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두 권의 소설집 『빗소리』(1993년), 『숭어』(1996년)와 한 권의 장편소설 『초록빛 아침』(1994)을 발표하며 문단의 중견으로 자리잡은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섬세한 눈길과 바지런한 정신으로 일상의 모서리에서 들려오는 존재의 발신음을 날카롭게 좇고 있다.
플라타너스 꽃 ― 존재하지 않는 것의 그림자
플라타너스 꽃 ― 존재하지 않는 것의 그림자
권두 작품인 「플라타너스 꽃」은, 199년 《세계의 문학》 봄호에 발표되면서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색다른 수작으로 평가받았다.
홑겹의 치자꽃 같기도, 산목련 같기도 한 흰 꽃의 이미지의 울림이라니. 이미지가 울림으로 다가온 까닭은 무엇일까. 이미지도 아니고, 울림도 아닌 제3의 그 무엇일까. 작가는 아직 그것이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호하다’는 현재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카페인지 술집인지에서, 그러니까 취해서 본 정경이었으니까. 그런데 작가는 또 의심하고 있군요.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것이 정말 꽃이었을까? 혹시 가지 걸린 휴지쪽이 아니었을까?”라고. 물론 다시 확인했지요. 그런데도 무엇인가 계속 석연치 않았던 까닭. ‘무엇’이란 무엇일까, 산목련 같음이냐 휴지조각 같음이냐를 구별하기 어려움, 그것이 현실이다, 하고 작가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니, 주장하다니!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작가는 소설적 방식, 그러니까 이청해식 고유성으로 쓰고 있었던 것. ― 김윤식(문학평론가), 《문학사상》 1999년 5월호
고층 빌딩, 잿빛 비둘기 등과 함께 물질화된 도시의 풍경을 이루는 플라타너스 나무에서 문득 별스럽게 피어난 하얀 꽃을 발견한 주인공. “플라타너스에도 꽃이 피는지” 반신반의하는 주인공에게 이 경험은 하나의 계시처럼 기억된다. 그날 밤 술자리를 함께한 절친한 친구는 홀연히 사라지고 며칠 후 뉴스 보도를 통해 월북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친구의 월북은 아무리 생각해도 전후 맥락을 짐작할 수 없는, 마치 플라타너스 나무에 핀 꽃만큼이나 이상한 일이다. 이를 계기로 삶의 모든 인과율들은 허물어지고, 그곳에 자리 잡은 존재와 비존재의 모호한 경계는 점차 확장되어 친구, 아내와 아들, 일자리와 같은 삶의 실질적인 성분들마저 의심스러워진다. 주인공이 반복해서 되뇌는 “플라타너스에도 꽃이 피나?‘라는 물음은 이러한 회의와 혼돈이 응축된 물음이자, 독자에게 던져진 조용한 화두인 것이다.
물질 도시의 인간학
또한 작가는 이번 소설집을 통해, 도시 사람들의 작은 일탈과 그 속에서 느끼는 작고 소중한 깨달음을 담고 있다. 「러브호텔」에서 중년의 가정주부 기서는 가족끼리 떠난 여행길에 교통사고를 당한다. 아비규환 속에서 남편과 아들들은 그녀를 외면한 채 각자의 목숨만을 도모하고, 간신히 119 구조대에 의해 구조된 그녀는 불현듯 ‘허망함’을 느낀다. 작은 사건을 만들어보고자 남편과 러브호텔행을 결심하는 그녀. 주말의 교통 체증과 인파를 헤치고 찾아든 러브호텔이지만, 지쳐 잠든 남편의 모습에서 오히려 더한 연민을, 사는 일의 본원적인 쓸쓸함을 확인한다.
「작은 세계」는 노모와 함께한 한나절의 나들이를 그리고 있다. 백화점에, 호텔 커피숍에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지만 팔순이 넘은 어머니는 도시 속 삶의 속도에서 비켜나 있다. 세월의 격랑을 거치며 나름의 인생 보조를 체득한 노모는 그 대신 작은 수첩에 하루의 일과들을 기록하며 남겨진 삶을 자신의 시간으로 조각한다. 한편 「머물고 싶은, 또는」에서는 주인공이 어릴 적 살던 동네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는 신문 광고를 발견하고 문득 자신의 고향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담고 있다. 이렇듯 이청해의 주인공들은 모두 도시의 지붕 아래 살고 있지만 언제나 그 너머에 삶의 준거를 둔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물질과 소비로 점철된 도시 그 점점을 이루는 인간들의 모습을 흥미롭고 따뜻하게 그려 보인다.
단정하고 깊이 있는 문체,
중년의 작가가 선사하는 원숙한 삶
요즘 우리 소설 독자들을 사로잡는 여성 작가들의 소설이 세련된 언어 유희와, 인생에 대한 유쾌한 허무주의로 무장하고 있다면 이청해의 소설은 한 걸음 더 인생의 깊이로 나아가고 있다. 삶의 조망 능력을 갖춘 작가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큰 미덕은 ‘일상적 존재에 대한 따뜻한 연민과 열정의 마음’(한기, 문학평론가)이다. 아울러 선뜻 앞서 나가지 않고, 속단하지 않고 두루 살피고 기다리는 작가의 언어들은 ‘작품을 끌고 나가는 깐깐한 묘사와 예리한 감각으로 인생의 미묘함을 포착하는’(염무웅, 문학 평론가) 글쓰기라는 찬사를 이끌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