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시리즈 오늘의 작가 총서 35 | 분야 한국 문학, 오늘의 작가 총서 35
우스꽝스러운 세계를 견디는 농담의 미학, 관조의 철학
마침내 정영문이라는 문학
불안과 권태, 그리고 유머라는 세 가지 질료로 낯설고 견고한 문학 세계를 구축해 온 소설가 정영문의 소설집 『꿈』이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시리즈로 재출간되었다. 『꿈』은 일곱 편의 단편소설을 엮어 2003년에 출간되었던 소설집으로, 1996년 장편소설 『겨우 존재하는 인간』을 발표한 이래 26년간 꾸준히 이어져 온 정영문 세계관의 초기 성격을 엿볼 수 있는 귀한 디딤돌 같은 책이다.
정영문의 문학은 가장 근본적인 곳으로부터 출발한다. 생이라는 출발점, 죽음이라는 종착지, 그 사이를 메우는 숱한 시간들을 말할 때 정영문은 각각 권태와 불안, 유머라는 재료를 택했다. 원한 적이 없지만 이미 시작되어 지난하게 계속되는 생은 권태롭고, 모든 생의 종착지는 죽음일 수밖에 없다는 데서 불안이 촉발된다. 그리고 권태와 불안 위에 세워진 기나긴 시간을 견디게 해 주는 유일한 물약이 있다면, 바로 유머다. 정영문의 문장은 생의 본질을 닮아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중얼거리며 권태롭게 이어진다. 소설 속 인물들은 죽음과 관련된 사건에 휩싸여 소설이 끝날 때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불안한 의문 속에 놓여 있다. 그리고 소설 곳곳에, 우리를 무조건적인 절망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힘 빠진 웃음이 있다. 정영문의 소설이 “스스로 우스꽝스러운 짓을 함으로써 이 우스꽝스러운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강보원 평론가의 말은, 정영문이 꿰뚫고 있는 삶의 본질과 그 덧없음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식이 무엇인지 잘 보여 준다. 『꿈』을 통해 그의 고유한 문학이 시작되던 초기의 고민들을 다시 들여다보자. 이 책이 각자의 삶의 무게와 질서를 일순간 무너트리거나 뒤바꿀 운명의 열쇠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생의 무게가 소멸된 세계
『꿈』의 화자들은 죽음의 곁을 맴돈다. 「물오리 사냥」의 ‘나’는 “다른 실종자를 찾던 중에 실종된” 실종자를 찾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습기」에서는 가족 구성원의 자살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의 증언이 이어지며, 「꿈」에서의 ‘나’는 외지인들이 셋이나 죽음을 맞은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어느 마을을 방문한다. 이처럼 의문의 살인‧실종 사건의 해결을 맡은 인물, 가까운 이의 죽음으로 조사관에게 심문을 당하는 인물이라면 죽음의 원인을 파헤치거나 사건을 해결하는 데 관심을 두어야 마땅하겠지만 그들의 진술은 자꾸만 옆길로 새 버린다. 사건의 진실 따위는 어떠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이상한 일도 조금만 다르게 바라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는 듯이. 그들은 사건 자체보다는 죽은 이가 입었던 옷이나, 들오리와 물오리의 차이점 같은 사소한 것들에 궁금증을 갖는데, 그마저도 필요 이상의 열의를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에게는 오직 시간을 잘 죽이는 일만이 중요해 보인다. 정영문의 소설에서는 과한 열심도, 깊은 슬픔도, 눈물 나는 절망도 없이 삶이 지속된다. 삶을 구성하는 사건과 시간들에 ‘상식적으로’ 부여된 무게는 이렇듯 손쉽게 역전되고 소멸된다.
■황당함이 선사하는 힘 빠진 웃음
무겁기만 했던 생의 무게가 소멸된 공동의 시간에 남는 것은 ‘황당함’이다. 이 책의 표제작 「꿈」에서, 연달아 일어난 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나’에게 마을의 의사는 이렇게 말한다. “몇 달 사이에 동일한 장소에서 세 명이 연달아 죽은 것이 그렇게 이상할 건 없죠.” 그러나 그 셋 모두 외지인이라는 점은 이상하지 않느냐고 ‘나’가 되묻자 의사는 다시 답한다. “그들 모두가 외지인들이라는 사실을 빼면 이상할 것도 없죠.” 정영문식 유머는 이렇게 작동한다. 언뜻 중요해 보이는 일들에 부여된 거짓된 무게를 해체하고, 이상할 것도 중요한 것도 없는 세계에 덩그러니 남겨졌다는 황당함을 선사하고, 그 황당함으로부터 힘 빠진 웃음을 유발하는 것. 정영문의 인물들은 문제될 것이 없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그 생각에 대해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텅 빈 시간의 흐름에 몸을 내맡긴 채 그저 흘러간다. 어떤 꾸밈도 거짓도 없이 그저 중얼거리는 인물들은, 문학이 내보일 수 있는 삶의 가장 진실한 얼굴들이다.
■본문에서
우리는 어떤 실종자를, 또는 그 실종자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단순한 실종자가 아니었다. 그는 다른 실종자를 찾던 중에 실종된 것이다. 우리는 그 두 번째 실종자를 찾고 있었는데 그의 실종은 최초의 실종자의 실종과 분명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두 실종자를 동시에 찾게 되었다. 나는 처음에 그 사건을 자의가 아닌 실종으로 보았지만 이후에 밝혀낸 증거들에 비춰 보았을 때 자의에 의한 것이 틀림없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고 있었다. 그런데 P는 처음에는 자의에 의한 것으로 단정을 짓더니 점차 타의에 의한 것으로 결론을 내리는 듯했다. 그는 어떻게든 나와는 생각을 달리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물오리 사냥」, 9~10쪽
어느 순간 그녀가 먼저 잠이 든 듯 코 고는 소리가 요란스러웠다. 그 소리에 잠이 완전히 달아난 나는 모든 사람들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잠을 잘 때면 섬이 떠나가라 심하게 코를 고는, 코골이들의 섬을 상상하며 누워 있었다. 하지만 코 고는 소리는 점점 더 커져 갔고, 마침내는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나는 색맹인 사람과는, 심지어는 죽은 사람과도 얼마든지, 기꺼이 잠을 잘 수 있었지만 코 고는 사람과는 절대로 잘 수 없었다. 나는 방을 나왔고, 여관 주인에게 옆방을 달라고 했다. 그녀는 무슨 영문인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지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파괴적인 충동」, 60쪽
그는 부검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는 듯했다. 사망자가 바닷물 속에서, 수초에 휘감긴 채 발견되었다는 사실이 내가 확인할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사실이었다. 이 섬에서는 출생과 죽음이 비공식적으로 처리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죠, 내가 실망한 기색을 보이자 의사가 말했다. 몇 달 사이에 동일한 장소에서 세 명이 연달아 죽은 것이 그렇게 이상할 건 없죠. 하지만 그들 모두가 외지인들이라는 사실을 빼면 이상할 것도 없죠, 의사가 말했다. 이 섬에서는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는 일이 쉽지 않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꿈」, 276~277쪽
■추천의 말
정영문은 그것이 가능할 때라면 그냥 웃어 버리고자 한다. 그는 이 실체 없음으로부터 기인하는 무차별적 대체의 과정을 저지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이 근본적인 망가짐을 북돋고 격려함으로써 일상 속에서는 은폐되어 있는 이 실체 없음이 표면에 드러날 때까지 그것을 가속시키고 밀어붙인다. 그는 스스로 우스꽝스러운 짓을 함으로써 이 우스꽝스러운 세계에 참여하는 것이다.
—강보원(문학평론가)│작품 해설에서
물오리 사냥 7
파괴적인 충동 47
아늑한 궁지 93
궁지 155
죽은 사람의 의복 199
습기 231
꿈 267
작품 해설│강보원(문학평론가) 296
탐정, 텔레비전, 농담, 그리고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