훼손된 기억. 혁명이 변질된 시대.
메마른 현실의 뒤켠을 더듬는, 박경철의 깊이 있는 문제작들!
박경철 소설의 문체는 ‘은폐함으로써 돋보이게 한다’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은폐-기억들의 혼잡한 포개기와 겹치기를 통해, 박경철은 현실과 환상을 가장 좁은 공간 속에 가두어 놓는 데 성공했다. 박경철의 텍스트 내에서는 현실의 이름으로 환상을 매도할 수도 없고, 꿈의 이름으로 현실을 비난할 수도 없다. 현실과 환상이 이렇게 뒤엉켜 있으니, 제대로 살려면, 환상적 현실을 살거나 현실적 환상을 겪어야 한다. 그것이 이 헛된 기억들이 주는 깨달음이자, 작품들이다.
박경철은 현실적 조건 때문에 행동이나 의식이 제한받을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존재 상황을 명쾌하게 형상화하는 작가다.
――하일지(소설가)
박경철 소설의 매력은 집요한 묘사력에 있다.
――이남호(문학평론가)
장편 『염소를 위하여』(1995)와 『헤밍웨이 읽을 시간은 어디로 사라졌을까』(1996)를 발표해 문단에 일약 문제 작가로 발돋움한 박경철의 소설집 『빙어가 올라오는 계절』이 출간되었다. 이 작품집은 94년《세계의 문학》에 발표한 데뷔작 「매향」을 포함, 8편의 중단편을 한데 묶은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박경철은 첫 장편 『염소를 위하여』 발표 후, 평론가로부터 \’젊은 패기와 새로운 추구\’, \’새로운 형식의 가능성\’, \’집요한 묘사력\’, \’예술적인 장인 정신\’ 등을 높게 평가받아 왔다. 그의 두 번째 장편 『헤밍웨이……』 역시 새로운 소설 쓰기를 실험한 작품으로서 독자들로부터 꾸준히 주목을 받아왔다.
1980년대 거대담론,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무너진 후 우리 문학은 급격히 내면화, 후일담화, 자전화된 내용이 일색해 왔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한 개인이나 가족의 내면 풍경을 자못 가볍고 일상적인 것으로 그려온 것이 주류를 차지해 왔다. 이에 대해 박경철은 두 편의 장편을 통해서, 작가가 내면을 형상화하는 방식의 새로움을 보여 주었다. 또한, 집요하리만치 치밀한 묘사를 통해 등장인물의 내면과 사회와의 불화를 밀도 있게 그려내는 것도 그의 장점이다.
훼손된 기억, 혁명이 변질된 시대, 메마른 현실의 뒤켠을 더듬는 문제작들!
이번 소설집은 그의 실험 정신과 묘사력의 극치를 보인 작품들을 모았다는 점에서 각별한 시선으로 작품을 읽는 것이 필요하다. 박경철의 매력은 훼손되고 변질된 현실을 바라보는 웅숭깊은 시선과, 과거 속에 묻혀 버린 자잘한 일상을 들추어 내는 기억의 변주다. 평론가 정과리는 \’박경철의 문체가 모호하며, 생경하고, 의미를 알아채기 힘들게 감추듯이 문장을 쓴다\’라고 지적한다. 요즘 작가들이 대중에 읽히기 쉽게 문학 언어에 대한 고민과 실험 없이 이미지화된 언어만을 쓰는 것에 대해, 박경철은 정성 들여 문장을 쓰는 보기 드문 작가정신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허구의 전략\’이 갖는 효과에 대해 정과리는 \’은폐함으로써 돋보이게 한다.\’라는 명제를 제시한다. 그 은폐-기억의 대상은 박경철의 소설에서는 줄곧 \’과거\’에 있었던 것이며 \’현재\’로 이끌어 내야 하는 현실, 삶, 기억들이다.
박경철이 바라보는 현실은 \’현실로부터의 도피 욕망\’과 관련된 현실 의식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의 각박함과 처절함을 외면하고 있다는 작가의 비판이 포함된다. 박경철이 기억 속에서 이끌어 내고자 하는 것은, 훼손된 가치, 변질된 혁명 정신, 메마르고 차가워진 시선들이다. 그는 이것들을 기억 속에서 이끌어 내 변조를 시키고, 현실에 다시 대입해 보는 작업을 반복한다.
그것이 「매향」에서는 몸을 파는 늙은 창부인 매향의 죽음으로 나타나고, 「페루를 향해 죽으러 가는 새들」에서는 학생운동의 좌절로, 「다락방에 갇힌 새」는 어릴 적의 추억으로, 「모자혁명」에서는 겨우 \’모자 혁명\’으로 변질된 혁명에 대한 환상으로 나타난다.
박경철은 이러한 과거의 기억을 현실에 직접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변주한 후 이를 다시 원-기억 찾기라는 근원적인 작업을 한 후 현실로 이어지게끔 하는 묘한 전략을 쓰는 것이다.
「페루를 향해 죽으러 가는 새들」은 장편소설의 장점인 구성력과 고안력, 그리고 단편의 간결함이 적절히 배합된 중편이다. 이 작품은 좌절된 학생운동의 기억을 더듬는 \’나\’의 과거 뒤지기 속에, 배반자 찾기라는 형식과 빼앗긴 사랑 되찾기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내가 태어나 자란 이 도시에서 매일매일 덧없는 일상을 보낸다. \’나\’는 우연히 \’그(이주호)\’를 발견하고 뒤쫓는다. 1988년경 \’그\’는 \’나\’와 같은 조직에 있었지만, \’나\’를 배반한 자다. \’나\’와 \’그\’, \’시골 주막\’의 주인 털보 시인 그리고 수진은 같은 조직에 있었던 운동권 학생들. \’로동당\’ 가입을 원하는 \’그\’는 미문화원 점거 계획을 세우지만, 뜻하지 않은 방해꾼이 나타나, \’나\’는 경찰에 붙들린다. 다시 5,6년이 지난 현재, \’나\’가 다시 본 도시의 현실은 털보 시인의 죽음, 이주호의 배신, 수진과의 이별이었다. 얼핏 단순해 보이는 줄거리지만, 시간의 순차를 뒤섞은 구성은 기억 찾기라는 형식과 함께 훼손된 가치를 찾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 된다.
「모자 혁명」에는 겨우 \’모자 혁명\’으로 변질된 혁명에 대한 환상이 있다. ①\’나\’는 어릴 때 친구 은영이가 희끄무레한 눈발 속에 점점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기억한다. ②\’칸타빌레\’라는 술집에서 \’나\’는 \’나탈리\’와 혁명의 성공에 대해 기대한다. \’혁명의 정화수가 분수처럼 치솟는다.\’ ③\’나\’와 \’나탈리\’는 혁명 이후 혁명의 지속을 위해 \’모자\’ 공장에서 \’모자\’ 만드는 일을 한다. ④혁명이 좌절되기 며칠 전, \’나\’는 정부군에 포섭되어 정부군이 시키는 일을 한다. \’나\’는 정부군에게서 안전을 보장받고 그 일을 맡게 되고, 정부군은 혁명 모자 대신 \’프로야구 파워매직팀의 모자\’를 건네준다. ⑤\’칸타빌레\’가 폭격을 맞을 때, \’나\’는 나탈리와 같이 있다. 나탈리의 안전을 위해 파워 매직팀의 모자를 씌워주려 하지만, 나탈리는 \’나\’의 배반을 알고 떠나 버린다. ⑥1988년 가을 \’나\’는 신부로서 금식 기도를 하고 있던 중에, 자신을 \’나탈리\’라고 말하는 한 여자의 방문을 받는다. ⑦\’나\’는 \’나\’가 나탈리라고 부르는 여자와 결혼을 하였고, 과거의 기억을 되풀이하여 여자에게 강박한다. 그러나, 여자는 자신이 \’나탈리\’라는 기억을 떠올리려 하지 않는다. ⑧다시 1990년대, 주먹만한 회사의 과장 자리를 꿰차고 앉은 \’나\’는 사회 초년병인 \’나탈리\’라는 여자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렇지만, 그녀의 성적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그녀에게서 버림을 받는다. ⑨\’나\’는 어렸을 때 친구 은영의 방문을 받는다. 그녀는 자신이 나탈리이며 혁명 때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을 한다. 은영은 다시 떠나면서 \’나\’에게 \’당신 또한 과거의 무언가를 삭제하려 드는 게 아니오!\’라고 말한다. 은영은 어린 시절 눈발 속에 점점 사라져가는 자신의 발자국을 보며 \’나\’를 기다렸다는 얘기를 남긴 채 떠난다.
박경철은 「빙어가 올라오는 계절」에서 깔끔하고 여운 있는 색깔을 남기며 인생살이의 진실을 드러낸다.
먼저, 기억의 장소는 이혼에서 출발한다. 중고 가전제품 대리점 서비스맨인 나는 아내와 이혼을 한다. 우연히 빙어잡이를 시작한 나는 빙어잡이가 수지가 맞는다는 것을 알고 매년 빙어잡이를 한다. 빙어잡이 기간이 끝나면 프로야구도 시작된다. 시기를 잡아야 하는 빙어잡이가 끝나면 다른 어족들은 시기와는 상관없다. 프로야구장을 자주 찾는 나는 그러다가 동업자를 만나게 된다. 그 동업자와 함께 매년 빙어를 잡으면서, 생체 시계가 고장난 삶을 살았던 \’나\’는 그에게서 숙명, 운명, 인생살이를 점차 깨달아간다. 이제 그들은 빙어란 놈을 보지 않고서는 봄이란 계절을 맞아들일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진다. 어느 날, 동업자는 \’나\’에게 4번 타자가 없는 야구팀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말해 준다. 그는 어렸을 때 방망이를 잡아본 첫날 홈런을 쳤었다 한다. 감독은 \”네가 진짜 야구선수가 되고 싶다면 앞으로는 절대 홈런을 치지 말라\”라고 했다 한다. 말을 마친 동업자는 실업팀 감독 자리가 마침 났다며 빙어잡이를 그만두련다고 말한다. \’나\’는 문득 깨닫는다. 물론 4번 타자가 홈런을 날리지 못한다면 실망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그가 왜 4번 타자 없는 야구팀을 얘기했는지에 대해서는 \’나\’도 알고 있었다.
이제 그가 없다면 혼자서 빙어잡이를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전국 각지의 저수지에서 은빛나는 유혹을 보내오는 빙어도 이상 나를 불러들이지는 못한다고 느낀다. 그 은빛나는 유혹이 이젠 알루미늄이나 스테인레스 스틸처럼 뭔가 단단한 것으로 변해 버린 것을 느낀다. \’나\’는 열다섯에 첫 홈런을 친 그 동업자의 삶에서 그 홈런이 어떤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는지 비로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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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향 페루를 향해 죽으러 가는 새들 다락방에 갇힌 새 훌라후프를 돌리는 소녀 사진 속의 그녀는 대관령 빙어가 올라오는 계절 모자혁명
해설/정과리 허구의 전략-박경철의 소설들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