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계영 시인의 첫 번째 에세이집
동물과 인간, 인간과 세계의 틈을 벌리는 시인의 시선
그 사이로 비로소 보이는 깊은 마음들, 시가 될 장면들
“우리는 나무들에게 배운 대로 주춤주춤 서로에게서 물러난다. 꼭대기의 수줍음처럼.
만지는 것 말고 다가가기. 마음에 마음 닿아 보기. 이것이 내가 두 팔을 활짝 벌려 포옹하는 방식.”
유계영 시인의 첫 번째 에세이집 『꼭대기의 수줍음』이 민음사 에세이 시리즈 ‘매일과 영원’으로 출간되었다. 2010년 데뷔한 유계영 시인은 이후 『온갖 것들의 낮』,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지금부터는 나의 입장』 등 네 권의 시집을 출간하며 슬픔 이후까지 시선을 뻗는 섬세한 시 세계를 구축해 왔다. 유계영 시인은 왜 자신은 큰일에는 무감한데 작고 사소한 일에는 항상 가슴이 요동치는 것인지 반복해서 되묻는 사람이다. 자신을 향한 질문으로부터 출발한 책 『꼭대기의 수줍음』에는 시인의 마음을 흔드는 마주침들이 가득하다. 이 만남들은 깊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냥 지나쳐 버리기 쉽다는 점에서는 작고 사소하지만, 한 사람 혹은 한 생명체를 이해하는 출발점이자 한 편의 시가 될지도 모를 장면들이라는 점에서는 결정적이고 특별하다. 책 제목 ‘꼭대기의 수줍음’은 높이 자란 나무들이 맨 아래의 식물들까지 빛을 볼 수 있도록 가지와 가지 사이에 틈을 벌리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나무들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유계영 시인의 시선을 닮았다. 큰 나무 사이로 스민 빛 덕분에 작은 풀들이 자라날 수 있듯, 시인의 시선은 삶의 작은 기척들이 한 편의 글로 쓰일 때까지 오래 살핀다. 『꼭대기의 수줍음』은 그렇게 완성된 글들의 첫 번째 화원이다.
■너무 가까워지면 납작해질 수 있습니다
더욱 많은 사람들과 더욱 긴밀히 연결되고 싶은가?
아니오.
-53쪽
『꼭대기의 수줍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유계영 시인은 항상 그들로부터 얼마간 떨어져 있다.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 자신이 “납작해진다”고 느껴서다. 시인은 의례적으로 주고받는 작별의 말들이 부담스러워 북적이는 술자리에서 말없이 빠져나와 집으로 간다. 시를 가르치는 학생들의 마음이 궁금할 때는 불쑥 질문을 건네는 대신 학생들의 물건들을 바라보며 왜 이 물건이 예쁘다고 생각했을지 그 고민을 짐작해 보는 쪽을 택한다. 카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가 테이블 밑의 강아지에게 손부터 뻗을 때에는 왜 만지고 싶으냐고 질문을 건넨다. 직접 만지지 않는 방식으로 당신에게 완전히 다가갈 수 있을까. 역설적인 말인 것도 같지만 대상과 거리를 두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관계가 있다. 멀어진 거리만큼 촘촘해진 헤아림이 나와 당신 사이를 보다 견고히 잇는다.
■무능, 쩔쩔맴, 쑥스러움의 가능성
인간이 정복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받을 때에나 나는 잠깐 희망적이다. 인간의 무능만이 좋다. 인간의 불가능성만이 세계의 가능성.
-41쪽
‘거리두기’의 미학을 잘 아는 시인이지만 그럼에도 시인이 가장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다. 시인은 “좋아하는 것이라곤 이제 거의 사람밖에 남지 않은” 듯 사람을 좋아한다. 대체 삶을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하는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주어진다면, 시인은 내가 그 방법을 잘 알고 있다며 단언하는 사람보다는 도무지 모르겠다며 오답만 내놓는 사람 쪽을 사랑한다. 자신의 무능을 마주하고 좌절하는 사람, 예상 밖의 일에 쩔쩔매는 사람,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탓에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뺀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오래 바라보고 그와 대화 나누는 법을, 시인은 잘 알고 있다. 시인 역시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삶의 방식에 정답 따위 있을 리가 없으므로 이들이 나누는 오답만이 삶의 무한한 방식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이다.
■시는 나의 완벽하게 너그러운 친구
시는 사람이 무한히 담기는, 주둥이가 한없이 넓은 사발. 언어를 질료로 삼음에도 언어라면 기필코 다 쏟아 버리고 사람만 남기는 희한한 골동 사발. 가끔은 사람 자체인 것처럼도 보이는.
-90쪽
시인이 ‘완벽하다’라는, 단언적인 표현을 쓰는 유일한 대상이 있다면 바로 ‘시’에 대해서다. 시는 시를 열렬히 사랑하는 이를 소외시키는 법이 없다는 점에서 완벽하게 너그럽다. 사랑했던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한다. 시인이 내심 좋아하고 귀여워하던 이마의 혹이 불편했던 친구가 어느 날 혹 제거 수술을 받은 일이나 오늘 시인의 방 창가에 찾아와 한참 동안 노래를 부르던 새가 내일은 찾아오지 않는 일처럼 한때 사랑을 쏟았던 일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때마다 섭섭해지는 마음을 아닌 척 감추는 일도 점점 익숙해진다. 하지만 시는 처음부터 “임시적”이다. 오늘 시였던 것이 내일은 시가 아닐 수도 있지만, 오늘은 시가 아니었던 것이 내일은 시가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시는 “주둥이가 한없이 넓은 사발”을 벌리며 무한한 사람을 품는다. 유계영 시인은 매일 새로운 눈과 귀를 열고 오늘의 시가 전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 시인의 일상과 시인이 쓰는 시가 계속되는 방식이다.
●영원을 담은 매일의 쓰기, 문학론 에세이 시리즈 ‘매일과 영원’
하루하루 지나가는 일상과, 시간을 넘어 오래 기록될 문학을 나란히 놓아 봅니다. 매일 묵묵히 쓰는 어떤 것, 그것은 시이고 소설이고 일기입니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무심히 지나가지만 그 속에서 집요하게 문학을 발견해 내는 작가들에 의해 우리 시대의 문학은 쓰이고 있으며, 그것들은 시간을 이기고 영원에 가깝게 살 것입니다. ‘매일과 영원’에 담기는 글들은 하루를 붙잡아 두는 일기이자 작가가 쓰는 그들 자신의 문학론입니다. 내밀하고 친밀한 방식으로 쓰인 이 에세이가, 일기장을 닮은 책이, 독자의 일상에 스미기를 바랍니다.
■본문 발췌
오늘 오전, 비둘기 세 마리가 맞은편 지붕 위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충격에 휩싸인 채 10분 정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살아 있는 무엇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기와를 장식하기 위한 조형물인 줄 알았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가 올 땐 이 많은 새들이 다 어디로 가지?
콧속이 얼어붙는 겨울밤에는 그 많은 고양이가 다 어디에 숨지?
늘 그런 게 궁금했다. 늘 그런 것만 궁금했다.
―「서문」에서, 9쪽
노인의 피부를 나무껍질 따위로 처음 비유한 사람은 틀림없이 제 할머니의 팔을 만져 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무심한 표현이 노인에 대한 관습적 인식을 낳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오늘의 충격은 그 자의 탓 때문이라기보다는 할머니의 팔을 만지자마자 즉시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데에 있다. 나는 할머니를 사랑한다. 살의 촉감이 촉촉하고 흐물거린다고 느낀 것이 아니라 아, 촉촉해! 아, 부드러워! 하고 마음속에서 곧바로 언어화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검진 결과가 좋아야만 한다. 작은 발을 쭉 뻗어 내게 내밀고는,
손녀 집에 놀러가려고 양말 신었지.
수줍게 웃는 나의 할머니.
―「지난여름의 일기」, 42~43쪽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넉넉하게 남아 있는 시간의 표면 위를 둥둥 떠가는 거야. 해초처럼 부드럽게. 내가 너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고 네가 나의 죽음을 지켜볼 수 있는 자리에서. 일하지 않고 일하며.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며. 그럴 수 있을까? 그런 삶의 형식을 우리가 발명할 수 있을까?
―「노동 없이 노동하며 사랑 없이 사랑하는」에서, 102쪽
한동안은 실종 사건 플롯에 사로잡혀 지냈다. 늘 여기 있던 사람이 여기 없게 되는 과정만큼 신비로운 드라마가 없었으니까.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고 생사를 확인할 수 없게 된 자의 삶이 울타리 너머에서 천연덕스럽게 이어지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묘한 공포심에 마음이 떨렸다. 실종을 다룬 영화와 소설을 열심히 찾아 읽었다. 전봇대에 붙여 둔 전단지들도 빠짐없이 읽었다. 갈색 푸들, 하얀 말티즈, 치매 노인, 청각장애를 가진 아들의 보청기를 찾는다는 전단지를 보았다.
―「흰 종이, 거의 검은 종이에 가까운 흰 종이」에서, 108~109쪽
반드시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말할 수 있는 데까지 말해 보겠다는 마음이 얼마나 거창하고 쑥스러운지 모르겠다. 평상시 떠들고 다니는 나의 말들이 대개 이렇게 무모하다 느낀다. 뻔뻔해지거나 용감해지는 것 말고는 이 문제를 돌파할 지혜가 없다. 그럼에도 앞선 이야기를 다시 한번 적어 보려 했던 이유는 별 게 아니다. 뻔뻔하지도 용감하지도 못한 내가 무모함을 무릅쓸 만큼 잊히지 않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스러운 빛이었다.
―「사랑스러운 빛」에서, 184쪽
■ 차례
서문 9
1부 밤마다 밤이 이어진다
검은 차창을 바라보는 중국인 꼬마 15
너 자신을 잡아당겨 보라, 끊어지기 직전의 고무줄처럼 21
밀어 올려도 굴러 떨어지는 거대한 돌 30
만일 바다도 산도 대도시도 싫어한다면 36
지난여름의 일기 40
2부 나는 미래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지 않지
안개 속에서 선명해지는 것 65
여행식물 72
얼마간은 이웃 79
백 년 후의 서점 86
노동 없이 노동하며 사랑 없이 사랑하는 93
3부 물결치는 너의 얼굴 보고 싶다
흰 종이, 거의 검은 종이에 가까운 흰 종이 105
뿔과 뿌리 111
특별한 등 116
점과 백 122
보고 싶어, 너의 파안 128
듣고 싶어, 속살거림 속살거림 132
닿고 싶어, 물처럼 넘쳐서 물처럼 흘러서 137
4부 나무의 잠이 궁금하다
이불을 털다가 주저앉아 꼼짝없이 143
봄에 꾼 꿈이 이듬해 다시 떠오르는 것 148
물그림이 마르는 동안 158
새벽 5시의 단편들 165
누구의 손입니까? 168
5부 천진난만하게 투명을 떠다니는 빛
사랑스러운 빛 177
새가 말을 건다면 대답할 수 있겠니? 185
백 년을 기다렸고 오늘 나는 죽는다 193
아침 인사 199
부록: 완벽하게 너그러운 나의 친구 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