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타인이 되어 가는 사이, 한 시절이 소멸해 가는 사이,
발길이 멈추고 말문이 막히고 미래가 접히는 순간의 장면들을
정물화처럼 붙잡고 응시하는 서유미 소설의 정점
서유미 신작 소설집 『이 밤은 괜찮아, 내일은 모르겠지만』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5편의 짧은 소설과 7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된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는 2010년대 중후반을 관통하며 바라본 세상과 세상 속 인물들을 때로는 찰나의 장면으로, 때로는 밀도 높은 심리 변화와 서사로 다채롭게 변주하며 ‘서유미 문학’의 한 정점을 보여 준다.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악의 없는 인물들이 굽이치는 삶의 귀퉁이에서 머뭇거리는 순간들, 누구나 경험하지만 대부분은 스치듯 지나거나 망각의 서랍에 넣어 두는 비밀스러운 장면들을 복기하는 가운데 드러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정교하고 세심한 시선이다. ‘서유미의 독자’들에게 고요한 채 깊어지는 이 시선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문학이자 ‘인간’을 위한 문학이다.
편편의 작품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스토리를 전개시키지만 독자들에게 12편의 이야기는 한 편의 서사로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많은 방향으로 흩어지는 이야기들 가운데에도 중심은 있기 때문이다. 12편의 이야기는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들’이 형체를 드러내는 순간을 공유한다. 침묵으로 뒤덮여 있던 사건과 사건을 지나는 동안 품게 된 사유와 감각은 더 이상 봉인되어 있지 못한 채 은밀하지만 폭발적으로 표출된다. 긴장과 불안이 잠복되어 있는 일상의 고요에 이름 붙여 주는 소설들. 작가 서유미가 가장 잘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작가 서유미를 통할 때 가장 잘 표현되는 이야기다. 『이 밤은 괜찮아, 내일은 모르겠지만』을 가리켜 서유미 문학의 정점일 뿐만 아니라 한국문학의 그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다.
■ 인간에 대한 애정과 온기
작가 이승우는 서유미의 작품을 가리켜 “베인 상처 위에 붙일 수 있는 밴드 같은 소설”이라고 말한 적 있다. 상처를 모르는 인생은 없다. 누구도 훼손되지 않은 채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처가 누구에게나 평등하지 않은 건 그것의 의미가 시작할 때가 아닌 끝날 때 결정되기 때문이다. 누구나 상처 입으며 살아가지만 누군가는 상처로 자기만의 무늬를 만든다. 하나하나의 무늬에 그 사람의 고유함이 있고, 무엇보다 무늬는 회복의 증거이기도 하다. 서유미 작가가 동료 작가들과 그의 오래된 독자들로부터 신뢰받는 이유는 끝내 회복되는 인간에 대해 쓰기 때문이다. 주어진 환경 안에서 매번 최선의 선택을 하지는 못하지만 멈추어 서서 그때 그 시간을 바라볼 수 있는 인간. 상처받은 밤을 보내지만 새벽을 지나며 이 밤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인간. 서유미는 괜찮아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을 그린다.
■ 아직 못다 한 말
많은 소설들에서 말하기 시작한 여성이 그려진다. 억눌렸던 감정들이 솟아오르는 이야기들 사이에서 서유미 소설은 좀처럼 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침묵으로 덮여 있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지만, 그때의 순간은 대체로 침묵만큼이나 낮은 소리다.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가만한 응시’로 쓰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편편의 이야기들은 조용하지만 즈려밟는 눈빛으로 빠르게 삶의 통로를 지나가는 장면들을 캡쳐한다. 오래전 헤어진 연인과 이별하는 순간, 폭력적인 오빠와 결혼하는 여성을 향한 묵인에 대한 죄책감, 타인의 집을 구경하며 그들의 삶을 상상하는 순간…… “인간에 대한 애정과 온기”를 그리는 응시의 미학이다.
■ 괜찮아진다는 것의 의미
서유미 소설은 잘 읽힌다. 그러나 서유미 소설은 잘 읽히기에 앞서 잘 읽고 싶은 소설이고 잘 읽고 싶은 소설이기에 앞서 잘 있고 싶어지는 소설이기도 하다. 서유미의 이번 소설집을 읽는 동안 우리는 그의 인물들을 경유해 저마다의 방식으로 잘 있는 상태로 나아간다. 상황이 바뀌기 때문이 아니라 그때 그 상황을 통과해 온 과거의 자신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소설이 성장소설인 이유가 타인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과거와 화해할 수 있기 때문이라면 괜찮아지는 자신만의 길을 안내하는 이 작품들이야말로 온전한 성장소설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서문에서
소설 속 인물들이 자신이 속한 공간에서 그곳 너머 어딘가를 응시하는 장면을 좋아한다. 소설은 고통 속에서 가만히 응시하는 자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소설의 순간은 그 잠깐의 멈춤과 응시에서 발생한다고 믿는다. 그 바라봄을 통해 인물들은 못 보던 것을 보거나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안다고 여겼던 것들이 진짜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비밀을 알게 된 뒤 돌아서기도 하는 것이다. 그 바라보는 시선, 마음이 이야기가 되고 문장이 되는 순간을 좋아한다. (중략) 이 소설집 속의 인물들이 각자의 변화를 겪은 뒤에 어떤 장면에 도달하게 될지 알 수 없지만 그 밤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있다고 말해 주고 싶다. 그런 밤을 지나온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잠시나마 연대의 감각을 느끼고 작은 빛을 바라보며 애쓰고 있다는 격려를 주고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서유미
■추천의 말
우리의 삶은 이토록 비루할 수밖에 없는 걸까? 삶을 산다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지루한 장마 속을 우산도 없이 터덜터덜 홀로 걷는 일에 불과한 걸까? 다행스럽게도 나는 타인을 위해 용기를 내어 오래도록 감추어 왔던 진실을 마침내 말하기로 결심하는 인물, 고통을 받는 누군가가 “완전한 타인이고 자신과 상관없으면서 동시에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깨닫는 인물들을 이 책 속에서 만났고, 너무 쉽게 낙담하는 나의 마음속에도 희망이 깃드는 걸 느꼈다. -백수린(소설가)
■ 본문에서
날카롭고 화력이 센 말은 결혼을 부정하고 사랑을 저주하고 서로의 존재를 찢어 버렸다. 그렇게 한바탕 총탄을 갈겨 대고 나면 승자도 패자도 없이 기진해진 채로 주저앉아 피를 줄줄 흘렸다. 전쟁의 끝이 매번 그러했다는 걸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 남편이 문을 쾅 닫고 나가면 여자는 아이의 옆에 엎드려 울었다. 딸도 커서 엄마가 되는 순간 이 총체적인 고통에 직면하리라는 두려움 때문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거리」
민은 과거를 향해 열심히 노를 저었다. 정말 과거의 어느 날에 도착할 수 있다면 민과 재와 국은 어디에 닻을 내리고 싶을까. 같이 아르바이트하던 스물네 살 때를 떠올리면 나는 그들처럼 마음이 흐물거리면서도 여전히 마주 보기가 힘들었다. 그때 재미있었고 돌아가고 싶다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내 마음은 거기에 완벽하게 포개어지지 않았다. 단 하루가 마음의 모양을 변형시켰다.-「그 새벽을 지나는 일에 대해」
애인은 8시가 넘어 모텔에 도착했다. 치킨과 맥주가 든 비닐 봉투와 가방을 내려놓은 뒤 침대에 털썩 앉았다. 너무 힘들다. 애인은 앉았던 자세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그 말을 끝으로 둘 다 말없이 누워 있었다. 서로를 위해 기름을 예열하는 시간 같기도 하고 하루 종일 치킨을 튀겨 낸 기름을 식히는 시간 같기도 했다. 안은 애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텔레비전과 화장대, 의자와 탁자, 그 옆의 욕실, 최소한의 가구로 이루어진 공간을 바라보았다. -「그곳으로 가고 있어」
그 여자는 너를 닮았고 너 같다가 네가 확실해졌다. 대표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너를 다시 보는 건 30년 만이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예상하지 못한 마주침에 놀라고 의아해했을 테지만 어느새 삶에서 불쑥 튀어나오거나 자취를 감추는 우연의 모습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나이가 되었다. 그는 횡단보도 앞에 서서 피켓을 든 너를 잠시 바라보았다. 보행자 신호로 바뀌었을 때 사람들이 우르르 건너갔지만 그는 병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너는 거기 서 있고」
“그만 만나는 게 좋겠어.” 그만이라고 말하고 나자 눈물이 부풀어 올랐지만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은주는 몸 안에 생긴 물기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도 동여맬 줄 알았고 참는 일에 단련돼 있었다. 수화기 저편에서 민 팀장이 다시 은주 씨 하고 불렀고 그녀가 대답하지 않자 무언가 꿀꺽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노래하는 사람」
송은 목소리에 감정을 싣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한숨에 섞인 분노까지 감추지는 못했다. 이게 폭행 상해라 구속감인데 권이 합의를 안 해 주면 일이 복잡해질 거라고 했다. 송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권의 상태와 그녀가 받은 충격과 송의 분노와 자신의 처지와 임에 대해 생각했다. 각기 다른 자리에서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입장과 감정 속에서 길을 잃은 것 같았다. -「모르는 순간」
“오빠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나요?” 그 말에 인영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얼굴에 거미줄이 덕지덕지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인영이야말로 어느 것부터 어떤 것까지 얘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자 지난주보다 좀 더 진해진 나뭇잎들이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오빠 때문에 많이 힘든 거 알아요.” 송영로의 폭력성에 대해 입을 연다는 게 너무 어렵게 느껴졌다.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
내일은 원래 모르는 거야. 그렇지. 그건 알지. 지호가 내 손을 잡았다. 그 애의 얼굴 위에서 웃는 이모티콘이 빛났다. 나는 미래가 두려워. 나도 그래. 지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번에는 둘 다 웃지 않았다. 웃지 않아도 나란히 서 있으니 완전히 깜깜하지 않았다. 내일은 모르겠지만 이 밤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이 밤은 괜찮아, 내일은 모르겠지만」
서문 7
거리 15
그 새벽을 지나는 일에 대해 25
그곳으로 가고 있어 25
너는 거기 서 있고 71
노래하는 사람 105
모르는 순간 139
끝끝내 알 수 없는 것 177
우리가 말하지 않은 것 227
이 밤은 괜찮아, 내일은 모르겠지만 265
집으로 돌아가는 길 281
창 너머의 사람들 295
토요일 오후 5시의 행진곡 333
추천의 말_백수린(소설가) 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