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삼식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21년 12월 31일
ISBN: 978-89-374-2058-0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33x196 · 532쪽
가격: 22,000원
시리즈: 오늘의 작가 총서 37
분야 한국 문학, 오늘의 작가 총서 37
「먼 데서 오는 여자」 「1945」 「화전가」 등 대표작 수록
아픈 역사가 사라지는 자리,
생생한 기억을 불러오는 목소리
3월의 눈 7
먼 데서 오는 여자 57
열하일기 만보 127
화전가 241
1945 373
작품 해설 514
추천의 글 525
극작가 배삼식의 대표작을 묶은 희곡집 『3월의 눈』이 ‘오늘의 작가 총서’로 출간되었다. 매회 매진을 거듭하는 「3월의 눈」과 「먼 데서 오는 여자」, 「화전가」 를 비롯해 오페라로도 제작되며 한국 오페라의 흐름을 바꿨다는 평을 받은 「1945」 , 대산문학상과 동아연극상 희곡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열하일기 만보」가 수록되었다. 배삼식은 시대와 장르를 넘나드는 작품을 선보이며 대중과 평단 모두의 호평을 받는 한국의 대표적인 극작가다. 특히 갈등을 극 전체에 흩트려 놓거나 갈등의 바깥을 기입하는 배삼식만의 형식은 독보적이다. 이는 단단하고 빈틈없는 갈등 구조를 뼈대로 하는 전통적인 서사를 벗어나려는 작가의 형식적 실험이다.
이 개성적인 형식은 그가 역사를 그리는 태도와도 조응한다. 「3월의 눈」을 중심으로 다섯 편의 수록작을 읽을 때 독자들은 ‘역사와 기억’이라는 주제에 가닿는다. 역사를 기록하는 배삼식의 방식은 한 사람이나 하나의 사건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살아 낸 이들의 다채로운 목소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사건 앞뒤의 분위기를 기록하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싶었다’는 작가는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시간이 지나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생생한 기억을 풀어놓는다.
■ 새로운 기억의 형상
첫 번째 수록작인 「3월의 눈」의 배경은 재개발로 허물어지고 있는 고택이다. 노부부의 소소한 대화 속에 과거에 대한 회상이 이어지는 와중에, 곧 사라져 버릴 집 위로 눈이 내린다. 한 계절의 끝에 내리는 ‘3월의 눈’은 잊히고 사라지는 것을 다루는 이 작품집 전체에 대한 은유다. 「먼 데서 오는 여자」에서 여자는 점차 흐려지는 기억 속 여전히 떠오르는 아픔을 이야기한다. 현재와 과거가 뒤섞인 여자의 기억에는 동시대인이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회적 참사가 생생하다. 집단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아픈 역사를 잊을 수 없는 이의 목소리가 다시금 기억하기를 요구한다.
개인이 마주해야만 했던 역사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배경으로 작품 전반에 깔려 있다. 「화전가」는 꽃이 가장 아름답게 핀 봄날 꽃놀이를 갔던 경북 지방 여성들의 전통을 다룬다. 화전놀이를 준비하는 가족들의 대화는 다정하고 유쾌하지만, 문득문득 찾아오는 침묵은 한국전쟁을 목전에 둔 불안한 시기의 아득함을 상기시킨다. 「1945」는 종전 소식이 들려 온 1945년의 만주를 배경으로 조선을 향해 가는 향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일본군 위안소에서 일했던 명숙과 미즈코의 시선으로 1945년이 재현될 때, 일제강점기와 해방기의 역사에 대한 집단적 기억에 새로운 형상이 새겨진다.
■ 대화의 예술
본래 공연을 위해 쓰인 희곡은 대사와 지시문으로 구성된다. 대사가 대화를 이루고, 간결한 지시문이 동작과 표정, 그리고 침묵을 표현한다. 배삼식의 희곡은 이 소박한 형식으로 가능한 가장 커다란 감동을 이끌어낸다. 어떤 말은 침묵 속에 오롯이 떠 있고 어떤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다성적인 목소리가 된다. 「열하일기 만보」는 이러한 대화의 예술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 중 하나다. 정체불명의 짐승 ‘연암’이 한 마을에 가져온 혼란이 마을 사람들의 일상적이고 관념적인 대화를 통해 그려진다. 인물들의 고유한 어투는 그들의 개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화전가」의 생생한 안동 사투리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음악성을 띤다. 이처럼 작품 속 대사들은 고유한 리듬감으로 독자들에게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단 한 문장의 울림이 되어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다가온다.
■ 추천의 말
배삼식의 작품은 분명 무대화를 염두에 두고 있지만, 독서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한 경지에 매번 이른다. 희곡이 대사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저 방언들과 입말들이 귓가를 여지없이 때리는데, 어떻게 그 삶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겠는가. 뒷짐 지고 바라볼 수 있겠는가. ―박민정(소설가) | 추천의 글에서
「3월의 눈」을 좌표 삼아 다시 읽는 다섯 편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집단을 구분하기 위해 작동하는 이념이 아니라 집단으로부터 개인을 회복하기 위해 발견되는 이념을 읽는다. 한 사람을 위한 이념 위에서 완성된 과거가 해체되고 해체된 시간들이 다시 조립되는 과정을 거쳐 어디에도 없는 기억의 집, 나의 집이 완성된다. ―박혜진(문학평론가)| 해설에서
■ 본문에서
이순 이 사람아, 왜 여기 이러구 있어……. 집은 오래 비워 두면 안 되는 거야. 비워 줄 땐 비워 주더래두 돌아가야지, 그만 돌아와야지. 아이구, 이 착한 사람아, 자네 넋은 어디 두고 몸만 남았는가. 나는 집을 잃었구 자네는 집만 남았는가. 그래, 거기서라두 한숨 푹 주무시고 일어나거들랑 자다 일어난 듯 돌아오게. 꿈에서 깬 듯이 돌아가게. ―「3월의 눈」에서
남자 돌아왔구나!
여자 가긴 내가 어딜 갔었다구 그래.
남자 갔었지. 멀리 갔었지. 돌아와 줘서 고마워.
여자 멀리 간 건 당신이지. 난 늘 여기서 당신을 기다렸고. ―「먼 데서 오는 여자」에서
교충 꼭 그것 때문만이 아니라, 아시다시피 제가 잘하는 건 기억하는 일밖에 없잖아요? 전 이 마을의 모든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는데, 여길 떠나면 그게 죄다 아무 소용없게 되잖아요. 전 언젠간 그 기억들을 바탕으로 저만의 이념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그래서……. ―「열하일기 만보」에서
독골할매 봄에, 삼짇날 지내고 딱 요만 때시더. 음석도 장만하고 술도 장만하고, 그륵도 싸들고 해가, 경개 존 데로 나가니더. 집안 어른들, 액씨들, 동기간에 시집간 액씨들꺼정 다 모이가 이삐게 단장허고. 꽃매이 채리입고 나가니더. 나가가 바람도 시컨 쎄고 꽃도 보고 꽃지지미도 부치가 농가 먹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꼬, 그래 일 년에 딱 하루 놀다 오는 게래요……. ―「화전가」에서
명숙, 립스틱을 꺼내 미즈코의 입술에 발라 준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에도 바른다.
명숙 어때?
미즈코 기레이요.(예뻐.)
명숙 너도 예뻐. ―「194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