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이 날카로운 핀이 되어 문학을 긁을 때
비로소 울려퍼지는 잡음과 울음, 그 모든 축음(蓄音)
공백으로 존재하고 침묵으로 발설하는 잠재성의 문학
‘언노운’과 ‘노바디’를 향한 비평의 편애
문학평론가 양윤의의 두 번째 비평집 『앨리스의 축음기』가 ‘민음의 비평’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첫 번째 비평집 『포즈와 프러포즈』를 출간한 이후 7년 만이다. 하나의 키워드로 비평가가 한 시기 동안 써 온 비평에 색깔을 부여하는 ‘민음의 비평’ 시리즈의 열두 번째 테마는 ‘잠재성’이다. 양윤의는 작품 속에 작가가 작품에 담고자 한 것, 혹은 부러 담지 않은 것, 담지 않았기 때문에 담긴 것들을 읽고자 한다. 그 작업은 흡사 축음기에 올린 레코드로 핀을 떨어뜨리는 일, 공백을 긁어 소리를 내는 일과 닮았다. 레코드 위로 핀을 조준하면 소리를 품은 고요한 검은 판은 묵묵히 돌다가 핀이 닿는 순간 소리를 낸다. 양윤의는 문학 작품을 읽는 일이 이와 닮아 있다고 믿는다.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노래도 좋지만, 그 속에 섞여 드는 유령의 울음 같은 잡음을 읽어 내는 일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비평이 쓰여졌다고 밝힌다.
1부의 주된 테마는 ‘잠재성-여성’이다. 양윤의는 문학의 주체, 문학의 언어, 문학의 미래. 이 세 가지를 여성과 떼어서 사유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은희경과 강화길, 황정은과 박민정의 작품 등을 다루며 문학의 잠재성을 말하고자 할 때 그것이 무엇보다 여성의 글쓰기를 닮았고 거기에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2부는 역사성 혹은 동시대성에 관한 글들이 묶였다. 양윤의는 2000년대 문학의 특질로 동시대성이 ‘시대착오’와 ‘시차’를 통해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한국문학이 골몰한 것, 주목한 서사들과 문학의 풍경들에 대한 비평적 시선을 만날 수 있다.
3부는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들의 시선이 도드라진 글들이 모여 있다. 이들의 눈에 포착된 세계는 실패, 반쪽 되기, 악무한, 죽음, 회의, 악몽, 불가능과 같은 것들이다. 양윤의는 유토피아가 아닌 이상한 나라를 목격했음에도 너머에서 가능성, 애도, 진무한, 축제, 믿음, 탈출을 꿈꾸는 작품과 작가에 대해 쓴다.
4부는 변하는 ‘주체’에 관한 글을 모았다. 이기호, 이장욱, 최은미 등 ‘작가가 쓰는 작가 주인공’들에 대한 이야기 역시 다룬다. 이야기 속에서 저자는 독자와 뒤섞이고 이름은 국가와 교환되는 형상. 죽은 자가 이야기의 이정표로서 멈춰 선 채 삶의 세계에 남거나 유령으로 살아가는 모습들에 비평가의 시선이 머문다.
5부에 속한 글들은 작품 속 ‘나’의 분산에 관한 것이다. ‘나’는 도처에서 먼 곳, 초자아, 그림자, 상대성 이론, 복수화된 ‘나’를 맞닥뜨린다. 타인에게서 자신의 거울상을 보거나 ‘나’와 떨어뜨릴 수 없는 형제의 운명을 서술하는 조해진과 정영수의 인물이 이 챕터에서 독해된다.
비평집 제목인 『앨리스의 축음기』는 그 청음(聽音)의 목적과 태도를 설명하기 위해 지어졌다. 양윤의는 분산되는 목소리, 배제된 목소리, 알려지지 않은(unknown) 목소리를 듣는 비평의 작업을, 우연히 나무 구멍 속으로 들어가 이상한 나라를 체험하고 돌아오지만 그 증언과 주장에 신빙성을 부여받지 못한 앨리스의 이야기와 연결한다. 독자인 우리는 앨리스의 이야기에서 무엇을, 어떻게 들어야 할까? 앨리스가 스스로 체험을 결정하고 이야기의 발화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듯, 우리 역시 능동적으로 독자와 비평가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양윤의는 이야기가 꽃피운 것 아래의 얽히고설킨 뿌리 같은 것을 들여다본다. 이 비평적 시도를 통해 눈에 보이는 이야기란 결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본문에서
은희경의 소설이 1990년대식 냉소, 비(非)참 여, 사소한 일상에 대한 탐닉을 보여 준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 평가는 온 전한 진실에 적중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은희경의 소설이 냉소적인가? 은희경 소설이 폭로하듯, 생존 회로(survival circuits)2 속에서 무너져 가 는 여성들의 삶이 어떻게 사소한 디테일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이 지점에 서 우리는 은희경이라는 작가가 최초로 자신의 목소리를 갖게 된 여성적 주체를 소개한 작가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도 통시적(通時的)인 쌍둥이, 즉 배니싱 트윈을 통해서 여성의 안팎을, 존재와 부재를, 현실성 과 잠재성을 동시에 보여 준 작가라고 말이다.
-146쪽(배니싱 트윈―은희경의 또 다른 쌍둥이들)
동시대성을 경험하는 자들에게 모든 시대는 어둡다. 동시대인은 정확히 이 어둠을 볼 줄 아는 사람”이다. 아감벤은 어둠을 지각한다는 것이 소극적이거나 무기력한 행위가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라고 강조한다. 시대의 빛에 눈멀지 않고 그 속에서 그림자의 몫을 식별하는 데 이르는 자만이 동시대인이다. 이 식별 가능성은 동시대성의 윤리적 성격이기도 하다. 동시대인은 자기 시 대의 어둠을 자신과 관계 있는 어떤 것, 자신을 끊임없이 호명하는 어떤 것, 모든 빛보다도 더 직접적이고 독특하게 자신을 향해 오는 것으로 지각한다.
자기 시대에서 다양한 시간적 계기들의 공존을 보고자 한다면, 동시대 성의 세 번째 정의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근원적인 것(the archaic)과 관련된다. 아감벤은 기원 혹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행위, 현재 속에서 여전히 작동하는 근원적인 것을 주목하는 행위를 동시대성과 연결한다. 여기서 기원은 연대기적 과거에만 있지 않다. 기원은 역사의 생성과 동시대적이며, 역사의 생성에서 항상 작동한다. 이렇듯 동시대성은 철저한 역설 속에서 탄생한다. 자기 시대를 벗어날 수 없다는 자각과 동시에 자기 시대에서 다른 길을 모색하려는 행위가 바로 동시대성의 개념을 구성한다.
-199쪽(문학의 동시대성에 대하여―이기호, 한강, 권여선의 시대착오)
작가는 언제 탄생하는가? 하나의 작품이 태어나는 바로 그때에 작가도 태어난다. 『돈키호테』가 탄생했을 때에야 비로소 세르반테스가 그 작품의 작가로서 태어나는 것이다. 작품의 진정한 배후는 시대, 사회, 역사, 관계 들이다. 작가는 이 배후와 작품을 연결해 주는 알리바이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작가는 탄생하는 바로 그 순간 죽는다. 완성된 작품은 독자의 손에 넘어가며 그 이후의 과정에 대해서 작가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작품이 불후의 명작이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독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쓰는 자(작가)는 읽는 자(독자)와 연동되어 있다. 읽는 행위를 통해 쓰는 행위가 완결된다. 결국 작가의 탄생에 대한 질문은 작가의 죽음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부재를 제 것으로 떠안으면서(죽음) 태어나고, 비어 있는 독자의 자리에 제 자신을 채워 넣 으면서(죽음) 완성된다. 작가는 태어날 때부터 유령 작가(ghostwriter)다. 그는 작품에 스며들어 있는 소환되지 않는 그림자다. 그는 작품을 낳았다고 이야기되지만 실제로는 작품에 의해 탄생한 자다. 셰익스피어의 정체를 둘러싼 그 수많은 소동이야말로 작품의 선행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저기 눈앞에 서 있는 작가는 누구인가? 자신을 작가라고 소개하고 있는 저 작자(作者)는 누구인가?
-401~402쪽(저자(author)라는 타자(other)―이기호와 이장욱의 저자-독자-타자)
■작가의 말
보르헤스는 길버트 키스 체스터턴의 책 『아폴로의 눈』을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문학은 행복의 행태들 가운데 하나”이며, “체스터턴만큼 내게 행복한 시간을 많이 안겨 준 작가는 없을 것”이라고. 체스터턴은 보르헤스가 자신에게 영향을 준 작가를 언급할 때 빼놓지 않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내게는 『아폴로의 눈』보다 보르헤스의 서문이 더 기억에 남아 있다. 평론가와 독자의 자리가 거기서 행복하게 겹쳐 있기 때문이다. 체스터 턴을 소개할 때의 보르헤스는 평론가지만, 그의 책을 읽을 때의 보르헤스의 행복감은 오롯이 독자의 것이다. 나는 문학 평론가의 자리에서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썼지만 이 책의 대상이 된 작품들을 읽을 때 나는 행복한 독자였다. 이 이중성이 이 책을 읽을 소수의 독자 분들께도 있었으면 좋겠다.
-책머리에서
책머리에 5
1부 여성, 타원과 잠재적인 것 13
잠재적인 것으로서의 서사 ― 강화길의 끝없는 이야기 15
앨리스의 축음기 ― 황정은의 이상한 나라 32
타원의 글쓰기 ― 박민정과 최정화의 글쓰기와 기억하기 57
불가능한 사랑의 그림자 ― 김숨, 『당신의 신』에 부치는 49개의 주석 72
여성과 토폴로지 ― 오정희 소설 다시 읽기 103
삼중 은유 ― 은희경의 쌍둥이들 123
배니싱 트윈 ― 은희경의 또 다른 쌍둥이들 142
2부 시대, 시차와 다수인 것 147
시차로서의 서사 ― 2000년대 문학의 풍경들 149
한국 문학과 페티시즘 ― 한국 문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 167
물(物) + 신(神) + 인(人) ― 박상영과 박민정의 물신 182
문학의 동시대성에 대하여 ― 이기호, 한강, 권여선의 시대착오 198
PB + SF + FS ― Post-Human Body + Science Fiction + Feminism Story 216
다수는 어떻게 출현하는가 ― 김금희, 최진영, 박민정의 다수 235
종말과 종말 이후 ― 박형서, 황정은, 이기호의 묵시록 252
3부 세상, 폐허와 악몽 사이에서
이 실패를 어떻게 풀까? ― 하성란의 실패들 273
반쪽으로 살아가기 ― 황정은의 애너그램 296
도도와 두두의 세계에서 ― 안보윤이 소개한 두 개의 무한 306
만개한 죽음, 무성한 삶 ― 이청준의 『축제』를 읽기 위한 15개의 키 워드 323
회의주의자의 사전 ― 박찬순의 기호들 345
악몽의 몽유록 ― 이유의 악몽 탈출기 369
폐허의 아데콰티오 ― 김개영 소설의 네 가지 불가능성 387
4부 저자, 타자와 노바디들 403
저자(author)라는 타자(other) ― 이기호와 이장욱의 저자 -독자 -타 자 403
증여, 이름, 인터내셔널 ― 박솔뫼의 inter-name/nation 418
청춘의 소금 기둥 ― 이상운을 위한 만가 427
에우리디케의 노래 ― 최은미의 잃어 -버려진 자 434
노바디가 당신을 사랑할 때 2 ― 권여선, 정용준, 한강의 유령들 446
5부 무(無)는 사라지지 않는다 463
먼 곳에 대한 세 개의 주석 ― 최은영의 위상학 465
먼 곳에 대한 또 다른 세 개의 주석 ― 김애란, 이장욱, 박민규의 먼 곳 으로 돌아오기 478
목소리 앞에서 ― 안보윤과 김이설의 초자아들 495
그림자 앞에서 ― 조해진과 정영수의 그림자 인간 506
그들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 김홍과 임현의 상대성 이론 521
이 많은 ‘나’들을 어찌할 것인가 ― 윤이형과 김엄지의 유사-‘ 나’ 들 5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