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모범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7 )
보르헤스 가명 소설 모음집
시리즈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7 | 분야 외국문학 단행본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가명의 소설가를 내세워
보르헤스와 카사레스가 직조한 천일야화
비오르헤스의 탄생을 선언하는 미스터리 가명 소설집!
▶ 보르헤스는 의심할 것 없이 현대의 가장 뛰어난 남아메리카 작가 ―《뉴욕 헤럴드 트리뷴》
▶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소설가)
▶ 나이로 치면 아들이 될 수 있지만 나는 카사레스에게 많은 것을 배웠고, 그는 나의 스승이었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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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카프카와 더불어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 20세기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논쟁을 촉발시킨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환상 소설의 대가이자 스페인어권 최고의 문학상인 세르반테스 문학상을 수상한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두 작가가 가명의 소설가인 ‘오노리노 부스토스 도메크’를 내세워 만들어 낸 공동의 단편 소설 모음집 『죽음의 모범』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보르헤스와 카사레스의 공동 창작은 당시로서는 전례를 찾기 어려운 새로운 형태의 문학 실험으로, 평단으로부터 “오랜 준비 기간을 거친 공동 작업의 결과이며, 이 가상 작가(오노리노 부스토스 도메크)의 문체는 보르헤스는 물론 카사레스와도 닮지 않은 독자적인 스타일을 보여 주었다.”라는 찬사를 받았다. 풍자와 아이러니가 넘치고 추리 소설 기법으로 정황 묘사와 이야기를 전개하는 『죽음의 모범』은 서사적 속도감이 문체적 특징인 카사레스와 백과사전적 지식을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풀어 놓는 보르헤스의 형이상학적 문체가 한데 어우러져 독자들에게 신비로 독서 체험의 기회를 제공한다.
보르헤스와 카사레스가 창조한 가상의 작가인 오노리노 부스토스 도메크는 본 책에서 1부 「이시드로 파로디에게 주어진 여섯 가지 사건」(1942), 5부 「부스토스 도메크의 연대기」(1967), 6부 「부스토스 도메크의 새로운 단편들」(1977)의 저자다. 2부 「두 가지 놀라운 환상」(1946)과 3부 「죽음의 모범」(1946), 4부 「변두리 사람들」(1955)에서 독자는 수아레스 린츠라는 또 다른 가명 소설가의 이름을 만날 수 있는데, 그는 부스토스 도메크의 제자로 설정되어 있다. 마치 미로 속에서 여러 이름을 만나는 듯한 이 기묘한 가명 소설 모음집은 ‘비오르헤스’(Biorges, 비오이 카사레스와 보르헤스의 결합)의 탄생을 선언하는 출사표와도 같다. 보르헤스는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인물의 탄생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나는 그럴싸한 탐정 소설을 구상해 둔 터였다. 비 내리던 어느 날 아침에 비오이가 시도해 보자고 제안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받아들였는데, 바로 그날 오전에 기적이 일어났다. 오노리오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제삼의 저자가 나타나 상황을 지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강력한 손이 천천히 우리를 이끌었다. (……) 도메크는 비오이의 증조부의 성에서, 부스토스는 코르도바주에 살던 내 증조부의 성에서 따왔다.
보르헤스와 카사레스의 첫 만남은 193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르헨티나판 맹모인 카사레스의 어머니가 저명한 문예지 《수르》 편집장 빅토리아 오캄포를 만나 아들의 문학적 재능을 키울 방법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당대 대표 작가이기도 한 빅토리아는 멘토로 보르헤스를 추천하고, 두 사람은 이후 열다섯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평생 친구이자 문학적 동반자로서 우정을 나누게 된다. 보르헤스와 카사레스는《데스티엠포》라는 잡지를 함께 발간하는 등 문학적 활동을 공동으로 펼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탄생하게 된 가명의 작가가 바로 오노리오 부스토스 도메크다. 두 작가의 한목소리로 만들어진 부스토스 도메크의 작품들은 출간될 때마다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이후 이 모든 단편들이 보르헤스와 비오이의 공동 창작품임을 알게 된 문단의 평자들이 몹시 당황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 서구 문학을 패러디로 읽어 내다
은유와 풍자로 가득한 이야기보따리
1부 「이시드로 파로디에게 주어진 여섯 가지 사건」에서 살인 누명을 쓰고 수감된 이시드로 파로디는 억울한 살인 누명을 썼다며 범인을 가려 달라는 여러 의뢰인들을 만나게 된다. 이시드로는 그 명성만큼 탁월한 기지와 놀라운 추리력으로 살인 사건의 범인을 하나씩 밝혀내는데, 그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독자는 기상천외하고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을 경험한다. 보르헤스는 체스터턴, 스티븐슨 등의 작가들이 쓴 영국 범죄 문학과 탐정 소설에 심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는 이러한 탐정 소설의 방식을 패러디하여 이 소설에서 주어진 언어 정보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탐정 이시드로라는 인물을 창조했다. 파로디는 명백한 진실을 밝혀내는 논리적 전개 양상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수한 언어적 해석의 길을 제시하며 범죄 문학 장르의 전형을 뒤틀고 변형시킨다.
2부 「두 가지 놀라운 환상」은 두 가지 초월적 경험을 다룬 작품으로, 여기서 기존에 신성함과 성스러움으로 여겨지던 대상은 그로테스크한 괴물로 묘사되며 그 신성함이 무화된다. 3부 「죽음의 모범」은 부스토스 도메크의 제자로 설정된 수아레스 린츠라는 가상 작가가 쓴 작품으로 권력과 이권을 둘러싸고 세 등장인물들이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를 통해 탐정 소설의 패러디적 묘미를 다시금 드러낸다. 4부 「변두리 사람들」과 「믿는 자들의 낙원」은 누와르 영화를 보는 듯 명예와 운명과 복수를 주제로 스펙터클한 사건들이 이어지는데, 1940년에 영화 대본으로 작성되었다가 1955년에 한 권으로 묶여 출판되었고, 1975년에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5부 「부스토스 도메크의 연대기」는 당대 사회와 문화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은 통렬한 풍자가 가득하며, 작품 전반에 비유적 표현이 사용된 바로크식 글쓰기 형식을 차용했다. 기능주의를 풍자하거나(「의상」1, 2), 어휘를 풍요롭게 바꾸고 변형하며(「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 기존의 가치와 현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풍자와 은유로 그 형식을 자유자재로 전복시키는 실험적 글쓰기를 시도한다. 특히 6부 「부스토스 도메크의 새로운 단편들」에서는 ‘페론주의’로 유명한 페론 대통령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아내는데(「몬스트루오의 축제」에서 몬스투로오(Monstruo)는 보통 명사인 ‘괴물’이 담아낼 수 없는 고유성을 지닌다.), 이는 페론 대통령과 평생 불편한 관계를 풍자적으로 작품 안에 풀어낸 보르헤스의 기지를 드러낸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보르헤스의 글쓰기가 담고 있는 풍자의 묘미를 더욱 잘 살려낼 수 있었던 것은 비오이 카사레스의 글쓰기적 기지의 공이 적지 않다. 최면을 걸듯이 보르헤스가 자신의 꿈의 세계를 풀어놓으면 카사레스가 그것을 온전히 담아 추리 소설 기법을 통해 길을 찾아주는 듯한 형태가 반복되는 것이다. 보르헤스 자신도 “명료하고 매끄러운 문체에 대한 애착을 지닌 카사레스에게 나는 빚을 지고 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오노리오 부스토스 도메크’라는 가명의 소설가를 내세워 보르헤스와 카사레스가 미로처럼 직조해 낸 세기의 천일야화 『죽음의 모범』. 카사레스의 탁월한 기지가 빛을 발휘하는 추리 소설 기법에 보르헤스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백과사전적 지식이 결합된 단편 소설 모음집인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다시 지금, 보르헤스를 만나 보게 될 것이다. 비오르헤스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지적인 언어유희의 세계. 미스터리하고 유머러스한 이야기 속에 담겨 있는 풍자적 감수성과 철학적 지혜의 산물 『죽음의 모범』을 독자들에게 권한다. 이 말을 건네며.
“오늘 내가 할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선생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게요.
인간은 언젠가는 속을 털어넣고 싶어 하는 법이지. 어차피 할 바에야
스쳐 지나가는 새, 마지막 담배 연기처럼 사라질 누군가와 하는 게 나은 법.”
― 본문 6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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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픽션의 논픽션, 논픽션의 픽션 같은 가명 소설 모음집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7권 중 유일한 픽션
『죽음의 모범』은 2018년에 처음 1권(『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이 출간된 이후 현재까지 꾸준히 발간되고 있는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중 7권에 해당한다. 1권부터 6권은 논픽션이며, 7권인『죽음의 모범』만 유일한 픽션으로 ‘보르헤스 가명 소설 모음집’이라는 부제를 추가하여 별권과 같이 구성하였다. 보르헤스를 사랑하는 독자들로서는 1994년에 첫 출간된 보르헤스 전집 이후 다시 만나게 되는 보르헤스의 픽션 작품인 셈이다. 보르헤스는 생전에 수천 쪽에 달하는 에세이를 남겼다. 우리에게 픽션으로 잘 알려진 것과 달리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산문 작가로도 명성을 떨쳤으며 당대 작가의 전기, 철학 사상, 아르헨티나의 탱고, 민속학, 국가 정치 및 문화, 리뷰, 비평, 서문, 강의 등 다양한 주제와 형식의 산문을 남겼다. 민음사에서 6권(근간)이 출간되면 전 세계에서 독립적이고 탁월한 작품으로 인정받은 그의 논픽션 전집 모두를 국내에서도 만나 볼 수 있다.
보르헤스는 1980년대 말 국내에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이 소개되면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단편소설집 『픽션들』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로 꼽혔지만, ‘어려운 작가’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라붙었다. 2000년대 시작된 ‘인문학 다이제스트’ 열풍에서도 한 발짝 빗겨 서 있던 신비의 거장, 보르헤스. 그를 쉽게 읽고자 하는 독자들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중심을 부정하는 보르헤스의 사유는 한 문장으로 수렴될 수 없었고 그의 언어에 주석을 달면 달수록 옥상옥(屋上屋)이 되는 현상을 피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일생을 표류하면서 살았고, 조언할 말은 한마디도 없다.’
만년의 보르헤스에게 젊은이들을 위해 조언을 한마디 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시대의 멘토가 되기를 거부했던 자유경의 목소리는 어떻게 그의 작품을 읽어야 하는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힌트를 준다.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은 그런 의미에서 보르헤스를 만나고자 하는 이들에게 가장 유용한 지도가 될 것이다. 한 번쯤 『픽션들』, 『알레프』를 펼쳐 들었으나 복잡한 표식과 난해한 상징에 완독을 포기했던 독자들이라면, 먼저 논픽션을 만나 보자. 청년 보르헤스의 사유가 태동하는 시기부터 지적 자만심을 숨기지 못하는 패기만만한 장년기를 지나 자신만의 소우주를 탄생시키는 완숙기까지, 그의 모든 여정을 담았다. 이 사유의 지도를 통해, 픽션 속 모든 장애물은 보르헤스의 미학적 토대 위에 세워진 눈부신 랜드마크였음이 드러난다.
“가령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서 보르헤스는 “거울과 부권(父權)은 가증스러운 것이다. 그것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증식시키고, 분명하게 그런 사실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에 대한 보르헤스의 개인적인 설명을 ‘7일 밤’의 「악몽」에서 찾을 수 있고, 왜 그가 그토록 악몽이나 꿈 혹은 거울에 집착하게 되었는지 알게 된다.
―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3 『말하는 보르헤스』 작품 해설 중에서
그동안 소수 독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보르헤스. 그러나 이제는 당신도, 이제껏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풍부한 상징과 형형한 의미의 편린을 홀로 목격하는 ‘보르헤스적 경험’의 주인이 될 수 있다.
■ 민음사의 보르헤스 논픽션 전집
1. 아르헨티나 사람들의 언어 El idioma de los argentinos/ 김용호 황수현 엄지영 옮김
2. 영원성의 역사 Historia de la eternidad/ 박병규 박정원 최이슬기 이경민 옮김
3. 말하는 보르헤스 Borges oral/ 송병선 옮김
4. 또 다른 심문들 Otras inquisiciones/ 정경원 김수진 옮김
5. 아틀라스 Atlas/ 송병선 박정원 옮김
6. 세계문학 강의(근간)/ 남진희 엄지영 박병규 김용호 정동희 옮김
7. 죽음의 모범 보르헤스 가명 소설 모음집 Un modelo para la muerte/ 이경민 황수현 옮김
■ 『죽음의 모범』 본문 중에서
그런데 독자의 얼굴에 조바심이 가득해 보인다. 요즘엔 모험에 대한 특권이 사색적 대화보다 우위에 있다. 이제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여기까지는 독자의 손을 잡고 함께 왔지만 이제는 독자 홀로 책을 마주할 시간이다 (1부 27쪽)
273호 감방의 죄수가 앙글라다 부인과 그 남편을 마지못해 맞아들였다.
“메타포는 접어 두고 명확하게 말씀드리지요.” 카를로스 앙글라다가 엄숙하게 약속했다. “내 머리는 차가운 냉장고 같습니다. 자기가 속한 계층에선 경석으로 통하던 훌리아 루이스 비얄바의 죽음을 둘러싼 정황이 이 회색 용기 안에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어요. 냉정하고 충실하게 말하지요. 나는 이 사건을 기계 장치가 된 신처럼 담담하게 보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의 한 단면을 말씀드리지요. 정말 잘 경청하시기 바랍니다, 파로디 씨.” (1부 238~239쪽)
천상과 지상의 창조자이신 성스러운 삼위일체를 목도했는데 알레한드로 씨는 라플라타에 있다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 생각만으로도 무력감에서 벗어나기에 충분했지요. 하지만 그렇게 기꺼운 명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알레한드로 씨는 구시대적인 사람이라 소녀를 소홀히 한 데 대한 나의 설명을 호의적으로 들어 줄 리 없었으니까요. (2부 216쪽)
이 개 같은 기침에 눈이 감기곤 해서 시금치 크로켓을 빠뜨렸네만 엄청나게 큰 바비큐가 순간적으로 그 크로켓을 지워 버렸네. 부채꼴로 펼쳐지면서 하늘에 제 위치를 잡은 카넬로니 파스타를 알아보지 못하게 말이야. 거기에 신선한 치즈가 덮이면서 치즈의 푹신한 표면이 온 하늘을 뒤덮었어. 그 음식이 세상 위에 박히듯 견고해졌네. 나는 별들과 하늘이 그러듯이 그걸 영원히 간직하려고 했지. 잠시 후 그 음식점은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렸어. (2부 220~221쪽)
나는 누구보다 먼저 이 청년이 칭찬받을 만한 작업을 했다는 걸 인정합니다. 물론 긴장한 견습생의 손이 저지른 흠도 있습니다. 풍자도 있고 애도 많이 썼지요. 세부 사항에서 실수를 범하는 심각한 문제도 있을 겁니다. 법적 문제에 저촉될 게 없으니 마지막으로 서문을 마치기 전 쿠노 핀헤르만 박사가 반유대교 지원단의 단장으로서 ‘5장에 나온 환상적이고 어찌할 수 없는 의상’이 가짜라고 말해 달란 사실을 부득이 밝혀 둡니다. (3부 239~240쪽)
작가는 폐습에서 도망치듯 플롯에서 탈주해야 한다는 쇼305의 견해와 달리, 우리는 오랫동안 근본적으로 플롯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다. 문제는 어떤 복합적인 플롯도 관습적인 면이 있다는 거다. 따라서 행위를 이끌고 설명하는 에피소드는 불가피하지만 그게 다 매혹적이지는 않다. 우리가 쓴 두 편의 시나리오는 어쩔 수 없이 이 서글픈 의무를 짊어지고 있다. (4부 320쪽)
바랄트 선생의 타자기에서 마구 쏟아져 나온 여섯 권의 하찮은 이야기를 연구하면서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조합주의 개념에 부여하는 작가의 가벼움이었다. 그 변호사의 소리 나는 장난감으로 단순한 조합적 유토피아 형태를 지체시키고 현재의 질서이자 미래의 확실한 버팀목인 정통 조합주의를 무시한 것이다. (5부 484쪽)
“또 다른 오류지요.” 보나베나가 단정 지었다. “나는 작품에 어떤 미학적 가치도 부여하지 않아요. 이를테면 작품은 고유한 영역을 차지하지요. 작품이 야기하는 감정들, 그러니까 눈물이나 박수, 불편함 따위에는 관심이 없어요. 누구를 가르치거나 감동시키려고 들거나 즐겁게 하려 하지 않았지요. 작품은 그 이상의 것이지요. 가장 겸손하고 가장 고귀한 것, 즉 우주의 한 곳을 지향합니다.” (5부 498쪽)
니에렌스테인은 호메로스부터 막일꾼의 부엌과 주점까지 이어지는 전통을, 이야기를 지어내고 듣는 것을 즐기는 전통을 되살렸다. 그는 자신의 창작을 잘 이야기하지 못했는데, 『오디세이아』와 『천일야화』처럼 가치가 있다면 시간이 이야기를 다듬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문학의 기원처럼 니에렌스테인은 구어로만 남겼고 시간이 흐르면 모두 글로 쓰일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5부 505쪽)
열정적인 편집자들은 루미스의 작품을 여러 언어로 번역하려고 했다. 하지만 작가는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음에도 궤짝을 금으로 채워 줄 카르타고인의 제안을 거절했다. 이런 상대론적 부정주의 시대에 새로운 아담은 언어에 대한 믿음, 즉 모든 이가 접할 수 있는 단순하고 직설적인 말에 대한 그의 믿음을 확인했다. ‘베레모’라는 단어를 쓰는 것만으로 이 전형적인 의류가 내포하는 인종적 의미를 표현하기에 충분했다.(5부 517쪽)
독자는 결과를 알고 있다. 롱게는 소품에 의존하는 연극과 장황한 대사를 남발하는 연극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새로운 연극이 태어났다.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무지한 당신이 이미 배우다. 삶이 대본이다. (5부 533~534쪽)
아이젠가르트의 낭만적인 철야 작업이 추구하던 목표는 완벽히 이루어졌다. ‘아이들러’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기계는 쉬고 인간은 떨면서 일한다.(5부 584쪽)
새벽 1시의 추신. 경련이 다시 시작됐네. 벨을 누르기 위해 기어갈 힘도 없어. 방이 위아래로 울렁거리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네. 타르타르소스에 뭘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기묘한 맛이 가라앉지를 않는다네. 자네들 생각을 하고, 몰리노 식구들을 생각하고, 축구 경기가 열리는 일요일을 생각하고…… (6부 624~625쪽)
하지만 나는 인쇄소와 이야기하다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쓰러지고 말았다. 내가 물려받은 재산으로는 알파벳 A 후반부 Aññ이후의 인쇄에 필요한 종이나 비용을 내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 내 변호사 곤살레스 바랄트는 B로 시작하는 내 이름도 빠져 있으며, 물리적으로 다른 글자를 포함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덧없이 주장한다. 그러고는 내게 가명을 써서 누에보 임파르시알 호텔에 숨어 있으라고 조언한다. (6부 694쪽)
그렇게 몰리네로는 신의 말을 반추했다. 뮤즈가 원할 때 승자의 마차에 멍에를 씌우며! 그런데 시인의 신임을 부인하는 멍청이들이 있다고 생각하다니! (6부 715쪽)
■ 차례
1부 이시드로 파로디에게 주어진 여섯 가지 사건
오노리오 부스토스 도메크 15
서문 18
황도 십이궁 28
골리아드킨의 밤 52
황소의 신 75
산자코모의 예견 98
타데오 리마르도의 희생자 141
타이안의 기나긴 추적 173
2부 두 가지 놀라운 환상
증인 203
증거 217
3부 죽음의 모범
서문에 부쳐 235
등장인물 241
4부 변두리 사람들/믿는 자들의 낙원
서문 317
변두리 사람들 321
믿는 자들의 낙원 405
5부 부스토스 도메크의 연대기
서문 481
세사르 팔라디온를 기리며 485
라몬 보나베나와 함께한 어느 오후 491
절대의 탐구 499
시대에 걸맞은 자연주의 506
루미스의 다양한 작품 목록과 분석 512
추상 예술 519
조합주의자 525
세계의 연극 530
예술이 싹트다 535
그라두스 아드 파르나숨 540
선택하는 눈 547
부족한 것은 해를 입히지 않는다 553
다재다능한 빌라세코 558
우리의 붓: 타파스 561
의상 1 564
의상 2 570
빛나는 접근법 573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되는 것 577
아이들러 582
죽지 않는 사람들 585
긍정적인 기여 592
6부 부스토스 도메크의 새로운 단편들
죽을 때까지 이어진 우정 599
선과 악의 경계를 넘어서 608
몬스트루오의 축제 626
친구의 아들 642
어두움과 화려함 670
영광의 형태 678
검열의 주적(主敵) 687
작품으로 구원받기 695
책임 정하기 708
작품 해설 717
작가 연보 7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