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시인선51] 떡갈나무와 개
시리즈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50주년 기념) 51 | 분야 세계시인선 51
“시에는 한 편 한 편마다 무언지 모를 극단적인 것이 있다” ―레몽 크노
프랑스 문학의 가장 독특하고 실험적인 ‘말놀이꾼’
울리포의 창시자 레몽 크노가 시로 쓴 단 한 권의 자서전!
● 전통에서 출발한 혁신으로 시와 소설,
사실과 허구 사이 경계를 허무는 가장 ‘크노다운’ 첫 시집
“결과적으로 나는 소설, 내가 기술하고자 욕망하는
소설 그리고 시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를
단 한 번도 목격하지 않았다.”
―레몽 크노
20세기 프랑스 문학의 거장이자 실험 문학의 첨단에 섰던 레몽 크노의 『떡갈나무와 개』가 민음사 세계시인선 51번으로 출간되었다. 『떡갈나무와 개』는 그의 첫 시집으로, 이 작가가 이후 어떠한 작품 세계를 펼쳐 나갈 것인지 대표성을 선취하였다. 크노는 시인이자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번역가, 수학자, 화가, 출판인 등 다방면을 넘나들며 활동했고, 자신의 시대에 가장 유명한 작가 중 하나였다. 다양한 경험과 언어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극단적인 실험을 통해 ‘말놀이’의 문학 세계를 구축했다. 대담한 언어 실험과 문학 장르의 경계 넘나들기, 유머러스하고 서민적인 감각이 돋보이는 작가 특유의 문장은 이미 여기 완성되어 있다. 또한 자전 서사와 정신분석이라는 틀을 이용해 고유하면서도 단일하지 않은 시적 자아를 확립하는 젊은 작가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어린 시절부터 시와 소설, 일기 쓰기를 즐겼던 크노는, 20대 시절 앙드레 브르통을 위시한 초현실주의 그룹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러나 1931년이 되면 이들과 완전히 결별한 뒤, 자기 탐구의 길에 접어든다. 이에 따라 1939년까지 정신분석을 받는 한편, 민주공산주의 클럽에 가입하고, 기관지를 펴내고, 철학에 몰두하여 조르주 바타유, 메를로퐁티와 함께 알렉산드르 코제브의 헤겔 강의를 듣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이 모든 경험은 크노가 다시 새롭게 문학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준비시켰고, 1937년 출간된 『떡갈나무와 개』에는 그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다.
20세기 초 유럽은 기존의 세계가 종식된 후 다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하는 시대적 임무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혁신은 역설적으로 전통이 존재해야 가능했고, 크노의 문학적 실험의 근원 역시 전통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에서 출발했기에 강력했다. 크노는 자전을 쓰는 데 있어 일부러 시로 쓴 소설, 즉 운문 소설이라는 형태를 차용했는데, 18세기 이후 소설이 산문 형태가 되기 전에 오랫동안 쓰였던 전통적 형태다. 시를 활용하여 이야기의 형태를 갖추되, 시적이라고 여겨지는 ‘서정성’을 지웠다. 동시에 소설적이라 여겨지는 ‘일관된 주체의 내레이션’을 일부러 조각내고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로써 사실과 허구, 시와 소설 등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오히려 이 모든 것의 섞임과 긴장으로 작품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 새로운 시적 자아의 발견, 위대한 실험 문학의 첫 걸음
이 책은 연속된 시가 아니라, 서로 다른 형식과 내용을 담은 독립적인 세 개의 부가 일종의 시리즈처럼 구성된 시집이다. 1~3부로 이어지는 형식과 내용의 변화는, 작품 속 “나”로 표상되는 이가 정신분석 치료에 임하여 신경증을 치료하는 과정의 기록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작가 크노가 초현실주의와 결별하며 억눌렀던 시적 자아를 재구축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1부는 시인의 탄생에서 시작하여 유년 시절을 담고 있다. 19세기 말 이미 폐기된 고전적인 운문 형식을 차용하여, 자잘한 개인적 사건과 타이타닉 호의 침몰, 1차 세계대전의 발발 등 20세기 초의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시간의 축에 따라 콜라주처럼 배치한다. 2부는 집필 당시 진행 중이던 정신분석 치료 경험을 바탕으로 한 아홉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다. 시적 형식은 1부에 비해 간결해지고, 사건의 이야기는 뒤로 물러서고 꿈의 서정과 이미지가 앞선다. 시집의 제목이기도 한 ‘떡갈나무와 개’는 이러한 과정에서 통찰한 자아의 신성과 비천을 의미한다. 위대하고 이상적인 떡갈나무와 상스럽고 절망에 집착하는 개 사이의 긴장, 그리고 통합의 모색은 이후 크노의 창작 세계에서 무한히 반복된다.
3부는 ‘마을의 축제’라는 장시 한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형식에서 이제 완전히 전통적 운율이 사라졌고, 인용이나 구두점 사용이 자유롭다. 내용 역시 1, 2부와 달리 시인의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크노는 이에 대해 “3부에서 X씨는, 자신이 회복되기 전날, 고향의 축제에 참석하고 대중적 기쁨에 동참한다.”는 해설로 유기적 관계를 설명한다. 이 목소리는 이제 자기 자신이 아닌 축제의 풍경을 묘사할 뿐이다. 다만 축제의 바깥이 아니라 그 안에서 체험하고 있으며, 이에 갈수록 시적 언어의 폭발이 일어난다.
시집의 마지막에서 시적 주체의 목소리는 그 자신의 것이자 동시에 타자의 것, 즉 나와 타자의 구별이 없어지게 된다. 한 시집 내에서의 이러한 의도된 변화 양상은 이후 1960년 크노가 수학자 프랑수아 리오네와 함께 창시한 울리포, 즉 잠재문학실험실의 사상에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조르주 페렉, 이탈로 칼비노 등이 함께 했던 이 문학 그룹은 제약을 통해 언어의 잠재된 가능성을 일깨우고자 했다. 마치 수학에서 그러하듯 이렇게 발명된 규칙은, 처음 시도한 한 사람의 작가가 아닌 문학을 하는 모두의 것이 된다.
나는 일천구백삼년 이월하고도 이십일일에
르아브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잡화상인 아버지도 잡화상인이었다 :
두 분은 기뻐서 날뛰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부당함을 내가 깨닫게 된
어느 날 아침 나는 넘겨졌다
― 1부에서
르아브르 고등학교는 매력적인 건축물, 14년에 전쟁이
터지자 이 건물은 아름다운 병원으로 변형되었다 ;
내 첫 담임 선생님 ― 초등학교 ― 에게는 호되게 매질을
가하곤 하던 아들이 있었다 ; 그 녀석은 울었다, 짐승처럼!
나는 교묘하게 가해진 구타로 붉게 물들어 버린
그 녀석의 엉덩짝을 보고 그만 공포에 사로잡혔다.
― 1부에서
나는 소파 위에 몸을 눕혔다
그리고 내 인생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 인생이라고 내가 믿고 있었던 것을.
내 인생, 이것에 대해 내가 뭘 알고 있는가?
그리고 너의 인생, 너, 너는 그것에 대해 뭘 알고 있는가?
그리고 그, 여기에 있는, 그는 알고 있는가,
자기 인생을?
봐라, 모두가 한통속이 되어
자기가 바라는 대로 행동한다고
상상하는 자들이 죄다 여기에 있다
마치 자신이 바라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듯
마치 자신이 바라는 것을 자신이 바라고 있다는 듯
― 2부에서
떡갈나무와 개 여기에 내 이름
두 개가 있다, 섬세한 어원 :
신들과 악마들 앞에서 어떻게
이름을 감출 수 있겠는가?
(중략)
쓰레기통을 드나들지 않으면
개는 도토리로 배를 채울 뿐이다
떡갈나무의 가지는 뻗어 있다
하늘을 향해.
― 2부에서
커다랬다 커다랬다 사람들 기쁨의 마음의 저 기쁨은
산 너머로 태양을 춤추게 하고 수확물을 거둬들이는 대지를
요동치게 할 만큼
커다랬다 커다랬다 기쁨은 강물을 솟구치게 만들고
바위 사이로 샘물이 솟아나 웃으며 오줌을 누게 할 만큼
커다랬다 커다랬다 언덕 위로 별들이 흔들거리고
지극히 명랑한 천체와
밤이며 낮이며 기억의 수액으로 부풀어 오른 달이
구름 조각들의 바람에 실려 떠다닐 만큼
기쁨이 언덕 전체를 뒤발하고 골짜기를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 3부에서
“어이, 이보라고, 이 맴은 좋아라 춤을 추것네 고럼 저 산도 덩달아 춤춘다니께!”
으으윽 뼈가 삐거덕거리고 으아악 관절이 삐걱거리며 쑤시고
얼쑤 얼쑤 소리를 질러 대는 영감은 즐거워하며
그의 아내 산이 내는 소리 꽈당 꽈당 그의 애인 산이 내는 소리 꽈당 꽈당
너도밤나무와 겨우살이덩굴 골짜기와 조약돌 드레스를 차려입고
머리카락의 눈을 털어 내면서 그의 댄스 파트너가 꽈당 꽈당
그러자 늙은이의
빵 빵 빵 빵 빵 아들도
빵 빵 빵 빵 빵 빵
― 3부에서
● 원문과 함께 읽는 레몽 크노식 ‘말놀이’의 의미
레몽 크노의 작품은 흔히 번역 불가능에 가까운 현대 문학사의 문제적 텍스트라 여겨지곤 한다. 원문으로 읽을 때에야 비로소 알 수 있는, 자유자재로 언어 자체를 다루는 형식과 그 솜씨 자체가 작품에 큰 의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현대 시에 대한 전문적인 이해에 더불어, 한국어와 프랑스어, 출발어와 도착어를 세심하고 성실하게, 또한 창의적으로 다루는 번역가의 감각이 있어야만 가능한 어려운 작업을, 한국의 문학평론가이자 번역가인 고려대학교 불문학과 조재룡 교수가 해냈다. 이로써 실험 문학의 거장인 레몽 크노의 정수가 담긴 대표작을 믿음직한 번역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어 원문을 같이 실어, 작가와 번역가의 창조적인 말놀이를 번갈아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1부
2부
3부: 마을의 축제
주(註)
작가 연보
작품에 대하여 : 운문의 소설적 실험 ― 자전의 시적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