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충류 심장

강정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21년 9월 3일 | ISBN 978-89-374-4484-5

패키지 반양장 · 신국판 152x225mm · 316쪽 | 가격 20,000원

책소개

시인은 파충류 심장을 가졌다!

 

시가 몸을 바꾸는 순간에 주목하며

행간의 숨결과 언어의 질감을 포착하는 강정의 독법

편집자 리뷰

강정 시인의 다섯 번째 에세이집이자 첫 비평집인 『파충류 심장』이 출간되었다. 여덟 번째 시집 『커다란 하양으로』와 함께 출간된 『파충류 심장』은 김소형, 김정환, 김혜순, 이성복, 이지아 등 22명 시인들의 시 세계를 강정만의 독법으로 그려 보인다. 거침없이 시의 구석구석을 뜯어보다가도 한걸음 물러나고, 위트 있게 돌아섰다가도 다시 진지하게 시를 논하는 강정 산문 특유의 리듬감 또한 느낄 수 있다.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 허은실 『나는 잠깐 설웁다』, 정영 『화류』 등의 시집에 대한 해설과 신경림 시인과의 인터뷰, ‘숲의 화가’로 알려진 변연미 작가의 작품에 대한 글을 엮었다.

총 22편의 글을 묶는 키워드는 ‘파충류’다. 강정에 따르면 시인은 ‘파충류의 심장’을 가졌다. “스스로 긁어 댄 상처를 스스로 떼어 내며 새살 돋기를 거듭”하는 변온과 변색의 동물, 파충류야말로 시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다변하는 시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며 언어의 육체적 울림을 느끼는 강정은 시의 가장 독창적인 해설자다. 『파충류 심장』을 읽는 일은 시가 가져다줄 변신의 순간에 나를 열어 놓는 일이자, 낯설지만 거침없고, 누구보다 자유로운 시를 써 온 강정의 시 세계에 다가서는 일이 될 것이다.

 

 

■ 에세이 혹은 해설

『파충류 심장』은 해설인 동시에 에세이, 즉 나에 대한 글이기도 하다. 강정은 시에 해설을 덧붙이는 일은 “시의 발생 지점을 밝히는 일”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시 속으로 독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바깥으로 시가 빠져나오는 걸 도와주는 일”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해설은 곧 강정 자신에게 시가 다가왔던 순간의 기록이기도 하다. 사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일은 겸연쩍다 하면서도 이 해설집에 손월언 시인의 첫인상(「사는 대로 사는 거지 뭐, 죽는 대로 죽는 거지 뭐」), 정영의 시집을 두고 세 계절을 지나 보냈던 시간(「거룩한 식인의 저녁」), 박형준의 시집을 읽다가 갑작스레 단편영화를 찍었던 하루의 기록(「숨은 빛: 단편영화 「푸르른 운석」 촬영기」)이 담겨 있는 건 그래서다. 그 사적인 순간들을 마주하면서 독자들은 시가 자신에게 다가왔던 순간을 다시 떠올리거나, 강정이라는 문을 통해 시의 또 다른 발생 지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시는 육체의 언어이자 언어의 육체

강정의 해설 혹은 에세이는 시를 명료한 틀로 정리해 주는 대신 시가 몸을 바꾸는 순간에 주목한다. 시의 언어는 상황과 감정, 주체와 대상이 달라질 때마다 독자적인 음색으로 다가온다. 행과 연은 언어가 감춘 말의 리듬감을 드러내고, 시어는 단어를 다른 질감으로 환기하며 새로운 촉감을 선사한다. 감추어진 언어의 숨결들을 확대해 보여 주는 강정의 해설을 따라 읽다 보면 시가 “육체의 언어이자 언어의 육체”라는 그의 정의를 실감할 수 있다. 일상적인 용법에서 벗어나는 언어의 쓰임과 울림을 찾는 일은 곧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강정은 규정에서 벗어나는 “측정할 수 없는 벗어남의 각도”야말로 “시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너지”라고 말한다. 『파충류 심장』은 그 벗어남을 부러 필요로 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시의 살결들을 매만지고 이미지의 그물을 엮어 마음의 그릇으로 빚어낼 줄 아는” 시의 독자를 위한 책이다.

 

■ 본문에서

 

시는 삶의 한 드러나지 않는 서랍 속에서 고요히 빛을 발하는 즉시 스스로 시들어 버린다. 특정 대상이나 사실의 일차적 표면만을 진실이라 외치는 언어와 일견 편협할 수도 있는 자기 신념에의 과한 확증으로 틀 짜 놓은 언술들로부터 시는 여러 각도로 부러 벗어난다. 어쩌면 측정할 수 없는 그 ‘벗어남의 각도’만이 시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너지일지 모른다.

‘파충류’는 그 가닥에서 얹어 본 종(種)에 관한 파벌적 언사일 따름이다. 정답도, 확신도 아니다. 스스로 긁어 댄 상처를 스스로 떼어 내며 새살 돋기를 거듭하는 이들. 그렇게 변온과 변색의 습성을 인간 본원의 도리인 양 체화한 이들의 슬픈 버릇을 통으로 일러 보고자 임의로 붙인 ‘말의 외부’일 뿐인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시인들의 시는 내게 그렇게 또 다른 외부로 작동하며 뒤통수를 쳤다. 시에 속았거나 시에 당했거나 시가 나를 일깨웠다는 뜻 모두를 담은 어사다.(11쪽)

 

시에 있어 ‘환상’이나 ‘혼돈’은 일상적 언어 체계와 대립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일상 속에 종속되거나 일상 자체의 평면성을 나타날 때조차 시의 언어는 언어 자체의 자율성에 따라 여러 방향, 여러 각도로 굴절되고 이지러진다. 거기에 정해진 질서나 기술적 원칙 따윈 없다. 언어는 비록 사회적 약속의 체계이자 어떤 필요 차원에서 큰 교집합 안에 포함되는 공공재이지만, 한 시인이 그 자신의 내적 리듬이나 사유의 흐름을 언술하고자 할 때, 그 공공 집합의 틀은 무시로 깨어진다.(22쪽)

 

미망과 싸우는 힘. 그리하여 스스로 미망이 되어 삶과 죽음의 모든 주석들을 떼어 내는 일. 어쩌면 그것은 시의 가장 요망한 희망일 수 있다. 세계는 그저 놓여 있고 흘러간다. “배가 움직이는 정지된 화면, 객선의 엔진 소리도 물 가르는 소리도, 갈매기 우는 소리도, 다 들리는데 무성인 영상”(「그리움의 정체」)인 채로 멎은 채로 멀어진다. 이 유동과 부동 사이에서 삶은 섬광과도 같이 내 것이었다가 다음 시대의 것이 된다. 나는 다시 극장에 앉는다. 스크린 위로 내가 흘러가고 스크린 바깥의 내가 “쓸쓸한 한 물체”가 되어 세계 밖의 전언들을 흘려 듣는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과 구름들과 갈매기들은 외로워 보인다”.(「극장」)(90쪽)

 

시의 행과 연은 언어가 숨 쉬는 양태, 언어가 감춘 말을 드러내는 미시적 리듬, 언어로 드러난 것들을 다른 질감으로 환기하는 숨결의 변주로 작용한다. 시가 육체의 언어이자 언어의 육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이 엄밀하고 막힘 없이 진행될 때, 시는 그 자체로 언어라는 한정된 새장을 열고 하늘을 향해 지저귀는 새의 속삭임이 된다. 그렇다면 그 새는 몸 안에 갇힌 말을 대신 속삭여 주는, 그리하여 마음의 울혈과 몸의 고통을 상쇄시켜 더 깊고 먼 곳의 울림을 전달하는 영혼의 대리자와도 같을 것이다. (108쪽)

 

얼굴의 일차적 문제는 “언제나 당신들만” 볼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러니 당자 입장에서 그건 “얼(정신)”은 “빠져나”가고 속은 텅 비어 버린, 스스로에겐 정확하게 들통나지 않는 시커먼 “굴”에 불과하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게 “완벽한 동체”인 나를 나 자신이 볼 수 없다는 사실. 연극의 존재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스스로 들여다볼 수 없는 자신의 “굴” 앞에서 타인이 그만의 얼굴을 달고 놀아나는 걸 목도하는 일은 자신에게서 탈각되어 버린 “얼”을 타인의 얼굴에서 발견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일방의 놀음이 아니라 상호적이다.

타인 역시 그 자신의 “얼”은 살필 수 없다. 그렇게 정리해 보면 “얼”이란 누구에게든 늘 타인의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누군가 내 앞에서 연극의 형식으로 표정을 갖지 않는다면 나는 나를 살필 수 없다. “얼이 빠져나간 굴” 속엔 온전한 내가 들어 있는 게 아니라 ‘그들’로 인해 생성된, 잃어버렸거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동체’의 잔영만 남아 있다. (125쪽)

 

내 생각에 시집 뒤를 채우는 일은 시에 주석을 다는 것이 아니라 시의 발생 지점을 밝히는 일이다. 다시 말해, 시 속으로 독자를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바깥으로 시가 빠져나오는 걸 도와주는 일이라는 소리다. 그럼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시집의 처음으로 되돌아가게끔 만들어야 한다. 이때 시집의 처음이란 굳이 시집의 첫머리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시집은 읽는 이에 따라 발화 지점이 천차만별이다. 때문에 시집의 처음은 보란 듯이 열어젖힌 대문에 있지 않고 사방으로 열려 있거나 닫혀 있는 창들 중에 있을 공산이 더 크다. (165쪽)

 

목차

들어가며 9

 

1부

춤춰라, 한 번도 걸어 보지 못한 것처럼! —이지아 『오트 쿠튀르』와 김정환 『소리 책력』에 대한 소고 15

꽃을 찾아, 안 들리는 방울 소리를 찾아 —김소형의 시 두 편28

죽음의 춤이거나, 우주적 발광이거나—김혜순의 시들 혹은 산문들 40

오, ‘마라’가 없었으면 없었을…… —이성복 『아, 입이 없는 것들』52

시의 절벽, 그 앞의 새하얀 손—김태형 『고백이라는 장르』 67

사는 대로 사는 거지 뭐, 죽는 대로 죽는 거지 뭐—손월언 『마르세유에서 기다린다』78

뱀을 삼킨 몸—허은실 『나는 잠깐 설웁다』 91

 

2부

갸륵한 독기 혹은 거룩한 천박의 지저귐—성동혁의 시들에 대한 소고 104

거룩한 식인의 저녁 —정영 『화류』112

누구인지 알아도 말할 수 없다—리산 『메르시, 이대로 계속 머물러 주세요』 126

나무의 잔기침, 혹은 손금 흐르는 소리—정지우 『정원사를 바로 아세요』 137

구렁이는 과연 자기 꼬리를 찾을 수 있을까—신동옥 『웃고 춤추고 여름하라』 148

불굴을 향한 마음의 불구, 또는 영혼의 빈 공간—김경주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161

많이 젖었어, 나를 부르지 마—김이듬의 시들 172

 

3부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 게바라 만세—박정대 『삶이라는 직업』 182

당신을 내려놓고 울어요, 다른 삶으로 가요—박정대 『체 게바라 만세』 195

숨은 빛: 단편영화 「푸르른 운석」 촬영기—박형준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207

진심의 괴물, 혹은 말의 누드—이이체 『인간이 버린 사랑』 224

인어의 연옥, 존재의 피안—함성호 『키르티무카』 236

별은 어디에서 왔을까—함성호의 시들 252

 

4부

막힌 혈을 뚫는 신명의 촉—신경림 『사진관집 이층』 266

배회하는 나무, 드러누운 하늘—변연미의 ‘숲’ 연작 285

 

나가며 305

작가 소개

강정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했다. 『그리고 나는 눈먼 자가 되었다』 『처형극장』 『키스』 『백치의 산수』 등 8권의 시집과 『그저 울 수 있을 때 울고 싶을 뿐이다』 『콤마, 씨』 등 5권의 산문집이 있다. 록 밴드 ‘엘리펀트 슬리브’의 리드 보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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