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항하는 인간
원제 LʼHomme Révolté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21년 6월 18일 | ISBN 978-89-374-6383-9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32x225 · 640쪽 | 가격 16,000원
시리즈 세계문학전집 383 | 분야 세계문학전집 383, 외국 문학
수상/추천: 노벨문학상
프랑스 문단에 이방인처럼 나타나 신화가 된 작가,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와 더불어 카뮈의 철학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저작
“마침내 한 인간이 탄생하는 이 시간, 시대와 시대의 열광을
청춘의 모습 그대로 남겨 두어야 한다.”
▶ 카뮈는 신화가 되었다. 그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는 이제 별 의미가 없다. ―롤랑 바르트
▶ 중요한 것은 눈앞의 세계가 곧 현실이기에,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아는 일이다.
―알베르 카뮈
■ 카뮈의 『페스트』를 ‘알려면’ 반드시 이 책을 읽어야 한다
폭력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하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에게는 『이방인』과 『페스트』의 작가로 알려져 있는 프랑스 최고의 소설가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알베르 카뮈. 카뮈는 소설뿐 아니라 수많은 희곡과 정치 칼럼을 남겼으며, 사상과 미학을 이해할 수 있는 다수의 에세이를 남겼다. 카뮈의 산문들은 윤리적, 철학적, 정치적 사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면서도 역사적 현실을 결코 추상화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직시하고 관찰한다. 따라서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에 담긴 성찰의 목소리를 충분히 ‘알기’ 위해서는 그의 이론서 또한 읽어야 한다. 『시지프 신화』와 함께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카뮈의 철학적 문제작 『반항하는 인간』이 프랑스 문학 최고의 번역가인 김화영의 번역으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3번으로 출간되었다. 이번에 출간된 세계문학전집판은 김화영 역자가 2003년 카뮈 전집판에 편입한 저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개역했고, 신판의 텍스트를 면밀히 대조 참고하여 카뮈 자신이 붙인 원주와 별도로 상세한 주석을 다수 추가하였다.
2차 세계 대전의 결말을 예측할 수 없었던 1942년부터 구상하기 시작한 이 책에서 카뮈는 개인적 차원의 부조리에서 시작해 집단의 반항으로까지 그 차원을 끌고 간다. 카뮈는 이 책에서 카인의 후예들, 즉 사드, 니체, 도스토옙스키, 랭보, 로트레아몽 등 부조리를 인식하고 반항을 극단으로 몰고 간 문제적 개인을 먼저 성찰하고, 반항이란 무엇이며 그 반항 속에 내포된 원초적 정신으로부터 초래된 결과가 무엇인지를 반성한다. 이어 히틀러의 독일 나치즘과 스탈린의 러시아 공산주의가 초래한 극단적 반항과 테러를 상기시키며 ‘역사가 지배하는 시대에 우리는 과연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폭력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윤리적 질문을 던지고 이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 카뮈의 대답은 명확하다. 첫째, 폭력은 불가피한 것인 동시에 정당화할 수 없다. 둘째, 정의와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서는 ‘한계’가 불가피하다. 셋째, 폭력적인 행동이 가져야 할 ‘예외’로서의 성격을 줄기차게, 그리고 명백히 밝혀야 한다.
■ 카뮈를 이해하는 세 가지 코드; 부조리, 반항, 사랑
카뮈는 일찍부터 자신의 작품의 커다란 윤곽을 수첩에 다음과 같이 적어 두었다.
1. 거부(부조리); 이방인, 칼리굴라, 오해, 시지프 신화-방법론적 회의.
2. 긍정(반항); 페스트, 정의의 사람들, 계엄령, 반항하는 인간
3. 사랑: 지금 계획 중, 집필 중.
카뮈의 젊은 시절은 반항으로 점철된다. 공산당 가입, 교사직 거부, 글쓰기와 창조, 프랑스 북아프리카 노동자들이 감수하는 불의와 카빌리 주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에 대한 항의, 검열, 전쟁의 시인에 대한 항의. 이 모두가 여러 차원의 반항이었다. 카뮈의 반항은 글쓰기로 이어지고 그의 문제작들에 낱낱이 문학적으로 재현된다. 시인인 케레아는 전제 군주가 된 칼리굴라를 살해한다. 허무의 벼랑까지 밀고 올라간 시시포스와 뫼르소는 자살을 권유하는 치명적 논리를 거부하며 집요한 열정과 호기심, 모험심으로 삶, 혹은 죽음을 스스로 결정한다. 부조리를 목도하지 않은 개인의 반항은 이제 우리를 향해 나아간다. 정의로운 사람들은 독재자를 몰아내기 위해 힘을 모으며, 테러리즘이라는 페스트에 저항하는 타루는 의인들과 함께하다 결국 페스트가 물러나는 시점에 페스트에 걸려 죽는다. 살인의 정당화를 거부하는, 반항과 폭력에 관한 진정한 연구서인 『반항하는 인간』의 서론에서 카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요한 것은 사물의 근본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천착하는 일이 아니라, 그보다는 눈앞의 세계가 곧 현실이기에, 먼저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아는 일이다.”(본문 15쪽)
카뮈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즉 윤리의 문제다. 그래서 이 책의 주제는 반항론이라는 추상적 개념이기 이전에, 살아 있는 인간과 구체적 삶에 관한 성찰인 ‘반항하는 인간’임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이어 카뮈는 이 책이 앞서 쓴 글들의 연장임을 밝힌다. “이 시론에서 우리는 앞서 자살과 부조리의 개념을 중심으로 시작했던 하나의 성찰을, 살인과 반항의 문제를 앞에 놓고, 이어가 보고자 하는 것이다.” 카뮈가 앞서 자살과 부조리의 개념을 중심으로 시작했던 하나의 성찰은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이며, 이어가 보려는 반항의 문제는 『페스트』와 『반항하는 인간』에 녹아들어 있다. 카뮈에게 부조리와 반항은 동시적이다. 그가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순간 부조리의 감정은 태어난다. 그러나 동시에 삶의 무의미에 항의하는 반항도 태어난다. 『이방인』과 『시지프 신화』에서는 부조리한 감정, 이 헐벗음과 몰이해, 고독 속에서 우리는 왜 계속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싸운다. 이어 『페스트』와 『반항하는 인간』에서는 질문하는 개인에서 나아가 집단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니다(non), 우리는 존재한다’라고.
“반항은 모든 인간들 위에 최초의 가치를 정립시키는 공통적 토대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본문 47쪽)
■ 프랑스 지성 간의 대결, ‘카뮈-사르트르 논쟁’의 불씨가 된 책
역사는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 주었는가
카뮈는 반항에 대한 치열한 성찰에서 얻는 교훈들, 즉 한계와 절도의 철학을 통해 이제 절대적 부정의 시대는 추월당했다는 것, 그리하여 허무주의를 초극하는 하나의 지난하고 까다로운 길이 열린다고 믿었다. 카뮈는 이 책에서 이 문제를 지적했고, 당시 공산주의 세계관에 경도된 파리 좌파의 신 혹은 영웅들인 헤겔과 마르크스, 세계 혁명의 지도자인 레닌과 스탈린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그 결과 『반항하는 인간』은 출간 즉시 도처에서 찬사와 토론과 비판과 쓰라린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카뮈-사르트르 논쟁’이다. 책이 출간되자 사르트르 등이 주도한 《레탕모데른》에 프랑시스 장송이 카뮈를 향해 ‘역사에서 도피함으로써 혁명을 불가능하게 하고 적십자식 윤리를 설교한다’라며 잔혹한 서평을 실었고, 이에 카뮈는 장송이 아니라 잡지 편집자인 사르트르에게 보내는 반론을 발표했다. 자신이 표적임을 인식한 사르트르 역시 가만있지 않고 사납게 응수해 두 사람은 결국 사상적 대립으로 인해 갈라지게 된다.
카뮈의 반항은 마르크스주의나 전체주의와 같이 테러리즘을 옹호하거나 절대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세상의 불행에 또 다른 불행을 추가하지 않고, 어떤 한계를 존중한다. 반항과 폭력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으며, 인류의 존엄과 정의를 지키기 위하는 예외적 상황에서만 거세게 반항한다. 그 어떤 대의도 무고한 사람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으며, 개인이나 한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의로움을 위해 함께 연대하자고 카뮈는 호소한다.
반항의 가장 순수한 충동은 이리하여, 만일 인간들 모두가 다 구원되지 못한다면 단 한 사람의 구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카라마조프의 비통한 외침으로 귀결된다. (본문 523-524쪽)
역사는 과연 누구의 손을 들어 주었을까. 우리는 카뮈가 얼마나 앞질러 세계 질서의 진정한 흐름을 꿰뚫어 보았는지를 알 수 있다. 카뮈의 이정은 사랑에 관한 글도 쓰지 못한 채 1960년 1월 4일 정지되었다. 카뮈는 독립된 알제리를 보지 못했다. 카뮈는 현재의 상황을, 그리고 현재의 세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우리가 그를 대신해 대답할 수는 없지만 카뮈의 사상과 생각은 테러리즘에 대한 성찰에 도움을 준다. 카뮈의 말이 마침내 사람들을 진정시켜서 폭력을 가하고 또 폭력을 당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어지는 날을 환상처럼 그려 볼 날은 언제일까. 감당할 수 없는 테러리즘의 악순환 속에서도 『반항하는 인간』에서 카뮈가 말하려는 몇 가지 윤리는 현실 판단에 도움을 줄 것이다. 폭력은 불가피한 것일지라도 정당화될 수 없음을, 반항과 폭력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어야 하며, 폭력과 테러는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임을. 진정한 반항은 폭력에 대한 부정이자 가치에 대한 긍정임을. 이 두 극이 팽팽하게 당기는 활에 의해 우리의 정오의 사상과 행복은 멀리, 높이 솟아오를 수 있음을.
일 년이 넘도록 얼굴 반쪽을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서 고독하게 혼자서 거리를 걷고, 저마다의 집과 방과 뜰 안에 갇힌 채, 그리운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생활하도록 강요당하면서 좀처럼 기약하기 어려운 “집단 면역”의 시간을 고대하는 가운데 유령처럼 지내는 오늘, 우리는 카뮈의 말을 다시 한번 뼈아프도록 상기하게 된다. “인간은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에다가, 반항의 온갖 기막힌 복안들, 나아가서는 반항의 죽음까지 궁리하는 가운데, 이렇게 덧붙인다. ‘그리고 우리뿐이다.’”(옮긴이의 말 중에서)
■ 본문 중에서
이반이 마침내 마음속으로 제기하는 질문, 즉 도스토옙스키가 이 반항인으로 하여금 이룩하게 만드는 참된 진보의 핵심인 질문, 그것이야말로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유일한 것이다. 즉 인간은 반항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가, 또 반항 속에서 계속 버틸 수 있는가? 이반은 이에 대한 대답을 이렇게 내비친다. 즉 인간은 오로지 반항을 궁극까지 밀고 나감으로써만 반항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111쪽)
초인의 가르침이 하등 인간들의 방법적 제조로 귀결되어 버린 이 사실이야말로 기필코 고발되어야 하며 또한 설명되고 해석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만일 19세기와 20세기의 위대한 반항 운동의 마지막 귀결이 이러한 무자비한 굴종이어야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반항에 등을 돌리고 니체가 그의 시대를 향해 외쳤던 다음과 같은 절망적 외침을 다시 한번 토해 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양심과 그대들의 양심은 이제 더 이상 같은 양심이 아니란 말인가?”(140-141쪽)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반항적 시는 이 두 극단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며 진동했었다. 즉 문학과 권력 의지 사이, 비합리와 합리 사이, 절망적인 꿈과 무자비한 행동 사이를 왕래했던 것이다. 그 진동의 마지막에 이르러 이 시인들, 특히 초현실주의자들은 겉치레에서 행동에 이르는 길의 놀라운 축도(縮圖)를 우리에게 훤히 밝혀 준다(148-149쪽)
초인의 가르침이 하등 인간들의 방법적 제조로 귀결되어 버린 이 사실이야말로 기필코 고발되어야 하며 또한 설명되고 해석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만일 19세기와 20세기의 위대한 반항 운동의 마지막 귀결이 이러한 무자비한 굴종이어야 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반항에 등을 돌리고 니체가 그의 시대를 향해 외쳤던 다음과 같은 절망적 외침을 다시 한번 토해 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양심과 그대들의 양심은 이제 더 이상 같은 양심이 아니란 말인가?”(140-140쪽)
마르크스의 독창성은, 역사가 변증법인 동시에 경제라고 주장한 데 있다. 보다 더 자신만만한 헤겔은 역사가 물질인 동시에 정신이라고 주장했다. 게다가 역사는 오직 그것이 정신인 한에 있어서만 물질일 수 있으며, 그 역 또한 옳다. 마르크스는 최후의 실체로서의 정신을 부정하고 역사적 유물론을 주장한다. 우리는 이를 즉시 되받아서 베르자예프와 더불어 변증법과 유물론은 서로 타협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346-347쪽)
역사의 끝은 적어도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것임이 판명될 것이라고 마르크스는 믿었다. 바로 거기에 그의 유토피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시피, 유토피아란 운명적으로 그 자신은 원치 않았던 시니시즘을 섬기게 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일체의 초월성을 파괴해 놓고 나서 사실로부터 당위로의 이행을 실행한다. 그러나 당위란 오직 사실 속에서만 원리를 얻는 것이다. 정의에 대한 요구는, 그것이 처음부터 정의의 윤리적 정당성에 근거한 것이 아닐 경우 불의로 귀결되고 만다. 이 사실을 잊게 되면 언젠가 범죄마저도 당위가 될 것이다.(365쪽)
마르크스주의는 과학적이 아니다. 그것은 기껏해야 과학주의적일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야말로 탐구, 사상, 나아가 반항의 보람된 도구인 과학적 이성과, 일체의 원리를 부정하는 가운데 독일 관념론이 만들어 낸 역사적 이성 사이의 깊은 단절을 극명히 드러내 보여 준다. 역사적 이성은 그 본래의 기능으로 볼 때 세계를 판단하는 이성이 아니다. 그런데도 역사적 이성은 세계를 판단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세계를 이끌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383쪽)
바야흐로 역사와 씨름하고 있는 반항은,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와 형이상학적 반항의 ‘그리고 우리는 외롭다.’에 추가하여,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를 생산하기 위해 죽이고 죽을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나도 살고 다른 사람들도 살게 해야 한다고 덧붙여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434쪽)
사실 부조리의 단계에서는 살인은 다만 논리적 모순들을 야기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반항의 단계에 오면 살인은 가슴 찢는 고통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제 막 우리 자신과 닮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동일성을 인정한 사람을 —그가 누구든 간에—죽이는 것이 가능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의 문제이니 말이다. 이제 겨우 고독을 극복하고 난 참인데 모든 것을 박탈하는 행위를 정당화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고독 속으로 되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이제 막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깨닫게 된 사람에게 고독을 강요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인간에 반하는 결정적 범죄가 아닐까?(484쪽)
반항에 있어서 정치란 이러한 진리에 복종하는 것이라야 한다. 결국 반항은 역사를 전진시키고 인간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할 때, 그 폭력 없이라고는 아니라 해도 테러를 동원하는 일은 없이, 그리고 가장 다양한 정치적 조건들 속에서 그 일을 수행한다.(513쪽)
반항의 가장 순수한 충동은 이리하여, 만일 인간들 모두가 다 구원되지 못한다면 단 한 사람의 구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카라마조프의 비통한 외침으로 귀결된다.(523-524쪽)
반항은 그것이 바로 생의 운동이라는 것을, 살기를 포기하지 않고서는 반항을 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반항의 가장 순수한 부르짖음은 그때마다 한 존재를 일으켜 세운다. 반항은 그러므로 사랑이요 풍요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524)
■ 차례
옮긴이의 말 9
서론 13
1 반항하는 인간 29
2 형이상학적 반항 49
3 역사적 반항 187
4 반항과 예술 435
5 정오의 사상 479
작품 해설 529
작가 연보 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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