내밀한 근친으로 맞아들인 그녀는 조곤조곤 물어본다. 그들은 누구이며, 집은 어디고, 어디가 아픈지……. 그녀가 유독 돌이라는 이름과 여자라는 이름, 연인이라는 이름에 집착하며, 그 이름들 속으로 걸어 들어간 숱한 근친들을 호명하는 것은 그들의 서러운 비밀들을 알아내기 위해서다. 그리하여 마침내 ‘에주룩’이라는 낯선 이름에서조차 그녀는 다시는 볼 수 없는 사하라의 검은 남자를 만난다. 그토록 어둡고 척박한 땅에서 신음하는 근친들을 가랑이가 다 젖도록 바라보는 그녀의 애너그램은 ‘수호천사’이다.
— 이성복(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