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자체가 또 하나의 고전이다. -《더 타임스》
▶비평의 핵심은 열정과 지성이다. 그 자신이 보기 드문 재능의 소설가인 칼비노는 이 둘을 모두 풍부하게 지니고 있다. -《데일리 텔레그래프》
▶해박한 지식이 문학에 대한 은근한 열정과 조화를 이룬다. -《이브닝 스탠더드》
▶진지한 고찰과 깊이 있는 통찰을 담았음에도, 칼비노의 책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옵저버》
▶상상력이 넘치는 통찰력과 지적 감응력 그리고 열정의 전도성이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룬 글. -《헤럴드》
보르헤스, 마르케스와 함께 현대 문학의 3대 거장으로 꼽히는 작가 이탈로 칼비노가 호메로스, 오비디우스 등의 고대 작가에서부터 스탕달, 톨스토이, 플로베르, 발자크를 비롯해 마크 트웨인, 찰스 디킨스, 헨리 제임스, 보르헤스 등의 현대 작가에 이르기까지 30여 명의 고전 작가들과 그 작품들에 대해 쓴 개인적인 독서기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들 작가에게 바치는 칼비노의 열렬한 찬양과 독창적인 설명을 들으면, 독자들은 마치 그의 애독서가 꽂힌 서가를 둘러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의 열정에 전염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세계 문학의 이정표를 찍어 주는 지도이자, 고전이라는 요리에 풍미를 더하는 향신료와도 같은 책이다.
★ 20세기 문학의 거장 이탈로 칼비노의 독서 편력기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 1923~1985)는 “현대 문학의 3대 거장”이자 “현대 이탈리아 소설의 진면목인 환상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작가”인 동시에 “현대 이탈리아 문학 최고의 작가이며, 현실과 환상을 정밀하게 짜 넣으며 동방적 지혜와 예지를 교묘히 작품에 침투시키는, 모든 측면에 있어 ‘미래의’ 소설 형태를 예견케 한 작가”라는 찬사를 받는, 그야말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소설가이다. 국내에도 든든한 마니아 팬들을 가진 그가 1950년대부터 1985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틈틈이 일간지 서평이나 책의 서문 혹은 연설문으로 발표했던 글들을 묶은 책이 바로 이 책 『왜 고전을 읽는가』이다. 책에 실린 총 서른여섯 편의 에세이들은 대부분 채 몇 페이지가 되지 않는 짤막한 글들이다. 그러나 이 짧은 글만으로도 우리는 칼비노 자신이 아끼며 읽었던 책들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 책에 대한 그의 사랑이 얼마나 열렬한 것이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무엇보다 책의 제목이 “왜 고전을 읽는가”인 만큼, 칼비노는 책의 서두에서 우리가 ‘새삼’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열네 가지씩이나 조목조목 들고 나서, 그 자신이 개인적으로 정전(正典)으로 삼았던 작품들을 세련되면서도 활기 찬 언어로 훌륭하게 안내하고 있다. 거창한 비평 용어 없이 때로는 노골적인 경배와 때로는 치밀한 문체 분석이, 또는 역사적 관점에서 주제를 직시하는 혜안이 공존하는 그의 에세이는 전통과 권위에 기대어 고전을 의무감에서 벗어나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고전에 대한 길라잡이로서만 이 책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칼비노라는 한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읽어 온 작가들에게 바치는 열렬한 찬가이자, 그들과 나눈 격의 없는 대화인 이 책은 작가가 아닌 ‘독자로서의’칼비노를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선사한다. 또한 그의 독서 편력을 따라가 봄으로써 그의 문학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치 한 문인의 서가를 둘러보며 담소를 나누며 생생하고도 솔직한 그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는 이 책에서 수많은 권장 도서나 필독 목록을 ‘강요’하며 그 당위를 설명하는 지식인의 모습보다는, 한 작품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그 책을 다시 펼쳐들 때 느끼는 즐거움을 회상하는 순수한 독자로서의 칼비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칼비노가 독자로서 이야기하는 ‘고전’의 필요성은 고전이 글쓰기와 읽기에 있어서 일정한 구조이자 규칙으로, 또 다른 잠재적인 가능성의 보고로 자리한다는 점에 있다. 이 책에 담긴 여러 에세이들을 종합해 보자면, 새로운 글쓰기와 읽기는 이러한 ‘고전’이라는 구조가 펼쳐 놓는 자유로부터 나온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누구나 이미 학창 시절 교과서를 통해 약간이나마 맛을 보았을 그런 책들, 그래서 다 읽지 않았다 해도 마치 읽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낡고 고리타분하게 생각되는 책들, 그런 것이 우리 머릿속에 자리 잡은 ‘고전’의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또다시 ‘왜 고전을 읽는가’인가. 이는 책의 문을 여는 첫 번째 글의 제목이기도 한데, 바로 이 글에서 칼비노는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고전의 정의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짐짓 명랑한 어조로 그는 말한다.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라고. 그리고 이어서 열세 가지의 이유를 더 이야기한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2. 고전이란 그것을 읽고 좋아하게 된 독자들에게는 소중한 경험을 선사하는 책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조건에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사람들만이 그런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다.
3. 고전이란 특별한 영향을 미치는 책들이다. 그러한 작품들은 우리의 상상력 속에 잊을 수 없는 것으로 각인될 때나, 개인의 무의식이나 집단의 무의식이라는 가면을 쓴 채 기억의 지층 안에 숨어 있을 때 그 특별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4. 고전이란 다시 읽을 때마다 처음 읽는 것처럼 무언가를 발견한다는 느낌을 갖게 해 주는 책이다.
5. 고전이란 우리가 처음 읽을 때조차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는 책이다.
6. 고전이란 독자에게 들려줄 것이 무궁무진한 책이다.
7. 고전이란 이전에 행해졌던 해석의 그림자와 함께 다시 찾아오기 마련이며, 그것이 한 문화 혹은 여러 다른 문화들에 남긴 과거의 흔적들을 우리의 눈앞으로 다시 끌어오는 책들이다.
8. 고전이란 그것을 둘러싼 비평 담론이라는 구름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러한 비평의 구름들은 언제나 스스로 소멸한다.
9. 고전이란, 사람들로부터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실제로 그 책을 읽었을 때 더욱 독창적이고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 창의적인 것들을 발견하게 해 주는 책이다.
10. 고전이란 고대 전총 사회의 부적처럼 우주 전체를 드러내는 모든 책에 붙이는 이름이다.
11. 고전이란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할 수 없으며, 그 작품과 맺는 관계 안에서, 마침내는 그 작품과 대결하는 관계 안에서 우리가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12. 고전이란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일련의 위계 속에 속하는 작품이다. 다른 고전을 많이 읽은 사람은 고전의 계보에서 하나의 작품이 차지하는 지위를 쉽게 알아차린다.
13. 고전이라 현실을 다루는 모든 글을 배경 소음으로 물러나게 만드는 책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전이 이 소음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4. 고전이란 배공 소음처럼 존속해서 남는 작품이며, 이는 고전과 가장 거리가 먼 현재에 대한 글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칼비노에 따르면, 이렇듯 고전의 정의는 14가지나 된다. 고전이 이러한 특징을 가진 책이라면, 이는 거꾸로 이러한 최소 이 14가지 조건을 충족해야만 비로소 한 권의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즉 ‘고전’이라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이렇게나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도 세대에 세대를 거쳐 매우 오랜 세월을 지나야 합격 여부를 알 수 있는 그런 시험을 말이다. 그러므로, 바로 이러한 점에서 고전은 그 절대적인 가치를 발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고전을 읽어야만 한다. 요약본도 해설서도 아닌 작품 그 자체로. 왜냐하면 “고전이란 그것을 둘러싼 비평 담론이라는 구름을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작품이지만, 그러한 비평의 구름들은 언제나 스스로 소멸”하기 때문이다.(정의 8) 고전에 관한 비평을 읽는 것은 종종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된다. 읽고 음미하고 다시 읽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러한 설명은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적인 이유가 아니다. 칼비노 자신이 고전을 의무감에서 읽어서는 안 되며, 고전 자체의 가치를 알아보고 이를 자발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본 까닭이다. 따라서 “왜 고전을 읽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자체는 다소 맥이 빠진다.
고전이란, 우리가 누구이며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 ……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전은 읽지 않는 것보다 읽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왜 고전을 읽는가」 중에서
그러나 앞서 고전의 이유를 길게 설명했기 때문에, 독자들은 고전을 읽고 싶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칼비노가 의도한 바였을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칼비노가 고전의 정의로 든 14가지가 “우리가 처음 읽”음에도 “이전에 읽은 것 같은, ‘다시 읽는’ 느낌을 주”고 있으니, 이는 칼비노의 이 책 자체가 또 하나의 고전임을 증명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더 타임스》에 실린 서평이 “이 책 자체가 또 하나의 고전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 칼비노의 눈을 통해 더 깊고 풍요로워지는 ‘고전의 풍미’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작품들은 모두 위의 ‘고전 심사’를 심의 필한 작품일 것이다. 칼비노의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한 작품들인 만큼, 즉 그의 “상상력 속에 잊을 수 없는 것들로 각인”(정의 3)된 작품들인 만큼, 이 작품들에 대해 칼비노가 보이는 애정은 너무나 열렬하다. 그 열정은 매우 전염성이 강해서 독자들은 그 작품을 직접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질 만큼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호메로스, 플리니우스, 크세노폰과 같은 고대 그리스로마 작가에서부터,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의 디드로, 볼테르, 근대 소설의 선구자로 흔히 평가되는 『로빈슨 크루소』의 대니얼 디포, 19세기 영국 문학의 디킨스, 19세기 러시아 문학의 톨스토이, 『닥터 지바고』를 통해 현대의 서사시를 창조해 낸 파스테르나크, 이탈리아 중세르네상스 시대 문인과 현대 작가들, 20세기 현대 문학의 새로운 잠재성을 보여 준 프랑시스 퐁주, 레몽 크노, 보르헤스에 이르기까지 그가 논의하고 있는 작가들의 목록은 대단히 폭넓고 다양하다. 이런 엄청난 목록을 다루면서도, 마치 능수능란한 학원 강사처럼, 칼비노는 이 작가들의 정수를 생생한 문장으로 추출해 낸다. 예를 들어 “돈은 19세기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발자크에게는 작품을 이끌어 나가는 동기였으며, 디킨스에게는 인간의 마음을 시험해 보는 훌륭한 도구였다. 그러나 마크 트웨인의 작품에서 돈은 텅 빈 공간 앞에서 현기증을 불러일으키며 유희를 벌이는 거울이었다.”(239~240쪽) 같은 대목이 그러하다.
그의 평가에 따르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보물섬』,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작가)도 볼테르나 헨리 제임스와 나란히 위치할 수 있다. 또한 1955년 『로빈슨 크루소』에 대한 열렬한 찬사를 담은 비평을 쓰면서 그는 대니얼 디포를 일컬어 “근대 저널리즘의 창시자”라고 했다. 그리고 1954년에 쓴 글에서는, “헤밍웨이가 내게 하나의 신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기는 내게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좋은 시기이기도 했다. 보통 젊은 시절 자신이 몰두했던 일이나 그 당시의 유행을 되돌아보면서 흔히 취하게 되는 너그럽게 빈정대는 태도를 모두 배제하더라도 말이다.”(323쪽)라고 이야기한 후, 그러나 나중에 다시 읽었을 때에는 “폭력적인 시대를 방관적으로 대”한 헤밍웨이의 태도에 대해 혐오를 느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심지어 증오와 구토를 유발한다”(323~324쪽)) 그러면서도 다시 냉정한 태도를 찾아 헤밍웨이의 건조하면서도 현실에서 유리되지 않는 글쓰기에 대해서는 또 높이 평가한다.(“그러나 헤밍웨이의 스타일은 항상 건조하고, 그의 글은 언제나 질퍽거리거나 진체하는 구석이 없다. 그의 발은 언제나 땅을 단단히 딛고 있다.”(325쪽)) 그리고 보르헤스를 다룬 1984년의 글에서는 보르헤스가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 준다.
그에 따르면 찰스 디킨스의 『우리 서로의 친구』는 너무나 강력한 전율을 선사하기에 그 어떤 일도 다 제쳐 버리고 곧장 서재로 가서 찾아 읽을 만한 작품이다. 또한 그는 얼마나 많은 젊은 독자들이 스탕달이 쓴 워털루 시대의 모험담인 『파르마의 수도원』의 “첫 페이지를 읽자마자 바로 이 작품에 빠져 들어서, 이것이 자기가 항상 읽고 싶어 했던 소설임을, 또한 앞으로 읽을 다른 소설의 이정표가 될 것임을 인지하면서, 이것이 최고의 소설이라는 점을 알아보게”(199쪽) 될 것인지를 역설한다.
『오디세이아』 속에는 여러 개의 『오디세이아』들이 존재하며, 파스테르나크의 위대한 작품 『닥터 지바고』의 실제 주인공은 지바고가 아니라 라라라는 새로운 해석을 내놓기도 하고, 못생긴 코 때문에 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가 근대 공상과학소설의 선구자임을 설명하기도 한다.
오비디우스에서 파베세, 크세노폰에서 디킨스, 갈릴레오에서 가다에 이르기까지 칼비노는 그가 사랑했던 고전들을 신선하면서 읽기 쉽고 재치가 넘치는 문장들로 다루고 있다. 『왜 고전을 읽는가』는 칼비노의 전위적인 소설만큼이나 우리를 흥분시키는 독창적인 작품이다. 현대 독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작가들을 설명하는 글들은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고 넘어갔을 작가들, 즉 프랑시스 퐁주와 에우제니오 몬탈레 같은 작가들에 대해 독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들 작가의 작품들은 고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한국어로 읽을 수가 없는 아쉬운 형편이다. 그런 까닭에 옮긴이는 후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런 토대 없이 칼비노가 익숙한 듯 설명하고 있는 구절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미래의 책’이 오히려 19세기 영미 소설에 편중된 고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새롭게 열고, 우리에게 아직은 낯선 고전들을 소개하는 일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그리하여 이 책은 미래의 독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며, 현재의 우리를 끊임없이 초대하고 자극하는 책이기도 하다. ―옮긴이의 말 중에서
이 책에서 이탈로 칼비노는 고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독창적인 정의를 내리고, 또한 고대로부터 초기 근대의 유럽, 19세기 거장들의 소설과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아메리카 대륙의 작가, 그리고 자신과 동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은 칼비노가 문학을 보는 관점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이 작가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던 핵심적인 텍스트들을 매력적으로 조명하는 글들이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그가 탁월한 에세이스트이자 비평가이기도 함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당신은 칼비노가 논하고 있는 그 고전들을 (다시) 읽게 될 터이고, 그러고 나서 다시 이 책으로 돌아올 것이다. ―《뉴요커》
차례
서문 7
왜 고전을 읽는가 9
『오디세이아』 속의 여러 오디세이아 21
크세노폰의 『아나바시스』 34
오비디우스와 우주의 인접성 43
하늘, 인간, 그리고 코끼리 61
네자미의 일곱 공주 78
티랑 로 블랑 89
『광란의 오를란도』의 구조 98
아리오스토의 명시선 111
지롤라모 카르다노 121
갈릴레오와 자연이라는 거대한 책 129
달나라의 시라노 140
로빈슨 크루소와 상인으로서 갖춰야 할 덕목에 관한 일기 148
『캉디드』의 서술 속도에 관하여 155
드니 디드로의 『운명론자 자크』 162
자마리아 오르테스 171
스탕달과 먼지구름으로서의 지식 180
스탕달의 『파르마의 수도원』의 새로운 독자들을 위하여 199
발자크와 소설로서의 도시 209
찰스 디킨스의 『우리 서로의 친구』 217
플로베르의 『세 편의 이야기』 226
톨스토이의 『두 경기병』 230
마크 트웨인의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 236
헨리 제임스의 『데이지 밀러』 244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해변의 별장』 249
콘래드와 선장 256
파스테르나크와 혁명 263
카를로 에밀리오 가다의 아티초크와도 같은 세계 290
가다의 『메룰라나 가(街)의 무서운 혼란』 294
에우제니오 몬탈레의 시 「어느 날 아침」 304
몬탈레의 절벽 317
헤밍웨이와 우리 세대 323
프랑시스 퐁주 33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344
레몽 크노의 철학 356
파베세와 인간 희생 제의 381
편집자 주 387
옮긴이의 말―칼비노의 문학 지도를 따라서 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