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긴장 너머에서
두텁게 열리는 커다란 하양의 세계
강정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커다란 하양으로』가 민음의 시 287번으로 출간되었다. 죽음을 통해 거듭 새로 태어나고, 우주의 파동과 이어진 몸속의 원초적 감각에 집중하며 나의 경계를 넘어서고자 했던 강정은 이번 시집에서도 죽음에 골몰한다. 하지만 『커다란 하양으로』에서 죽음의 현장은 총천연색의 감각적 세계도 어둠과 피의 세계도 아닌, 하얀 막을 씌운 듯 무채색이다. 일상에 현재로서 출몰하는 죽음은 무구하고 결백하게 놓여 있다. 삶을 결딴내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분투와 긴장 너머, 그곳이 바로 ‘커다란 하양’의 세계다. 모든 색의 결합이자 표백되고 삭제된 사라짐의 색이기도 한 흰색, 그 무채의 공간은 바로 백지처럼 “두텁게 열리는” 가능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 나는 지금 열렬히 죽은 채
나는 지금 죽어도 좋다
몸이라는 웅대한 거짓말이 숨통을 조여도
죽음 다음은 머리칼에서 풀려난 비녀처럼 뾰족하고 또렷할 것이니
그래서 나는 지금 열렬히 죽은 채 오 초마다 꼿꼿하다
―「오 초의 장식」에서
『커다란 하양으로』의 화자들은 죽음 앞에 담대하다. “나는 지금 죽어도 좋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죽음 이후 찾아올 ‘또렷함’에 대한 확신이 있어서다. 확신은 그가 “지금 열렬히 죽은 채” 살아 있는 데서 온다. 이 시집에서 죽음은 대수롭지 않은 듯 삶과 함께 놓여 있다. “입관 직전 벌떡 일어나 오늘의 안부를 적는 시체”(「생시의 입관(入棺)」)처럼, 죽은 자는 안부 전화를 걸기도 하고 돌연 살아 있는 얼굴로 나타나기도 한다. “온 세상을 삼키려 드는 죽음”(「커다란 하양으로」)의 긴장이 언뜻언뜻 드러나지만, 이 죽음은 삼켜진 채로, “살아 있는 오늘의 빛”에 감싸인 채로 존재한다.
산 자가 일상에서 죽음을 마주치고, 죽음에 예속된 자가 죽음을 대담하게 껴안는다는 불가능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산문 「무채」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길가의 고양이와 눈 마주친 화자는 문득 “내가 고양이를 본 게 아니라 고양이의 꿈속에 내가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이라는 확신을 느낀다. 고양이의 꿈속은 “현실보다 엄밀하고 또렷한 시공간”이다. 이 세계의 경험은 “죽는다고 해서 완전히 죽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나’를 벗어나 나를 바라보고, ‘죽음’ 바깥의 세상을 경험해 본 이는 이렇게 초연한 문장을 말할 수 있다. “나는 그저 떠도는 눈의 반사체들일 뿐/ 나 자신인 적 한 번도 없었다”(「눈물의 모서리」).
■ 하양의 자서전
생각이 지워지고
지워진 생각이 다시 글이 되고
글이 된 뜻이
전하려던 뜻을 전하지 않겠다는 체념이 되어
백지 뒤가 두텁게 열렸다
(……)
문을 열고 나가려다가 잠시
돌아본 자의 뒷모습이 평생 동안의 나였다
살아 있던 시간이,
모든 시간이 다 지난 다음 조립된
시간 스스로의 관이었던 거다
―「지우개로 지은 집」에서
나와 죽음을 넘어서, 화자는 ‘커다란 하양으로’ 향한다. 하양의 세계는 축적된 지식과 습성으로 구성되는 색채를 무화시킨다. 세상은 사람들이 이름 붙인 다채로운 색으로 구성되지만, 화자가 경험한 또 다른 시공간인 꿈속은 무채의 세계다. 흰색, 즉 빛의 총체인 동시에 표백과 박멸의 색인 하양에 주목한 문학평론가 박혜진은 작품해설 「하양의 자서전」에서 『커다란 하양으로』를 두고 “어떤 색도 빠져나가지 못하는 철의 그물망을 들고 세상을 관찰하는 한 무채론자가 색채에 두고 이루어 낸 전복적인 색상환이자 성공한 반란”이라고 말했다.
썼다 지우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백지의 가능성이 열리듯, 하양의 에너지는 세계와 나 사이의 경합과 전복, 부서짐과 깨어짐에서 나온다. 강정에게 시는 자신을 가둔 세계에 맞서 내 안의 세계를 항변하고 주장하는 도구이자, 그 주장을 스스로 파기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더 큰 침묵 속에서 더 하얀 절규로 어둠의 형태를 망각 또는 양각하기 위해”(「무채」) 시는 쓰인다. 나로 규정되고, 나를 통해 규정하고, 다시금 그것이 깨어지는 움직임 속에서 시는 “한때 작렬하다가 말라붙은 시간의 완고한 응결체”가 된다. 그 응결체로서 우리 앞에 놓인 『커다란 하양으로』를 ‘하양의 자서전’이자 시의 자서전이라 불러 보아도 좋을 것이다.
■ 본문에서
오래전,
물 위에 뜬 달을 건지러 들어갔다던 사내에게서 기별이 왔다
주취(酒醉)였더라도 눈만은 초롱처럼 맑아
다만 달의 입술을 열고 온 세상을 삼키려 드는 죽음의 내장을 씹어 보려 했을 뿐이었다고,
하얀 빛이 여직, 죽을 때까지 평평하다
나는 빛을 가득 끌어안으며 물속에서 물 바깥을 그린다
목탄 가루처럼 사라진 너의 윤곽 그대로
죽어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아 있는 오늘의 빛으로 만년살이 물방울 속에 새기는 거다
―「커다한 하양으로」 에서
해를 향해 달리다 해의 무한 반복체가 되고
색의 모든 면을 그리다 새카만 어둠이 되어
불빛이 칼날로 변하는 심장을 하늘에 투사하리
창 안에서
나는 오래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을 따라
스스로를 깨뜨린다
사방이 거울이고
내가 없는 거울들이
또 둥글게 부푼다
창밖에는
달 표면 빗금 그어진 틈 속에 유리관을 입에 물고 그림 그리는 아이
세 번째 생애가 와장창 깨진다
―「유리 전차」 에서
태어나 본 적도 없이 이미 죽은 그가 양팔을 벌려
빛 속에서 그늘 아래로 뛰어내리며 붉은 색 바람을 날리니
그림자 속에서 옷을 벗듯 빠져나온 건물들 사이엔
해의 분진을 핥으며 문득 사람의 말을 지껄이려는,
눈빛이 청색 유리처럼 으깨진
병든 개 한 마리
중음(中陰)의 사령은 늘 죽음 직전의 청명을 품었다
―「십자 그늘」에서
촛불 속 고요를 오래 짓씹다
오른쪽 귀가 출렁거리자
왼 어깨에서 바위가 솟는다
촤르르륵 바위에 비늘 돋는 소리
아무도 없지만 곁에서 누가 울고
네 번째 태양이 저물녘 유독 시끄럽다
망막 안팎으로 칠갑되어 도는 필름들
다섯 살 아이와 일흔 노인이 한 얼굴에서 싸운다
기억나지 않는 과거와
기억되어질 미래 사이에서
불 그림자로 부푸는 오늘의 심장
―「귓속, 파도의 침소」에서
문득, 내가 고양이를 본 게 아니라 고양이의 꿈속에 내가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 원시시대 동굴을 연상케 하는 고양이의 꿈속. 그 안에서 나는 고양이 입장에선 일절 관심도 없는 미미한 석순이나 돌멩이 같은 것이었고, 동시에 그것들의 그림자였어. 별안간 이 세계의 모든 구성 체계가 송두리째 드러나는 것만 같았지. 너무도 선연하고 확실했지만, 말로 풀어 쓰려니 도저히 묘사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현재의 눈꺼풀 안 속 깊이 내장된, 현실보다 엄밀하고 또렷한 시공간.
(……)
하얀 비명, 검은 절규, 그리고 침묵하는 자의 말을 향한 더 깊은 침묵의 조소.
시가 늘 그래 왔었지.
세계가 나를 가뒀듯, 내 속에 가둔 세계를 누구에게 덮어씌우고 항변하고 주장하기 위해. 그 주장을 스스로 파기하고 더 큰 침묵 속에서 더 하얀 절규로 어둠의 형태를 망각 또는 양각(陽刻)하기 위해.
―「무채」에서
어두운 동굴 속에서
백호 한 마리를 본 것 같았다
그곳이 동굴이 아니었을 것이거나,
백호는 그저 바윗덩이였을 것이거나,
어쨌거나, 울음소린 분명했다
―‘시인의 말’에서
■ 추천의 글
이제 우리는 강정의 시를 가리켜 무채의 언어라 할 수 있으며 무채가 그의 계통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어둠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는 것처럼 무채를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색이 있다. 너무 많은 색깔을 인식하기 위해 색채는 무채를 필요로 한다. 흰색을 잊고 흰색을 말하는 이 시집을, 흰색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흰색에 대해 말하는 이 시집을, 우리는 차라리 하양의 자서전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존재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살아갔다는 ‘이야기’라는 의미에서 자서전이며, 다른 모든 색과 모순적으로 공존하며 사라지는 동시에 나타나는 무질서와 교란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또한 자서전이다. 오랜 시간 동안 언어의 지층을 맡아 왔던 흰색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해방시켜 주었다는 점에서도 자서전이다. 자서전은 세상의 나를 나의 세상으로 전환하는 글쓰기다. “총합의 유령”을 장악하는 신비로운 힘이자 “모든 색의 결합”을 바라보는 너머의 시선. 우리는 『커다란 하양으로』를 가리켜 어떤 색도 빠져 나가지 못하는 철의 그물망을 들고 세상을 관찰하는 한 무채론자가 색채에 대고 이루어 낸 전복적인 색상환이자 성공한 반란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박혜진(문학평론가)
1부
왼손 미사 15
오 초의 장식 17
죽음의 빛의 19
생시의 입관(入棺) 22
돼지 떼가 몰고 온 상여 24
수평선 너머 27
커다란 하양으로 30
우는 거미 32
달의 독무(獨舞) 34
한겨울, 바다의 분진 36
2부
러닝 타임 41
보라 선 45
진화론 48
살의 파도 ― 박병천 ‘살풀이’ 모창 50
뱀을 만난 길 ― J에게 52
유리 전차 55
마주 선 창백 58
해 끝으로의 산행 61
십자 그늘 63
눈물의 모서리 65
3부
군청(群靑) 바깥으로 69
학의 평범한 자태 71
왼발의 구도 73
전태일 기념관 76
짓눌린 날개 78
배우 80
인형의 화엄(華嚴) 84
집 속의 집 86
모차르트 비린내 92
해 지는 정음(正音) 95
4부
찢긴 막 99
E-D-Am-E 101
귓속, 파도의 침소 104
까마귀 따라 107
야금(冶金)된 여명 110
귀에 걸린 애련 112
안녕, 비둘기 114
지우개로 지은 집 116
그림자 교회 118
아침의 굴과 골 121
5부
무채 125
작품 해설–박혜진(문학평론가)
하양의 자서전 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