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Vie de Henry Brulard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21년 9월 30일
ISBN: 978-89-374-6389-1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32x225 · 600쪽
가격: 16,000원
시리즈: 세계문학전집 389
분야 세계문학전집 389, 외국 문학
“나는 글을 썼고, 스스로를 위로했으며, 행복했다.”
『적과 흑』, 『파르마의 수도원』의 작가 스탕달
예술의 의미와 작가의 소명을 ‘자전 소설’로 묻다
*국내 최초 번역
▶ 예술은 삶의 광경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관을 표현하는 것이다. — 스탕달
▶ 나는 스탕달의 그 어떤 소설보다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를 사랑한다. — 앙드레 지드
1장 11
2장 30
3장 47
4장 58
5장 67 어린 시절의 자그마한 추억들
6장 93
7장 98
8장 110
9장 123
10장 140 뒤랑 선생
11장 155 아마르와 메를리노
12장 165 가르동의 편지
13장 178 레 제셸로의 첫 여행
14장 191 가엾은 랑베르의 죽음
15장 199
16장 210
17장 224
18장 231 첫 영성체
19장 235
20장 240
21장 254
22장 263 1793년 여름, 리옹 공략전
23장 269 중앙학교
24장 279
25장 295
26장 307
27장 319
28장 328
29장 340
30장 348
31장 359
32장 369
33장 385
34장 401
35장 411
36장 424 파리
37장 432
38장 444
39장 455
40장 466
41장 480
42장 495
43장 507
44장 520
45장 531 생-베르나르 고개
46장 540
47장 550 밀라노
작품 해설 557
작가 연보 580
프랑스 대혁명이 분출한 새로운 가치, 시대의 대변혁에 응답한 문학의 변혁
실존의 영역에서 글쓰기에로 전이되는 과정을 탐색한 스탕달 문학의 열쇠
스탕달의 생애를 집약한 자전 소설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가 국내 최초 번역되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9번으로 출간되었다. 『적과 흑』, 『파르마의 수도원』등 프랑스 사실주의 소설의 걸작을 남긴 스탕달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결정적 작품으로 폴 발레리나 앙드레 지드는 스탕달의 그 어떤 소설보다도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를 사랑한다고 말한 바 있다. “밀라노 사람. 쓰고, 사랑하고, 살다(Milanese. scrisse, amo, visse)”라는 묘비명으로 널리 알려진, 대문호 스탕달은 프랑스가 1789년 대혁명이라는 크나큰 전환기를 겪기 직전인 1783년에 태어나서 혁명의 격동기에 어린 시절과 청년기, 장년기를 보낸다. 모든 것이 뒤집히고 다시 뒤집히는 시대를 살았던 그를 평생 사로잡았던 큰 물음은 ‘나는 무엇인가?’였다.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는 것, 즉 자신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작가가 오십에 이르러 쓰기 시작했던 작품이 바로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이다. 다시 말해, 이 작품의 주제는 ‘자기 자신’이다. 물론 이 소설은 스탕달의 문학세계를 관통하는 특징들도 모두 품고 있다. 상상 세계와 실존 사이의 끊임없는 왕래, 중심 줄거리에서 벗어난 여담의 즐거움, 그리고 곳곳에서 작품의 특별한 자양이 되는 작가의 실제 경험들. 이것은 또한, 실존의 영역에서 글쓰기에로 옮겨지는 과정을 탐색하며 동시에 표현한 작품으로서 스탕달의 문학 사상과 모든 작품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텍스트이다.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는 1832년 10월 16일 자니콜로 언덕에서 로마의 폐허를 바라보며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화자의 자문으로 시작된다. 물론 화자 앙리 브륄라르는 작가 앙리 벨, 즉 스탕달이다. “나는 곧 쉰 살이 된다. 이제 나를 알게 될 때이다. 나는 무엇이었나? 나는 무엇인가? 사실 이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를 퍽 난감하게 만들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알도록(Norse te ipsum)’이라는 대전제는 이 소설의 화자가 젊을 때부터 지녔던 꿈이다. 그는 18세 때부터 일기를 쓴다. 얼마 안 가 하루하루의 이야기를 쓰는 것에 흥미를 잃고 그것을 중단한다. 하지만 자신을 안다는 대전제는 그 후로도 그를 떠나지 않는다. 그러다 오십 대에 들어선 화자는 자서전을 쓰기 시작하며 시간을 되돌린다. 그는 너무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18세기 계몽사상에 심취해 있는 의사인 가뇽 외할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며 외갓집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다. 독실한 가톨릭 신봉자이며 반공화주의자인 그의 부친은 가정 교사를 두고 그에게 교양을 쌓을 기회를 마련해 주었는데, 이 가정 교사에 대해서는 오직 끔찍한 추억만을 갖고 있다. 더불어 프랑스 대혁명 이후 일어난 여러 사건의 소용돌이도 어린 눈에 비쳤던 모습 그대로 서술된다. 총명한 그는 혁명 후 새로 생긴 에콜 상트랄에 들어가 과학 정신을 배우는 한편 명석한 논리를 익혀 평생 동안 거짓과 위선을 멀리할 수 있었다. 섬세한 한편, 지나치게 과민한 감성은 어릴 적부터 두드러진다. 서로 상치되는 성격의 혼재 속에서도 한결같았던 정열은 그를 평생 불행한 연인으로 살게 했다. 두뇌 회전은 빨랐으나 상대방의 허세에는 관대하지 못했던 그의 모습이 그의 성장 과정에 이미 엿보이기도 한다. 그는 늘 몽상에 빠져 있었으며 현실과 꿈의 괴리에서 뜻하지 않은 실수를 수없이 저지르곤 한다. 그는 자신의 기질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고향 그르노블에서 탈출하기 위해 수학 공부에 매달리고, 파리의 이공과 대학에 진학한다. 그곳에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의 휘하에 있는 다뤼를 알게 되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을 따라 이탈리아 밀라노로 가게 되는데, 거기에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곳에서 그는 행복이 무엇인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스탕달은 글쓰기를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끊임없이 오가는 대화로 정의했다.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의 서두에서 던진 질문, ‘나는 무엇이었으며,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발견해가는 과정이 그에게는 글쓰기의 본질이었다. 그는 자전적 작품을 쓰면서 자신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에 품었던 반항심의 원인, 그리고 속박이라고 여겼던 그르노블의 분위기, 파리에서 아름다운 여인들을 만나고 그들의 연인으로 살았던 뜨거운 열정, 혁명 직후 격동기의 혼돈 등이『앙리 브륄라르의 생애』에 담겨 있다. 그의 열렬한 공화주의 정신,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추억 같은 것, 다시 말해 공무원이자 예술가로 살았던 스탕달의 삶을 이루는 기억들이 모두 담긴 작품이 『앙리 브륄라르의 생애』이다. 그는 기억과 글쓰기를 통해 자신을 거듭 다시 만들어내고 있는데, 여기서 보이는 새로운 자전적 글쓰기는 작가 스탕달이 일생 끊임없이 문학의 소명을 모색한 결실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또한 그가 삶을 얼마나 깊고 강렬하게 살고자 했는지를 알려주는 한편, 그것의 기록을 매번 새롭게 시도함으로써, 삶의 지평을 확대하고자 했음을 보여준다.
『이탈리아 회화사』, 『미켈란젤로의 생애』,『로시니의 생애』 등 예술사와 비평을 다룬 저서도 집필했던 스탕달은 가장 이상적인 예술 양식으로 늘 음악을 꼽았다. 마치 작곡을 하듯 글을 쓰고자 했으며, 감각과 기억을 섞어주는 음악에 그의 글쓰기를 근접시키고자 했다. 과거의 행복한 순간을 환기할 때 찾아오는 즐거움은 하나의 그림, 한 곡의 음악을 감상하며 느끼는 감동과 같다고 생각했다. 스탕달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지각으로 알기보다는 감각으로 느끼기를 우선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가진 기억이란 모두 감수성의 기억일 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하고 유일한 진실은 객관적 사건의 인식이 아닌, 자아의 체험적 진실이었다. 체험이 곧 진실이었다. 체험적 진실을 환기시키는 감수성이 기억이었다. 감각적으로 환기되는 기억을 통해 되찾은 과거의 행복이 새로운 삶의 토대가 되어 준다고 믿었다. 이는 또한 그가 살고 있었던 시대의 흐름이기도 했다. 18세기 후반 루소에서 비롯된 전기 낭만주의 감성은 19세기까지 이어져 프랑스 낭만주의의 감수성은 문학운동의 큰 주류를 이루었다. 보편적 진리를 배경으로 한 전통적 가치는 과거의 것이 되고 새로운 가치의 창조에 대한 욕구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것은 또한 대혁명을 치르고 난 프랑스가 겪어야 하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대변혁의 정신적 표현으로서 문학이 이루어내야 할 대변혁이기도 했던 것이다. 스탕달은 자기 시대의 요구에 걸맞은 문학사상을 받아들여 그 시대의 흐름인 자아의 해방과 감수성의 표현에 토대를 둔 글쓰기를 하는 한편, 독자의 상상력을 크게 자극하는 특이하고 독창적인 기법을 통해 독자적인 자전적 소설의 한 원형을 제시했다.
* 이 책은 프랑스 갈리마르(Gallimard) 출판사에서 1973년 펴낸 Stendhal, Vie de Henry Brulard(Édition de Béatrice Didier, folio classique)를 저본으로 번역했으며, 스탕달이 직접 그린 원작의 삽화 가운데 20여 점을 선별 수록했다.
■ 본문 중에서
-1832년 10월 16일 아침나절에, 나는 로마 자니콜로 언덕 위 산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에 있었다. 햇살이 매우 아름다웠다. 거의 느껴지지 않는 시로코가 몇 조각의 작은 구름들 을 알바노산 위에 떠 있게 했다. 상쾌한 따스함이 대기를 지배했고, 나는 살아 있는 것이 행복했다. (11쪽)
-몰락한 후, 공부하는 사람, 저술가, 사랑에 푹 빠진 사람으로 1817년 『이탈리아 회화사』를 출판했다. 나의 아버지는 과격론자가 되었고, 파산했고, 내 기억으로는 1819년에 사망했 다. 나는 1821년 6월에 파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메틸드 때문에 절망에 빠졌다. 그녀는 세상을 떠났는데, 나는 부정(不貞)한 그녀보다는 죽어 버린 그녀를 더 사랑했다. (32쪽)
-내 삶의 평범한 상태는 음악과 그림을 사랑하는 불행한 연인의 상태였다. 다시 말해 그런 에술작품들을 즐기는 삶이지, 스스로 서툴게 그것을 해 보려고 시도하는 삶이 아니었다. 나는 섬세한 감수성으로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자 했다. 여행을 한 것은 오직 그 때문이다. 풍경은 내 영혼 위에 연주되는 바이올린의 활과 같았다. (34쪽)
-그가 나를 사랑하기란 무척 어려웠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내가 자기를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나는 필요할 때가 아니면 결코 그에게 말을 하지 않았 다. 내가 외할아버지에게 하는 질문, 그리고 그 사랑스러운 노인의 훌륭한 답변의 기초가 되는 모든 아름다운 문학적, 철학적 사상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마주하는 일이 무척 드물었다. 아버지를 뜻하는 그르노블을 떠나고 싶어 하는 나의 열망, 그리고 수학에 대한 정열, 나는 내가 몹시 싫어하며 아직도 싫어하는 그 도시에서 인간에 대해 배웠지만, 수학에 대한 정열이 그 도시를 떠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 1797년에서 1799년까지 나를 깊은 고독 속에 던져 버렸다. 그 이 년 동안, 그리고 1796년의 한동안 나는 마치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에서 일한 것처럼 공부를 했다. (100-101쪽)
-그러나 고백하건대, 우리 집안의 친구였던 레이 부주교 및 다른 신부들이 루이 16세의 운명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그의 죽음을 바라기에 충분했다. 아버지나 세라피 이모에게 들릴 위험이 없을 때 내가 부르곤 했던 노래의 구절 덕분에, 나는 필요할 때는 조국을 위해 죽는 것이 엄격한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밀 편지를 보내 그르네트 광장을 지나가는 모습을 내가 보곤 하던 훌륭한 연대 하나를 참살하려 한 그 배반자의 목숨이 도대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우리 가족과 나의 입장 차이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왔다. 흰 플란넬 천으로 된 프록코트를 입은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는 두 걸음이면 가는 역참(驛站)에 가기 위해 그 프록코트를 벗지 않았다. 아버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제 끝장이야. 그자들이 국왕을 암살해버렸어.” 나는 평생 느낀 중 가장 열렬한 즐거움에 사로잡혔다. 독자 여러분은 아마 내가 잔인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열 살 때나 쉰두 살인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148-149쪽)
-만약 1795년경에 내가 글을 쓴다는 나의 계획을 이야기했다면, 양식 있는 누군가가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을 것이다. “매일 두 시간씩 글을 쓰도록 해, 천재적 영감이 있건 없건 간에.” 그 말은 천재적 영감을 기다리느라 어리석게 낭비한 내 생애의 십 년을 내가 보람 있게 사용하도록 해 주었으리라. 나의 상상력은 압제자들이 나에게 하는 악한 짓을 예측하고 그들을 저주하는 데 쓰였다. (237쪽)
-가끔 기억이 떠오르면 조금씩 적어 놓는다. 나는 책 한 권 갖고 있지 않고, 어떤 책도 읽고 싶지 않다. 뢰브-베마르 씨라는 교활하고 무미건조한 사람의 이름이 붙은 얼빠진 연표에서 나는 거의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다. 마렝고 전투(1800년), 1809년의 전투, 모스크바 전투, 내가 사강(슐레지엔 보베르 강변의)에서 보급관으로 일했던 1813년의 전투에 대해서 마찬가지로 그럴 것이다. 나는 역사에 관해 쓴다는 자부심 같은 것은 조금도 없다. 그저 아주 단순하게 내 추억에 관해 쓰면서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알아내려고 한다. 바보인가 아니면 재치 있는 인간인가, 겁쟁이인가 아니면 용감한가 등등 말이다. 그것이 저 위대한 말 “너 자신을 알라.(Gnoti seauton.)”에 대한 답변인 것이다. (265~266쪽)
-사실, 연애는 나에게 항상 가장 큰일이었다. 아니, 유일한 일이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내 경쟁자를 친밀하게 바라보는 모습을 보는 것 말고는 그 무엇에도 결코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다. 나는 경쟁자에게 아주 약간 울화가 치밀 뿐이다. 이 친구 일이 잘 풀리는군, 하고 생각할 따름이다. 하지만 나의 고통은 끝이 없고 가슴을 에는 듯했다. 연인의 집 문가의 돌로 된 벤치에 주저앉아 버릴 정도로 말이다. 나는 성공을 거둔 경쟁자의 모든 것에 감탄한다.(밀라노의 아기솔라 궁전에서 기병대 소령 지보리와 마르탱 부인의 관계처럼.) 다른 어떤 슬픔도 나에게 그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304쪽)
-하지만 친애하는 독자여, 사실 나는 나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잘 모른다. 선량한지 고약스러운지, 재치가 있는지 바보인지 말이다. 내가 온전하게 아는 것은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 나에게 쾌락을 주는 것,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증오하는 것들이다. (347쪽)
-저녁에 그 일을 곰곰이 생각하며, 나는 놀라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뭐야! 이것밖에 안 되나?’라고 나는 생각했다. 조금 어리석은 이 놀라움의 외침은 평생 내게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상상력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실을 발견한 것은 다른 많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1836년인 지금 이 글을 쓰면서이다. 여담으로 말하는데, 나는 후회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주 이런 생각을 한다. ‘난 얼마나 좋은 기회들을 놓쳤는가! 난 부자가 되었을 테고, 적어도 편안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1836년인 지금 내가 깨닫는 것은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은 꿈꾸는 것이라는 점이다. (540쪽)
-나는 자기 그림의 한 모서리를 묘사할 용기를 잃은 화가와 같다. 그 화가는 다른 전체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자신이 묘사할 수 없는 것의 윤곽을 가능한 한 잘 잡아 소묘하는 것이다. 오, 냉정한 독자여, 나의 기억력을 용서해 주길. 그보다는 차라리 오십 페이지를 건너뛰고 읽어 주길. 다음은 삼십육 년이 흐른 뒤 그것을 몹시 망가뜨리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일의 개요이다. 앞으로 내가 오 년,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을 지독한 고통 속에 산다 하더라도, 나는 죽어가면서 ‘되풀이하지 않겠다.’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5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