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Kaddis a meg nem született gyermekért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22년 1월 31일
ISBN: 978-89-374-6391-4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32x225 · 204쪽
가격: 13,000원
시리즈: 세계문학전집 391
분야 세계문학전집 391
수상/추천: 노벨문학상
“삶을 훼손하는 자들 때문에 삶을 혐오하게 되는 것보다 끔찍한 일은 없다.”
인류의 비극과 개인의 운명에 대한 성찰이 담긴 ‘운명 4부작’의 세 번째 작품
인간의 존엄이 말살된 곳에서 지독히 읊조리는 생명의 숭고한 카디시
야만적이고 제멋대로인 역사에 맞섰던 한 개인의 취약한 경험을 지켜 내려 한 작가.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 9
작품 해설 173
작가 연보 190
현대 헝가리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00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임레 케르테스의 주요 작품 가운데 하나인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1990)가 출간되었다.(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1번) 이 책은 이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0번, 360번으로 각각 출간된 『운명』(1975)과 『좌절』(1988)에 이은 이른바 ‘운명 4부작’의 세 번째 작품으로 일컬어진다.(‘운명 4부작’은 2003년 『청산』을 마지막으로 완결되었다.) 십삼 년에 걸쳐 쓴 첫 소설 『운명』에 나치 절멸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에 대한 끔찍한 기억에 시달리며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십 대 소년의 모습으로 등장했던 케르테스는 이 책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에서 노년에 접어든 작가이자 문학 번역가로 다시 등장한다. 『운명』이 아우슈비츠 절멸 수용소에 대한 기억을 담은 책이라면,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이후의 삶에 관한 이야기, 『운명』에 대한 응답과 같은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까닭
이 소설의 의미심장한 제목은 역설적이다.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위해 ‘애도’의 기도를 한다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원제의 ‘카디시(Kaddis)’는 히브리어-아람어다. 신성(神聖)을 의미하는 고대 유대인의 기도인 카디시는 하느님의 위대함과 전능함, 자비를 시적인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상을 당한 자들이 유대교 회당에서 이 카디시를 암송하곤 했다. 케르테스는 왜 자신의 소설에 이러한 의미가 담긴 말을 제목으로 붙였을까? 그것은 신의 명령이자 인간의 특권인 생육에 대한 단호한 거부의 의사 표시다. 홀로코스트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케르테스는 자신과 같이 유대인으로 태어날 미지의 아이가 아우슈비츠라는 지옥이 실재했던 이 세계에서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생육을 거부한다.
소설을 여는 짤막한 첫 문장 “아니요!”(혹시 아이가 있느냐는 한 철학자의 질문에 소스라친 케르테스의 답이다.)와 아이를 갖고 싶다는 아내에게 외치듯 토해 내는 “안 돼!”라는 말은 테르테스의 선언과 다름없다. 이 강렬한 부정어 속에는 작가 자신의 지독한 신념과 두려움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아니요!”와 “안 돼!”라는 날카로운 외침은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헤어날 수 없는 강박처럼 지속적으로 울려 댄다. 이 일의 충격으로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던 아내가 떠나 버리지만 그의 결심은 그 후로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안 돼!”—그 즉시 어떤 망설임도 없이, 내 안에서 무엇인가 흐느끼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의 흐느낌은 천천히 가라앉았다, 하지만 결국 강박증적인 고통으로 변하여, 천천히, 불길하게, 서서히 퍼지는 질병처럼, 하나의 물음이 되어 내 안에서 더욱 뚜렷한 형태를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혹시 네가 검은 눈동자를 가진 딸아이로 태어나지는 않을까? 너의 작은 코 주위에는 주근깨가 엷게 흩어져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네가 고집 센 아들인 것일까? 너의 눈은 회청색 조약돌처럼 근사하고 힘찰까?—물론, 나의 삶을 너의 존재의 가능성으로 생각할 경우에 해당하는 말이겠지만 말이다. 그날 나는 밤이 새도록 오로지 이 질문만을 깊이 생각했다. (25~26쪽)
■ 기나긴 애도처럼 이어지는 혼잣말 혹은 읊조림
이 소설은 별도의 장(章) 구분이나 소제목 없이 상당히 긴 단락들로만 이루어져 있고 전적으로 작가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 전개된다. 시간과 장소 또한 이리저리 뒤섞인다.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 아래서 불행하게 보냈던 어린 시절과 기숙 학교에서 목도한 다양한 인간 군상,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끔찍한 일들과 인상적인 사건들, 아내와의 운명적인 첫 만남부터 이혼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과정, 글쓰기와 문학에 대한 사색 등이 얼핏 두서없이 결합되고 연결되며 하나의 뚜렷한 의미망을 만들어 낸다. 마치 기나긴 애도처럼 이어지는 혼잣말 혹은 읊조림은 반복되는 주제의식 때문에 때로는 한없이 비통하고 때로는 더없이 격정적이며 작가의 내면에 공존하는 빛과 어둠을 수시로 넘나든다.
2차 세계 대전이 남긴 상흔과 인류가 스스로에게 저지른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예술 작품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작가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케르테스가 자신의 개인적 고통의 기억에 집요할 만큼 끈질기게 매달리는 모습은 역설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치유와 행복에 관하여 생각하게 한다.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것과 생명이 지닌 숭고함에 대해서도 숙고하게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술로서 케르테스의 문학이 가진 위대한 힘이다.
참혹한 장면 하나 없이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환기하고 있는 이 소설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건네는 치유의 손길로서, 홀로코스트 이후의 삶을 괄호 쳐 버린 기존 작품들에 대한 독자들의 허기를 채워 준다. 케르테스에게 홀로코스트 문제는 우연이 아니며 인류가 오래전부터 인간성을 상실해 옴으로써 발생한 비극으로 해석된다. 때문에 홀로코스트의 진정한 비극은 인류가 파시즘의 야만에 대한 자기 성찰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성의 본질을 탐구해 온 케르테스는 기억하는 것은 인간애의 표현이자 문명의 신호라고,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고 반복해서 상기시키고 있다. (176쪽, 「작품 해설」에서)
■ 개인의 상처와 비극을 인류 공통의 아픔과 숙제로 환원하다
이 책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케르테스의 ‘운명 4부작’ 중 자전적 성격이 가장 짙은 작품이다. 운명의 무게에 억눌린 듯한 상실과 슬픔 가득한 갈망, 지독한 회한이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는 이 소설은, 끝내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떨치지는 못했으나 오히려 문학과 글쓰기를 통해 다시는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역사의 진실을 오롯이 드러낸, 한 상처 입은 영혼의 내밀한 고백이라 할 수 있다. 고통스러운 아우슈비츠 체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첫 소설 『운명』과 『운명』을 출간하기까지 문단의 무관심과 생활고에 시달리며 겪은 좌절과 문학에 대한 희망을 그려 낸 『좌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에서도 케르테스는 비극적 세계에서 처절하게 영혼을 짓밟힌 인간의 존엄과 개인이 짊어지고 극복해 가야 할 운명에 대한 문학적 성찰을 보여 준다. 개인의 상처와 비극을 인류 공통의 아픔과 숙제로 환원시키는 큰 작가 케르테스의 면모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 본문 중에서
우리는 항상 무언가 해명하고 변명한다. 해명할 수 없는 현상과 감정의 복합체인 삶조차도 우리에게 해명을 요구한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들이 해명을 요구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스스로도 우리 자신에게 해명을 요구한다. 결국 우리는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것들과 우리 자신을 지나치리만큼 과도하게 해명하여 완전히 무너뜨리는 단계까지 이르게 된다. (12쪽)
두려움이란 단지 구덩이를, 무덤을, 하늘에 파고 있는 (언젠가 내가 편히 누울 수 있는) 무덤을 만드는 데 필요한 나의 삽질일 뿐이다. (20쪽)
혹시 네가 검은 눈동자를 가진 딸아이로 태어나지는 않을까? 너의 작은 코 주위에는 주근깨가 엷게 흩어져 있지는 않을까? 아니면 네가 고집 센 아들인 것일까? 너의 눈은 회청색 조약돌처럼 근사하고 힘찰까?—물론, 나의 삶을 너의 존재의 가능성으로 생각할 경우에 해당하는 말이겠지만 말이다. 그날 나는 밤이 새도록 오로지 이 질문만을 깊이 생각했다. (25~26쪽)
여하튼, 내가 글을 쓰며 삶을 되풀이하는 동안, 나를 추동하는 것은 어쩌면 나의 은밀한 발버둥의 은밀한 희망이다, 말하자면, 내가 이 희망을 일단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알아차린 한, 나는 아마도 광적으로, 미친 듯 부지런히 중단 없이 글을 쓰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체 무엇을 위해 내가 글을 써야 한단 말인가. (69쪽)
“의미를 찾는 일은 그만둡시다, 의미 따위는 없는 곳에서: 금세기, 이 중단 없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발포 명령은 다시 한번 대량 학살을 준비하고 있으며, 그리고 운명은 사형수의 제비를 나에게 쥐여 주려고 한다는 것,—그것이 전부입니다.” (109쪽)
행복이란 어쩌면 너무 단순한 것이어서, 그것에 대해서라면 아무것도 쓸 수 없을 거라고, 나는 적었다, 그 당시 내가 적어 두었던 쪽지에서 내가 지금 막 읽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보며 다시 옮겨 적고 있는 것처럼, 행복하게 보낸 삶은, 그에 따르면, 무감각하게 보낸 삶이다, 라고 나는 적었다. 삶을 글로 쓰는 일은 삶을 물음에 던지는 일임은 명백하다, (…) (120쪽)
나는 학살자들, 삶을 훼손한 자들이 큰 소리로 스스로를 생명의 길로 선언하는 것을 질리도록 봐 왔다, 그런 일들은 지나치게 자주 반복되어 내 안에서 반항심을 다시 불러일으키지도 못할 지경이라고, 내가 말했다, 삶을 훼손하는 자들 때문에 삶을 혐오하게 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 그보다 더 처참한 일도 없다고, 아우슈비츠에서도 아이들은 태어났다고, 내가 말했다, (…) (127쪽)
“안 돼!” 절대로 나는 다른 한 인간의 아버지, 운명, 신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안 돼!” 어린 시절 내가 겪었던 일을 또 다른 한 아이가 겪게 해서는 안 된다,
“안 돼!” 내 안에서 무엇인가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 어린 시절을 그에게—너에게—나에게 겪게 해서는 안 된다, (…) (129~130쪽)
내 마음은 저 계단을 쌓은 돌더미처럼 무겁기만 하다. 마침내 모든 것이 가라앉고, 다시 떠오르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마치 하나의 비참한 비밀처럼. 무엇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치욕을 직면한 채 살아야 하는 것일까? (135쪽)
지난 몇 년 사이 나는 내 일의 본질도 깨달았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어떤 삽질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위해 구름 속에, 바람 속에, 허공에 파기 시작했던 저 무덤을 계속 파는 일, 끝까지 파야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17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