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박정대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21년 11월 26일
ISBN: 978-89-374-0913-4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4x210 · 324쪽
가격: 10,000원
시리즈: 민음의 시 293
분야 민음의 시 293
예술가는 일종의 사회적 파업 상태에 있다
눈의 이름 17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19
나의 슬픔은 세상과 무관하고
그대의 슬픔은 나를 울리지 못하니 20
톰 웨이츠를 듣는 좌파적 저녁 21
대관령 밤의 음악제 27
위 위 불란서 여인이 노래한다 59
검결 63
시 66
비 내리는 원동의 고려극장 70
시 72
폭풍우 치는 대관령 밤의 음악제 77
시
이것은 참으로 간단한 계획 91
오, 이 낡고 아름다운 바이올린
27 행성에 내리는 센티멘털 폭설 92
떠돌이 자객 모로 120
아비라는 새의 울음소리는 늑대와 같다 122
아비정전 124
삼나무 구락부 8진 125
어떻게든 아름답게 135
지금은 아주 환한 대낮의 밤
혹은 아주 어두운 밤의 대낮 137
북관 139
생강 140
손에는 담배를,
탁자에는 찻잔을 143
대관령 밤의 음악제 145
시는 일종의 시적 파업 상태에 있다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프랑스 179
낭만, 적 181
빅토르 최는 한때
혜화동에 살았지 182
악양 184
서울을 떠나며 186
히네랄리페정원이 보이는 다락방 187
빛 속에 칠현금 189
사랑과 혁명의 시인 190
관산융마 191
독립적인 영혼 194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겠다 196
톰은 죽어서 사랑스럽게 기다린다 199
겨울밤이면 스칼라극장에서 201
데카르트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었다 203
담배 한 갑 205
멀리 떨어진
가장 가까운 223
ᄃᆞᆯ하, 노피곰 도ᄃᆞ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224
지구라는 행성을 오래 바라본 적이 있다
영화의 기본 구조가 지구의 자전이라면
시의 기본 구조는 지구의 공전이다
어떤 저항의 멜랑콜리 229
아름다운 시절은 흩어져
여인의 등에서 반짝인다 233
이절극장 236
추운 사월 239
불취불귀(不醉不歸) 241
흐리고 때때로 비 243
이절에서의 눈송이낚시 245
아침부터 보스포루스 해협 횡단하기 254
오랑캐략사 리절 외전 257
이절에서의 눈송이낚시 261
산유화, 달 세뇨 표가 붙은 곳으로 가서 피네 276
작품 해설–엄경희(문학평론가)
이주 혹은 귀환의 정신적 자서전 277
발문–함성호(시인)
은근하고 이상한 단 하나의 책 303
199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하여 『단편들』,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아무르 기타』,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삶이라는 직업』, 『모든 가능성의 거리』, 『체 게바라 만세』, 『그녀에서 영원까지』, 『불란서 고아의 지도』 등의 시집을 펴낸 박정대 시인의 신작 시집이 민음의 시 293번으로 출간되었다. 이번 시집 『라흐 뒤 프루콩 드 네주 말하자면 눈송이의 예술』은 시인 박정대의 시작(詩作) 시간 30년을 채우고 펴내는 그의 열 번째 시집이다. 그 시간과 무게를 몸소 보여 주는 것처럼 두텁고 묵직한 이 시집에는 시와 노래, 영화와 사진, 친구와 고향 등, 시인 박정대를 이루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시인은 어디에도 결속되고자 하지 않는 방랑자 혹은 망명자처럼 자신을 숨긴다. 다른 언어 속에, 흐르는 노래 속에, 감상한 영화 속에 시를 숨기듯. 그러나 시인은 숨는 동시에 존재감을 드러낸다. 우리에게 기억되는 수많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하나의 얼굴로. 그는 노래 부르듯 시를 쓰고 토론하듯 시를 쓰며, 그렇게 쓰인 수많은 시들과 함께 어디론가 유유히 흘러가는 듯하다. 그곳은 바로 어디에도 없지만 시인이 마련한 시의 자리, 시인의 고향이다.
■시, 그것은 눈송이의 예술
걸어가는 쪽으로 내리던 눈은
다시 돌아오는 쪽으로도 내린다
지금은 귀환의 시간
먼 곳에서 절뚝이며 걸어오던 시간이
고개를 들어 눈의 영토를 바라보는 시간
눈 속으로 내리는 또 다른 눈이 하염없이 삶의 속살을 고백하는 시간
걸어가는 쪽으로 눈은 내린다
-「눈의 이름」에서
시의 시간을 30여 년이나 보내고도, 시인은 여전히 시를 쥔 채 걷고 부르고 묻고 쓰는 일에 질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인다. 여전한 에너지로 혁명에 분노하고 세상에 슬퍼하며 허무에서 낭만을 본다. 언제나 흥얼거리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걷는 사람처럼, “한걸음 걸어갈 때마다/ 발끝에 차이는 것들”(「나의 슬픔은 세상과 무관하고 그대의 슬픔은 나를 울리지 못하니」)을 생각한다. 꿈인지 사랑인지, 혁명인지 예술인지 하는 것들을 발끝으로 차며, 줍기도 하며, 시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고개를 든 것 같다. 아마도 “밤새 눈이 내”려서였을 테고, “거리의 추위도 눈발에 묻혀 갈 즈음” “우리가 밤새 찾으려고 했던 것은 생의 어떤 실마리였을까” 하고 묻는다. 그리고 곧장 알게 된다. “움직이는 모든 것들이 시였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들의 내면도 결국은 시”(「톰 웨이츠를 듣는 좌파적 저녁」)였다는 것을. 눈송이가 천천히 머리에 내려앉듯,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눈송이의 결정이 모두 다르듯 쏟아지는 언어들이 모두 다른 것에 다른 어느 때보다 눈을 반짝이며, 그의 열 번째 시집에서 ‘눈송이의 예술’을 계속해 나간다. 모두 다른 그 언어들을 뭉치고 흐트러뜨리며, 계속해서 쓴다.
■발걸음이 멈추는 곳
이절에 조그만 오두막을 짓기로 생각한 후
마음은 숭어처럼 뛴다
산다는 것은 뭔가 심장이 뛴다는 것이고
이제 나는 조금씩 살아가려나 보다
-「이절극장」에서
정처를 모르겠다고 작정한 것만 같고 그래서 더욱 거침없던 리듬으로 나아갔던 시는 종종 멈춰 서서 그 자리를 돌아보곤 한다. 구르던 발과 내딛던 걸음을 멈추는 순간은 시인이 폭설에 묻힌 듯 고독을 느끼는 순간이다. 걸어온 것들을 더듬는 시간. “물끄러미 낮달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낮달 속으로 걸어 들어가 망명 정부 하나 세우고 싶어”지는 순간이며 그곳에서 시인은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 모두 불러서 촛불이라도 밝히고, 함께 조촐한 저녁이라도 먹고 싶”(「음악들」)다. 이때 쓸쓸함과 외로움을 생각하느라 시인의 발걸음은 제자리를 맴돈다. 눈 내리는 거리를 홀로 걷는 차가운 걸음들을 생각하다가, 푹푹 쌓이는 눈송이 같은 시들을 생각하다가 시인은 슬몃 정착에의, 도착에의 의지를 내보인다. 시인이 닿고자 하는 곳은 바로 그의 작업실이자 고향인 이절이다. “첫눈의 언어를 찾아 말을 타고 떠났다가 (……) 이제사 이곳에 당도했으니/ 여기는 이절, / 불꽃과 눈송이로 이루어진 단 한 편의 시”(「오랑캐략사 리절 외전」)로 설명되는 곳. 그곳에서 시인은 오래도록 맞아온 눈발을 털어내고, 언 발을 녹이는 난로를 켜고, 눈이 녹은 물을 끓여 훈기를 퍼뜨리고, 다시 노래를 시작할 것이다. 발걸음이 멈추어 따뜻해지는 곳에서 다시, 시가 탄생한다.
■본문에서
작은 배에 몸을 싣고 출렁이는 밤 강물을 거슬러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이 있다 시인이다
시인에게 끝없이 계속되는 밤은 없다 시인은 밤을 끝내는 사람 아침의 햇살을 끌어와 만물에 되돌려 주고 스스로 다시 어둠이 되는 사람
눈 포래를 뚫고 온 사내가 헤매던 너의 가슴 그늘진 숲속을 기어간 오솔길로도 어둠이 왔다
북관의 계집은 튼튼하고 아름답지만 튼튼하고 아름다운 절망 속에서도 밥이 없어서 별을 먹었다
비 내리는 원동의 고려극장 누군가는 시를 쓴다
누군가의 시란 이런 것이다
-「시」에서
천창엔 별빛이 있고 가끔 눈발이 날려야 한다
별빛 속에는 다른 삶이 있고
눈발 속엔 말들이 달려야 한다
말안장 위에 작은 등불을 밝히고
글을 읽을 수 있으면 된다
두툼한 스웨터를 입고
톱밥 난로 곁에서 글을 쓰는 밤이 있으면 된다
-「북관」에서
10여년 전에 산 두 통의 소금은 아직도 여전히 사용 중인데 게랑드 소금은 조금 남아 있고 카마르그 소금은 아직 절반 이상이 남아 있다
10여년이 지났는데도 소금 고유의 맛을 유지한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
나는 이 두 통의 소금으로 얼마나 더 많은 음식을 해 먹고 얼마나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 몹시 궁금하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가끔 소금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데카르트는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었다」에서
■추천의 말
탐미적 저항은 현실이라는 괴물과 맞설 때 패배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탐미적 저항은 패배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다. 패배를 무릅쓰고 아름다운 것에 ‘복무’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은 살만한 것이 된다. 또한 꿈꿀 수 있게 된다. 꿈의 신생은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움의 기근으로부터 생성한다. 아름다움의 기근이 혁명을, 방랑을, 또 다른 ‘행성’에 가교를 놓는다. 촛불을 켜게 하고 음악 같은 눈송이를 날리게 하고 말을 달리게 한다.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탐미적 급진 오랑캐들’은 최후까지 말을 달릴 것이다. ‘옛날’을 향해, 아름다움을 구원하기 위해. “그러니 세계여, 닥쳐!”(「담배 한 갑」). “시인은 밤을 끝내는 사람 아침의 햇살을 끌어와 만물에 되돌려주고 스스로 다시 어둠이 되는 사람”(「시」)이 아니던가.
-엄경희(문학평론가) / 해설에서
왜 좋은지 모르는 사랑스러운 말들에는 혁명이 있고, 망명이 있고, 음악이 있고, 삶이 있고, 철학이 있고, 시가 있다. 박정대의 낭만주의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세계, 그 세계가 완벽할수록 더 불완전한 현실을 살기 위해 스스로를 제한하며 만들어지는 파편들, 그리고 거기서 절대화 되는 언어가 낭만주의자 박정대의 면모다.
-함성호(시인) / 발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