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아름다움과 잔혹함을 찬란한 문장으로 그려 낸,
‘풍요의 바다’ 시리즈 첫 번째 이야기
일본 문학 애호가들 사이에서 전설로 회자되는 소설, 미시마 유키오의 ‘풍요의 바다’ 시리즈
첫 번째 권 『봄눈』이 국내 최초로 출간되었다. 국내 초역으로 베일을 벗는 ‘풍요의 바다’는 그
간 분량의 방대함과 일본어의 가능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인 미문 때문에 번역하기 까다로운
소설로 여겨졌다. 이번에 출간된 『봄눈』은 원문의 극히 섬세한 뉘앙스까지 포착해 정확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옮겼으며, 작가의 생애와 사상적 궤적에 대한 충실한 해석으로 독자들의 이
해를 돕는다.
‘풍요의 바다’ 4부작은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1975년까지를 아우르는, 원고지 약 6000매 분량
의 대작이다. 작가는 이 시리즈에서 환생을 거듭하는 한 영혼과 그를 추적하는 인식자의 궤적
을 통해 20세기 일본의 파노라마를 펼쳐 냈다.
화려하고 정교한 문장과 치밀한 인간 묘사, 허무주의적 우주관에 녹여 넣은 작가로서의 자기
비평은 왜 미시마 유키오가 전후 일본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는지 여실히 보여
준다. 특히 첫 번째 이야기인 『봄눈』은 고전적인 우아함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상시키는 드
라마틱한 스토리로 인해 영화, 무대극, 드라마 등으로 제작되었다. 민음사에서는 『봄눈』을 시작
으로 ‘풍요의 바다’ 시리즈 2권인 『달리는 말』, 3권 『새벽의 사원』, 4권 『천인오쇠』를 차례로 출
간할 예정이다.
▶ 내가 삶과 세계에 대해 느끼고 생각해 온 모든 것을 여기에 담았다. — 미시마 유키오
전후 일본의 가장 문제적인 작가가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완성한 혼신의 대작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는 오랫동안 매달렸던 소설을 마침내 탈고했다. 그가 출판사
에 건넨 원고의 마지막 줄에는 ‘『천인오쇠』 끝. 1970년 11월 25일’이라는 부기가 달려 있었다.
이 날짜가 가리키는 것은 소설이 완결된 날이자 작가 자신의 기일이 된 날이었다. 향년 45세
의 일이었다.
미시마가 자신의 생과 함께 마감한 작품은 ‘풍요의 바다’ 4부작의 마지막 권이었다. 1965년
『봄눈』 연재를 개시해 1970년 『천인오쇠』로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5년간 그는 이 소설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풍요의 바다’ 시리즈의 배경은 메이지 시대 말기부터 1975년까지로, 미시
마의 생애(1925~1970)는 그 한복판에 정확히 걸쳐져 있다. 그가 자신의 시대 위에 소설 속 시
대를 겹쳐 올리며 묘출하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풍요의 바다’ 시리즈는 11세기 일본 산문 문학인 『하마마쓰 중납언 이야기』(浜松中納言物語)
를 모티프로 한 연작 소설이다. 윤회 전생을 소재로 한 ‘모노가타리’의 구성을 순문학 장편에
도입한 것은 당시 파격적인 시도였다. ‘풍요의 바다’ 1권의 주인공은 2권, 3권, 4권에서 각기 다
른 모습으로 환생해 다른 시대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시리즈 전체에 모두 등장하는
인물 혼다 시게쿠니는 후작가의 후계자, 우익 청년, 타이의 공주, 사악한 고아라는 네 개의 환
생한 자아를 연결하는 고리로, 이들 모두를 가까이에서 지켜본다.
미시마 유키오는 이 네 자아에 자신의 정체성을 나누어 녹여내고, 궁극적으로는 인식자 혼
다를 통해 자신을 대변하고자 했다. 시리즈 마지막 권에서 노인이 된 혼다는 그간의 모든 일
들이 실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궁극의 허무에 도달한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이르렀다.’
혼다의 이 깨달음을 최후의 문학적 전언으로 남기고 미시마 유키오는 목숨을 끊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그가 연출해 보인 정치적 쇼보다 더 그의 진실에 가까운 것이 아니었을까.
금기를 통해 비로소 완벽해지는 불가능한 사랑의 이야기
지고의 아름다움 속에서 허망하게 스러지는 젊음의 환영, 『봄눈』
메이지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다이쇼 시대가 시작된 1912년. 마쓰가에 후작가의 후계자 기요
아키는 빼어난 미모로 주위의 선망을 받지만 오로지 자기 자신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는 탐미적 몽상가이다. 그는 아야쿠라 백작의 딸 사토코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
면서도 냉담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사토코와 황족의 결혼이 결정되자 기요아키는 뒤늦게 자
신의 마음을 깨닫고 사토코를 유혹해 금지된 관계에 빠져든다.
기요아키와 반대로 냉철하고 이지적인 그의 친구 혼다는 배후에서 은밀히 그들을 돕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현실의 압박이 더해 간다. 마침내 기요아키와 사토코가 막다른 곳
에 몰렸을 때 폭발하듯 파국이 닥쳐오고, 이루지 못한 생의 집념은 다음 생을 향해 나아가며,
혼다는 그 모든 것의 목격자로 남겨진다.
‘풍요의 바다’ 1권 『봄눈』은 왕조풍 로맨스의 분위기를 차용한 고전적 드라마이다. 주인공 기
요아키와 사토코를 비롯해 주요 인물들은 전부 지체 높은 신분으로 설정되었고, 시간적·공간
적 배경 모두 실제보다 이상화되어 꿈처럼 현란하고 몽롱한 분위기를 띤다. 사토코의 연심을
외면하던 기요아키는 사토코가 황족의 약혼자가 되어 범해서는 안 될 금기가 되자 비로소 열
렬한 사랑에 빠진다. 이 무모한 사랑은 황가에 대한 반역으로서, 부모 세대에 대한 반항으로
서, 자신들의 시대에 대한 각오로서 질주하다 예정된 최후를 맞아 봄눈처럼 스러진다.
아름다운 젊은이들의 비극적 사랑, 우아하고 정교한 구성과 스타일로 『봄눈』은 시리즈에서
제일가는 인기를 누리는 소설이 되었다. TV 드라마와 무대극 등으로 각색되고 특히 2005년
에는 다케우치 유코, 쓰마부키 사토시 주연으로 영화화되어 국내 상영되기도 했다. ‘사랑’에
초점을 맞춘 만큼 이야기 자체도 매우 재미있지만, 곳곳에 후속권들을 암시하는 장치가 숨어
있어 이어질 독서의 즐거움을 예고한다. ‘풍요의 바다’ 시리즈가 오랜 구상과 기획을 거쳐 치
밀하게 세워진 예술품임을 알게 하는 책이다.
‘소문의 벽’에 갇힌 작가 미시마 유키오
이제 그의 실(實)과 허(虛)를 진지하게 들여다볼 때
2020년은 미시마 유키오 사후 50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에서 미시마 유키오는 우익 작가라는
이미지 때문에 불온한 이름으로 여겨져 왔다. 그 탓인지 『파도 소리』, 『가면의 고백』, 『금각사』
같은 극히 일부의 작품 외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았다. 이는 미시마의 정치 이념에 대한 비판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1970년부터 2000년까지 그의 거의 모든 소설을 출판한 중국의 상황과도
다르다.
노벨 문학상 후보에 수차례 오르며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로 세계적 주목을 받은 이 작가의 정
치적 행보뿐 아니라 실제 그가 이룬 문학적 성취에 대해 국내에서도 더욱 면밀한 논의가 필요
하다. ‘풍요의 바다’를 우리말로 옮긴 역자 중 한 사람인 서울대학교 윤상인 교수는 미시마 유
키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더불어 “그들의 작품 속에 ‘일본다운 일본’이
투영되어 있다고 판단한 미국의 몇몇 일본 문학 번역자와 출판 편집자들에 의해 취사 선택된
미적 타자”였다고 말한다.
미시마에게는 기회이자 한계였을 이러한 틀 속에서 그가 무엇을 모색하고 어디에 도달했는지,
그것이 실제 삶과는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확인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의미가 있다. 작가
자신이 “나의 모든 것을 여기에 담았다.”라고 선언한 이 작품의 번역, 출간이 미시마 유키오라
는 작가와 20세기 일본 문학 전반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다.
풍요의 바다 시리즈(전4권)
▶ 1권 봄눈(春の雪)
▶ 2권 달리는 말(奔馬) -근간
▶ 3권 새벽의 사원(暁の寺) -근간
▶ 4권 천인오쇠(天人五衰) -근간
본문에서
“그럼 누군가가 죽은 후에도 그 사람의 사상이나 정신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건 어떻게 설명
할 건가요?” 하고 차오 피는 차분히 응수했다.
혼다는 머리 좋은 청년다운 혈기로 얼마쯤 얕보듯이 단정했다.
“그건 환생과는 다른 문제입니다.”
“왜 다르지?” 하고 차오 피는 온화하게 물었다. “하나의 사상이 다른 개체 속으로 시간을 뛰어
넘어 계승되어 간다는 건 그대도 인정하겠지요. 그렇다면 같은 개체가 각기 다른 사상 속으로
시간을 뛰어넘어 이어지는 일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305~306쪽)
자신을 사랑해 주는 인간을 깔보고, 깔볼 뿐 아니라 냉혹하게 취급하는 기요아키의 좋지 않은
성향을 혼다만큼 오래전부터 꿰뚫어본 친구는 없을 테다. 이러한 종류의 오만함은 열세 살의
기요아키가 자신의 아름다움에 보내는 사람들의 갈채를 알게 된 때부터 마음 깊은 곳에서 은
밀하게 길러 온 곰팡이 같은 감정일 거라고 혼다는 추측했다. 닿으면 방울 소리를 낼 듯한 은백
색의 곰팡이 꽃. (31~32쪽)
눈송이 하나가 날아 들어와 기요아키의 눈썹에 머물렀다. 사토코가 알아채고는 “어머.” 하고
말한 순간, 엉겁결에 사토코를 향해 얼굴을 돌린 기요아키는 눈꺼풀에 전해 오는 차가움을 느
꼈다. 사토코가 갑자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은 그 얼굴이 기요아키의 눈앞에 있었다. (…) 기요
아키의 가슴은 세차게 고동쳤다. 교복에 높직이 달린 옷깃이 목을 죄어 오는 것을 또렷이 느꼈
다. 눈을 감은 사토코의 고요한 흰 얼굴만큼 난해한 것은 없었다. (124쪽)
봄눈 7
작품 해설 507
작가 연보 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