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들
시리즈 오늘의 젊은 작가 32 | 분야 오늘의 젊은 작가 32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거,
자기 책임이라는 걸 아예 안 만드는 거.
걔들도 관리자거든. 뭘 좀 아는.”
『누운 배』 『사랑의 이해』의 작가 이혁진 신작 장편소설
‘현실논리’와 ‘상황논리’가 만들어 내는 부조리의 생산과
부조리 위에서 민낯을 드러내는 인간군상의 실체
이혁진 장편소설 『관리자들』이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한겨례문학상 수상 장편소설 『누운배』와 후속작 『사랑의 이해』를 통해 회사로 대표되는 계급 사회와 그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들의 다층적 욕망을 그려 내며 개성적인 색채를 보여 준 이혁진 작가가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소설은 공사 현장에서 벌어지는 부조리한 상황과 상황 논리 앞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타협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인간 군상들의 면모다.
국도 옆으로 파 놓은 터에 관을 매립하는 일로 정신없는 인부들 사이, 좀처럼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한 남자의 이름은 선길이다. 현장에 적응하지 못하는 선길은 현장 최고 관리자의 의지에 따라 멧돼지 보초병이라는 불가해한 임무를 맡게 된다. 그러나 며칠 밤을 새워도 멧돼지는 보이지 않고, 멧돼지를 지키던 선길의 모습도 더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중 발생한 예기치 못한 사고는 여느 일터와 다를 바 없던 현장을 순식간에 갖은 병폐를 안고 있는 부조리한 무대로 탈바꿈시킨다.
무에서 유를 일구어 내는 공사 현장이자 누군가의 일상을 떠받치고 있는 삶의 현장인 동시에 은폐와 카르텔로 얼룩진 불의의 현장이기도 한 이곳은 도덕과 윤리가 고장난 죽음의 현장으로 기능하며 악순환이 반복되는 어둠의 장소가 된다. ‘관리’의 이름으로 행사되는 힘의 의지와 힘에 기생하는 작은 인간들의 타협은 현실을 점점 더 왜곡시키고 급기야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이어진다. 『관리자들』은 어느 공사 현장에서 벌어진 참사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는 ‘흔한 비극’이라는 점이 이 소설을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비참함이자 불의라 부르게 한다.
■ 흔한 빌런
빌런은 ‘악당’을 뜻하는 말이지만 ‘빌런’의 쓰임이 악당을 지칭하는 데만 사용되지는 않는다.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특이한 행동을 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빌런’이 쓰이기 때문이다. 『관리자들』에 등장하는 ‘관리자’들은 두 가지 의미에서 모두 빌런이다. 그들은 원칙과 질서보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중요한 그것을 위해 기꺼이 타인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위험에 빠진 타인을 외면한다. 그들은 또 타인을 조종할 수 있는 힘을 행사하는데, 그러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인하는 데 집착한다. 관리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조리는 흔한 빌런의 전형적인 부정이다. 『관리자들』이 불러낸 평범한 빌런이 또한 그들이다.
■ 작은 영웅
힘을 과시하고 힘이 있는 쪽에 붙어 힘의 조각이라도 묻혀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대쪽에는 미련할 만큼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오직 능력을 키우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일한 결과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포크레인 기사인 현경은 멧돼지 보초병으로 일하다 현장으로 발령받은 후 활기를 되찾아 가던 인부 선길을 안쓰러운 한편 뿌듯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오직 실력만을 믿는 현경에게 현장에서 벌어진 일은 충격으로 다가오고, 충격적인 상황에서 발견한 부조리한 사건들에 대한 확증이 그로 하여금 타인을 위해 행동하게 만든다. 그에게서 발현된 선의를 추동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관리자들』이 불러낸 평범한 영웅이 또한 그들이다.
■ 빌런과 영웅 사이
흔한 빌런과 작은 영웅 사이, 평범한 동조자들이자 무심한 목격자들이 있다. 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선택을 한다. 누군가는 비겁하다 할 것이고 누군가는 현실적이라 말할 선택들 앞에서 누군가는 실망하고 누군가는 안도한다. 『관리자들』은 끊임없이 독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냐고, 이런 상황 속에 놓인다면 당신은, 어느 곳에 서 있을 거냐고.『관리자들』은 조직 내부에서의 다양한 갈등 양상을 조각내 보여 주지만 그로써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끄떡도 하지 않는 저 높은 조직이다. 회사에서 일하는 개인에게 어떤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해도 회사는 상처 입지 않는다. 회사는 꿋꿋하고 꼿꼿하게 건재한 모습을 유지한다. 회사의 건재함을 위해 희생되는 것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힘없는 사람들이지만 가장 나중에 보이는 것은 비극이 지나간 자리,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거대한 조직이다. 관리자들의 관리자, 궁극의 관리자 그것 말이다.
■‘작가의 말’에서
소설의 말미에서 현경이 개의 얇고 따스한 뱃가죽을 만질 때 떠올린 것은 연약함이었다. 우리는 모두 그같이 얇고 따스하게, 희망이라는 단어처럼 연약하게 살아 있다. 이 이야기는 한편으로 그 연약함과 희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보전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연약함은 나약함에 불과한 것인지, 희망은 욕망에 그쳐야 하는지, 인간에게는 나약함과 욕망뿐인지.
■ 본문에서
관계가 대등하지 않으면 거래도 공정할 수 없다. 우위에 선 쪽은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반장도 알고 본인 역시 인부들에게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바라는 것이 있었고, 소장이 그 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에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반장은 뭐가 계속 찜찜하면서도 어쨌든 이야기는 됐다고, 한 다리 걸쳐 놓은 셈이라고 생각했다. 텔레비전에서 강사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나. 도움을 주는 것뿐 아니라 받는 것도 관계를 업그레이드하는 방식이라고. 그렇게 찜찜한 구석을 털어 내고 반장은 철제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반장은 몰랐다. 이 일로 소장이 자신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 (10쪽)
아내나 자신이나 서로 절박했지만 절박하기만 했다.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절박해지고 감정을 드러낼수록 그럴 여지도 여유도 없어졌다. 선길은 왜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냐며 날을 세웠고 아내는 왜 자신의 절박함을 이해하려 하지 않냐며 날을 세웠다. 이해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 한 것이었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시 언쟁이 시작되면 상황은 똑같아졌다. 절박하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천천히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 지쳐 있다는 것을 몰라 더욱 지쳐 가는 것, 그렇게 외따로 고립되어 가는 것. 이렇게 떨어져 지내게 되고서야 그것이 보였다. (27쪽)
“인마, 해줄 거 다 해주고 챙겨줄 거 다 챙겨주는 게, 그게 관리야? 그게 시중드는 거지, 관리야? 해줄 거 다 해주고 챙겨줄 거 다 챙겨줘야 일하겠다는 놈은 아무 일도 안 하겠다는 놈이야. 관리는 그런 놈들부터 제일 먼서 솎아 내는 게 관리고.” (45쪽)
“책임은 지는 게 아니야. 지우는 거지. 세상에 책임질 수 있는 일은 없거든. 어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멍청한 것들이나 어설프게 책임을 지네 마네, 그런 소릴 하는 거야. 그러면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자기 짐까지 떠넘기고 책임지라고 대가리부터 치켜들기나 하거든.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이 하는 게 다 그거야. 책임을 지는 게 아니라 지우는 거, 자기 책임이라는 걸 아예 안 만드는 거. 걔들도 관리자거든. 뭘 좀 아는.” (46~47쪽)
일 잘하는 초짜들은 정말 쓸모가 있었다. 반장이라 불러 주고 인부 몇 명 달아 주면 하나같이 이순신 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일들을 했다. 신에게는 아직 다섯 명의 인부가 있사옵니다! 현장에 자기들밖에 없는 것처럼, 소장의 기대에 보답하고 더 인정받고 싶어 안달들을 했다. 소장은 그런 초짜 반장들을 정말 좋아했다.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90쪽)
관리자들 7
작가의 말 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