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오정국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21년 7월 14일 | ISBN 978-89-374-0906-6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4x210 · 156쪽 | 가격 10,000원

책소개

고통이라는 피안,
외지의 밤을 걷는 고행자의 기도

편집자 리뷰

오정국 시인의 신작 시집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가 민음의 시 286번으로 출간되었다. 가볍고 투명한 물에 대비해 아래로 무겁게 가라앉는 진흙의 이미지에서 실존의 형상을 구하려 했던 『파묻힌 얼굴』(2011)과 세계와의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으나 맹목을 통해 생존 본능을 찾아보고자 했던 『눈먼 자의 동쪽』(2016) 이후 5년 만에 선보이는 시집이다. 이번 시집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는 삶의 역동성 다음에 찾아오는 존재의 텅 빈 상태인 ‘허무’를 재의 이미지로 형상화해 영원에 도달하려 한다.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의 처음과 끝에는 두 개의 사막이 펼쳐져 있다. 오이디푸스가 울부짖고 있는 붉은 사막과 고행자가 묵묵히 걷고 있는 빛바랜 사막이 그것이다. 스스로의 눈을 찌를 정도로 자신의 운명에 괴로워하는 자와 운명의 고통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묵묵히 사막을 걷는 자, 운명에 대해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두 인물의 모습은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에서 한 사람의 생인 듯 하나로 꿰어진다.

시인은 철 가면을 손에 든 오이디푸스가 아닌, 하얀 재로 뒤덮인 고행자의 얼굴이 바로 ‘나의 얼굴’이라고 말한다. 현실과 이상이라는 낙차, 황폐한 도시와 돌아갈 수 없는 자연 사이의 공백, 그곳에서 배회하는 실존적 자아에 오랜 시력을 다해 골몰해 온 시인의 변화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시인은 이제 자신의 얼굴을 하얗게 뒤덮은 재가 수많은 이들의 기도와 눈물이라는 것을 알고 받아들인다. 그들의 기도를 함께 읊조리며 평화와 고요의 세계를 찾는다. 영원히 머물 순 없지만, 잠시나마 영혼이 짊어진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는 피안을 말이다.

 


 

 

■ 스크린 너머의 죽음

텔레비전에선 사막이 흘러간다

선글라스를 쓴 미라가 발견될지도 모를 일,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다큐멘터리에 불과하다는 듯, 낙타 발자국이

그를 두고 흘러간다

―「1인용 식탁」에서

 

오정국의 시는 ‘저 멀리’에서 몰려오는 감각으로부터 촉발된다. 그 감각은 안과 밖을 가르는 두터운 경계를 가뿐히 넘어서 몰려드는데, 이러한 바깥이 재현되는 무대는 주로 텔레비전이다.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에서 텔레비전은 붉은 사막의 오이디푸스 왕을, 치정 살인극을, 4월의 바다 한가운데서 일어난 참사를,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를 보여 준다.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무수히 반복해 재현한다. 텔레비전은 지금도 무수히 많은 참사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려 주는데, 이곳에서 오직 시청할 뿐인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텔레비전은 내가 감지할 수 있는 세계를 점점 넓혀 가는데, 그 속에 존재하는 나는 하염없이 작아진다. 작아진 나의 존재만큼 감각도 무뎌진다. 시인은 이렇게 비극에 무뎌져 가는 감각을 체념하듯 말하면서도, 시시때때로 자신을 엄습하는 멀고 먼 시공간에서의 슬픔과 공포를 생생히 느낀다. 슬픔과 공포 그리고 체념, 그 사이에 시인이 평생을 찾아 헤맨 실존적 자아가 떠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존재의 의미를 구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시인은 그가 목격한 고통에 뛰어들고자 한다. “발밑의 싱크홀이, 바다를 떠도는 빙하가, 열대우림의 불길이, 내륙을 뒤덮는 쓰나미가”(「너는 아직 우리들 가운데」) 바로 지금 여기 한가운데 있다고 말하며, 모든 비극을 우리 발아래에서 감각하게 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 감각, 타인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의 감각에 있다고 말하듯이 말이다.

 


 

 

 

■ 외지를 걷는 고행자

나는 나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허구와 허구가 뒤섞이고, 스토리와 스토리가 엉키듯

당도한 곳, 이곳이 외지다

―「먼눈으론 알아볼 수 없었던」에서

 

세상을 가득 채운 비극적인 사건들을 제 것처럼 끌어안던 시인은 먼 길을 떠나 자연 속으로 들어간다. 자연 깊은 곳에서 자신의 슬픔을 돌아보고 위로를 받은 시인은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본다. 인간의 세속적 고통을 넘어 자연의 신비를 지나, 이제 근원에 도달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이 갈 수 있는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근원, 절대자와 만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일까? 시인은 ‘기도’로 그 장소에 가닿고자 한다. 지도상 어디에도 표시하지 못할 그곳, 오직 기도만으로 잠시 닿을 수 있는 그 장소를 시인은 ‘외지’라고 부른다.

이찬 평론가는 이렇게 기도하는 시인의 모습이 특정 교리의 종교적 맥락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며, “오히려 어떤 보편적 차원의 영성 세계가 구체적 인간 실존에 드리우는” 존재론적 지혜를 생생히 채록하려는 시도라고 본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승과 저승의 세계를 잇는 “구술 역사가”가 된다.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붉은 사막으로부터 시작해 먼 길을 떠나온 시인은 하얗게 빛바랜 사막을 고행하듯 걷는다. 그 외지에서 시인은 세속의 세계에서는 절대 닿지 못할 먼 곳에 있던 타인들, 수동적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던 타인의 고통을 떠올린다. 재를 잔뜩 묻힌 얼굴로 그들이 읊조린 기도를 함께 읊조린다. 그렇게 시인은 “나의 현생이/ 당신의 현생을 생각하는 밤”(「영명축일」)을 걷는다. 우리 모두의 평화로운 밤을 빈다.

 

내가 만진 죽음 헤아릴 수 없고

나는 전생과 후생을 넘나드는

이야기꾼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죽음의 불사신이

저의 괴로움을 나에게 덧씌워

기담과 괴담, 로맨스가 끝이 없네요

―「영구결번의 밤은 없다」에서

 

저만큼 흘러가서 얼어붙는 물이 있다

날씨도 그렇지만

오늘에 와서야 오늘이 분명해지듯

횡단보도 건너편에 신호등이 서 있다

―「밤의 횡단보도」에서

 

금요일의 묘지가 불타고 있어

언제 어디서든 단 한 번의 춤이야, 그러니까 장미의 입술을 너에게 보내고, 구름과 바람과 태양의 날씨를 여기에 담는 거야, 택배 잘 받아

―「어디선가 네가 이 순간을」에서

 

나는 재의 얼굴로

나를 지나간다

눈구멍을 움막처럼 열어 둔 채

벙거지 하나 걸치고

매일매일 딴 세상으로 떨어지는 태양을 애도하면서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에서

 


 

그는 제 삶을 에두르고 있는 무수한 사물에서 가시적인 실체나 현존하는 사용 가치를 보거나 찾으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저 사물들에 어떤 흔적처럼 남겨진 뭇 인간 군상의 구체적 실존의 감각, 나아가 저 실존적 시간의 깊이를 고스란히 되살려 생생하게 불타오르는 현재성으로 재구성하려 한다. 따라서 오정국의 시가 이른바 회감이란 말로 표상되는, 서정 장르의 예술적 특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진술은 지극히 타당한 것이겠지만, 그야말로 섬세하고 예리하게 그것의 정수를 꿰뚫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 그것으로는 환원되지 않는 어떤 독특한 미감의 여울목, 곧 ‘아우라의 흔적’과 ‘흔적의 미학’을 동시에 불러오기 때문이리라.

―이찬(문학평론가)┃작품 해설에서

목차

1부

붉은 사막 로케이션 13

청동 흉상 15

1인용 식탁 16

밤의 트랙 18

로드킬, 로드 맵 20

침묵의 도서관 22

미술관 수업 24

서랍들 26

길바닥에 떨어진 밧줄이거나 28

본문은 짧고 각주는 길고 30

연극배우 시절의 배역들 32

영구결번의 밤은 없다 34

나는 언제나 다리 위에서 36

나는 오늘도 다리 밑에서 38

그 물길 건널 때 40

너는 아직 우리들 가운데 42

밤은, 팬데믹의 밤은 44

밤의 횡단보도 46

어디선가 네가 이 순간을 48

 

2부

그곳이 어딘들 53

어스름의 독서가 나는 좋다 55

물의 언더그라운드 58

숲에서 나오는 산길을 60

여름 강 62

나에게도 해바라기가 64

오제를 다녀와서 66

밤의 소년은 나에게 68

귀향 70

두문포 72

큰끝등대 74

뱃머리를 앞세워 좌우를 거느리고 75

해안 참호 76

그해 여름 배롱꽃을 78

슬픔의 자매들 80

꿈속에서 꿈 밖을 내다보듯 82

고통에 대한 증언 83

어떤 고통에 대한 기록 84

 

3부

북대(北臺) 89

얼음 물고기 90

산막(山幕) 92

불망(不忘) 93

일곱 번째 캐릭터 94

송년(送年) 96

먼눈으론 알아볼 수 없었던 ― 외지(外地)·1 98

얼굴에 분칠하고 고개 드는 꽃들에게 ― 외지(外地)·2 100

추락을 견디면서 몸을 불태우듯 ― 외지(外地)·3 101

외지(外地) 102

전세살이 칸칸마다 106

재의 얼굴을 노래하다 108

육체의 짐을 내려놓을 때까지 110

영명축일 112

침묵 피정 114

돌같이 차고 헐벗은 116

청동 입상 118

두 손을 사막에 파묻고 120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122

 

작품 해설–이찬(문학평론가)

아우라의 흔적들, 구술 역사가의 알레고리 125

작가 소개

오정국

1956년 경북 영양에서 태어났다. 198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 『저녁이면 블랙홀 속으로』 『모래무덤』 『내가 밀어낸 물결』 『멀리서 오는 것들』 『파묻힌 얼굴』 『눈먼 자의 동쪽』, 시론집 『현대시 창작시론 : 보들레르에서 네루다까지』 『야생의 시학』이 있다. 지훈문학상, 이형기문학상, 경북예술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한서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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