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학의 시에 관해 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 초현실성을 거론해야 한다. 그의 은유는 ‘살아 내는 은유’다. 철저하게 삶이며 체험이다.- 문학평론가 황현산
그의 시는 욕망의 은폐를 모르고 욕망의 스크린을 모르고 욕망의 베일을 모른다. – 시인, 한양대 명예교수 이승훈
기타리스트도 키보디스트도 아닌 캔들리스트 정재학,촛불을 연주하는 초현실의 시인이 돌아왔다
첫 시집으로 박인환문학상을 받으며 한국 모더니즘 시의 선두 주자가 된 정재학의 두 번째 시집이 나왔다. 첫 시집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에서, 시인 허만하는 “참신성과 침착한 호소력”, “새로운 현실의 아름다움”을 읽었다. 이번 시집에서는 그 충격적인 신선함이 더욱 빛을 발하는 동시에 한층 정제되고 치밀한 면모를 보여, 시 세계의 강한 밀도를 느낄 수 있다. 문학평론가 황현산은 “창조적 발견의 알레고리”가 “정재학의 시론”을 “고스란히 지시”한다며 “더 깊은 현실을 보기에” 다다른 시인이라고 기대를 감추지 않았고, 시인 이승훈은 “언어, 상징계에 금을 긋고 구멍을 뚫”는 시인의 작업에 감탄하며 이 놀라운 작품들이 “오늘 우리 시단에 도착한 게 기쁘다.”고 환영의 뜻을 밝혔다. 시인 박정대도 “끊임없이 감각적”인 정재학의 시가 “황홀”한 “연주”라고 찬사를 보냈다. 언어의 질량뿐 아니라 시각적 질감까지 자유자재로 다루는 정재학의 시들은, 언어와 음악의 관계를 끈질기게 재구성한다. 그 실험은 젊음과 젊음의 모험이 무엇인가를 극대화하여 보여 준다. 새로움에 목말라 있는 독자라면 이 시집에서 한국 시의 미래를 듬뿍 맛볼 수 있을 것이다.
■ 물속에서 들리는 음악
이 시집을 관통하는 테마는 바로 음악이다. 킹 크림슨, 지미 헨드릭스, 로이 뷰캐넌, 시드 배릿 등 대가들을 향한 오마주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시인 스스로도 오로지 “순간 몸 전체가 두 귀 사이에 담겨 있는”(「시원(詩源)」) 느낌으로 시를 쓴다고 첫 시에서부터 밝히고 있다. “바다에 가라앉은 기타”의 “현에 다가가 은빛 비늘을 벗겨 내며 연주”하는 “갈치 한 마리”(「Edges of illusion Ⅶ」)의 강렬한 이미지는 다름 아닌 시인을 닮았다. 종이는 음을 담지 않고, 시에 담긴 노래는 “물속에서의 옹알이”(「수중 극단」)에 지나지 않아 “당신은 나와 다른 주파수를 가지고 있”음에(「섬망(譫妄)」) 좌절하면서도 끝내 음악을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시인의 숙명이다. “세상의 독을 다 마셔 버린 시바”가 수행을 위해 눈과 귀 중 하나를 가져가겠다고 말하자 바로 눈을 선택하는(「Edges of illusion Ⅴ」) 화자에게 망설임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다. 그래서 귀는 눈, 코, 입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몸 전체로 확대된다. 귀는 “철근 자르는 소리에서 나는 향기”를 느끼고(「토막 난 팬터마임」), 침을 흘리거나(「간이역이 여우비를 지날 때」) 심지어는 임신을 하기도 한다.(「어느 老의사의 조각난 거울」) 이렇게 편중된 감각은 이내 혼란을 가져와 “손톱 깎는 소리”가 너무 커서 쓰러지거나(「巨室의 한계 1」) 음악에 이끌려 살인자에게 다가서게 하고,(「예고편뿐인 드라마 「거대한 손목의 죽음」」) 예광탄처럼 터지는 연인의 속눈썹에 고막을 잃기까지에 이른다.(「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 그래서 물속이어야 한다. 가혹한 음악이, “높은음자리표와 다리에 털이 자란 음표”들이 “귀와 입술을 뜯어 먹”는 것을 막기 위하여(「微分 – 금기」) 듣지 못해야 들을 수 있다. 기타도 키보드도 아니고 물속에서 존재할 수 없는 악기, 촛불만을 연주한다. “기침이 그치지 않는 점액질의 아이들, 가슴에 칼집을 내어 아가미를 만들”듯이(「微分 – 길」) 처절하게 음악을 견뎌 낼 수밖에 없다. 받아들일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숙명에 대한 결의가 그대로 드러난 시의 제목은, 역시나 음악이다.
내가 미쳐 있던 건바람이 아니라 바람 소리였으니어디로든 가자
음표는 곳곳에 있지만부딪치는 것만이 소리를 낸다 -「微分 – 음악」전문
■ 작품 해설 중에서 정재학의 시에 관해 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 초현실성을 거론해야 한다. 사건에는 인과적 추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 없고, 있더라도 그것은 어떤 ‘뜻’으로 환치되려 하지 않는다. 현실의 불행을 인지하는 힘으로 자신의 욕망과 기획을 객관화하고 새로운 글쓰기의 비전을 엿보는 정재학에게, 초현실적 은유는 철저하게 삶이며 체험이다. 그는 시를 쓸 때 제가 알지 못하는 돌멩이와 물고기를 만났던 것이며, 우리가 그것들로 한 시인의 삶을 논리적으로 구성해 내는 것은 차후의 일일 뿐이다. 사실 초현실은 낯선 현실과의 만남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정재학의 초현실은 상상의 변덕이 아니라 어떤 논리적 결단을 그 한계에 이르기까지 밀어붙여 얻게 되는 시상(視像)에 바치는 이름이다. 주체가 자신을 혁명하여 이룩하는 빈 거울은 장애의 말이 절대적 소통으로 열리는 문인 동시에 현실이 초현실로 열리는 문이다. 그러나 혁명이 늘 상처를 그 기폭제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은 슬프다. 그것을 희망의 비극이라고 말하자니 안타깝고, 비극의 희망이라고 말하자니 시인의 고뇌를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 어설프다. 정재학의 시에서는 어떤 희망도 비극적 어조를 벗어 버리려 하지 않는다는 말만 덧붙여 두자. -황현산(문학평론가)
■ 추천의 말
정재학의 시는 욕망의 은폐를 모르고 욕망의 스크린을 모르고 욕망의 베일을 모른다. 말하자면 그에겐 아름다운 환상이나 서정이 없어, 오늘도 무얼 견디는지 모르는 몽롱한 자신의 눈을 바라볼 뿐이다. 욕망의 원인도 대상도 상실한 이런 소멸의 시학이 노리는 건 현실, 언어, 상징계에 금을 긋고 구멍을 뚫고 부재를 만드는 일. 이런 상징계 공격은 그의 경우 자학적 환상과 도착적 상상으로 나타난다. 얼굴에 돌이 박히고 신체 기관이 도착되는 것은, 그러니까 뺨이 손이 되고 눈이 입이 되고 혀가 눈이 되고 손가락이 귀가 되는 것은 실상 언어의 욕망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이런 도착의 세계가 바깥 세계와 싸울 때 현실, 법, 언어에 금이 간다. 그러므로 그가 노리는 것은 언어의 무력화이며 언어의 욕망을 중화시키는 것이다. 현실 속에 없는 것, 부재, 무를 만드는 이런 도착의 세계가 오늘 우리 시단에 도착한 게 기쁘다. ― 이승훈 (시인, 한양대 명예교수)
정재학의 시는 “당나귀 발타자르”의 걸음을 닮았다. 물에 잠긴 녹슨 기타와 수중에서 들려오는 음악이 단단한 울음의 벽을 뚫고 나오게 하기 위해, 그는 쏟아지는 세계의 눈발 속에서 고요히 자신만의 촛불을 연주한다. 아다지오보다 느리게 펼쳐지는 그의 오래된 기억들과 스타카토보다 자주 끊어지는 그의 “미래에 관한 기억들”은, 당나귀 발타자르처럼 이 세계에서 가장 고독한 걸음을 걷고 있다. 그런 까닭에 그의 시선은 물방울로 가득하며, 그가 바라보는 세계의 창문 밖으론 늘 “微分”된 눈발들이 하염없이 내려오고 있다. 그는 자신이 “기타리스트도 키보디스트도 아니었”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를 둘러싼 세계가 늘 수중 극단처럼 젖어 있었으므로,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항상 ‘캔들리스트’였던 것이다. 그의 “뺨이 만지는 것”, “눈이 맛보는 것”, “혀가 응시하는 것”, “손가락이 듣는 것”, “심장이 만나는 것”들은, 그도 모르게 끊임없이 감각적으로 그를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름 모를 촛불들이 그를 지켜 주던 시간 속에서 그는 여전히 ‘촛불의 연주자’였고 당나귀 발타자르와 함께 걸어서 당도한, 그만이 알고 있는 아스투리아스 마을의 조그만 선술집에서 촛불처럼 타오르며 그렇게 내면의 어둠을 황홀하게 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촛불 아래서 글을 쓰는 새벽, 그의 두 번째 시집을 덮으며 고요히 생각느니, 쏟아지는 세계의 눈발 속을 여전히 당나귀 발타자르와 함께 고독고독 걷고 있을 그에게 나는 문득 이 말이 하고 싶어진다. “시인아, ‘발타자르야, 이제 일은 그만 하고 놀아라.’” – 박정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