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를 생활의 유일한 연장으로 삼은 일엽편주의 삶
아직 낡은 시대에 선보인 찬란한 서정의 조각들
‘이제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거야.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겠어.’ 하고는 두건 겉에서 귀를 누르며 총총히 대여섯 보를 뛰기 시작하자 가슴의 두근거림은 어느새 멈춰 기분이 차분히 맑아졌으며, 핏기 없는 입술에는 쌀쌀맞은 웃음마저 떠올랐다.” ㅡ「배반의 보랏빛」에서
2004년 선보인 일본 화폐의 주인공으로 익숙한 근대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 극심한 가난에 시달린 그녀의 짧은 생을 돌이켜보자면, 고액권 화폐 속 그의 초상은 얄궂은 농담 같다. 아버지와 큰오빠의 죽음으로 16세에 호주가 된 이치요는 실질적인 집안의 가장으로서, 생계 수단을 소설로 삼은 전업 작가다. 메이지 시대 초, 아직 불안정한 미디어였던 ‘소설’에 본인과 가족의 삶을 태우고 나서, 그는 나쓰라는 본명 대신 달마대사가 강을 건널 때 탔다는 일엽편주의 이름을 빌려 이치요(一葉)라 자처한다. 상류층 사교계 등 협소한 세계의 경험, 결혼이라는 대단원 구성이 주되었던 당시 여성 소설의 스펙트럼을 훌쩍 벗어나, 다양한 처지의 여성들 삶과 고뇌를 그려 낸 히구치 이치요의 문학은, 그저 자신에게 떨어진 조건 너머로 본인 스스로 설정한 한층 중요한 것, 즉 문학을 향한 소신을 단호한 에너지로 뿜어낸다.
그간 여러 판본으로 흩어져 있던 서정성 짙은 단편들을 한데 모은 데 더해 상당량의 초역을 실은 쏜살문고 소설집 세 권 『가는 구름』, 『꽃 속에 잠겨』, 『배반의 보랏빛』은 히구치 이치요의 소설 22편 전부를 감상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선사한다. 옮긴이는 젊고도 세심한 번역으로, 작가가 삶의 도정에서 가졌을 법한 사상 내지는 사고의 경향이 헤아려지도록 각 권마다 전·후기작을 아울러 목차를 구성하고 표제작을 선정했다. 3권에는 미완작인 「배반의 보랏빛」을 비롯, 「여름 장마」, 「바다대벌레」 등 이치요의 명단편이 담겨 있다. 이번 소설집 표지를 장식한 일러스트레이터 마리아 메뎀의 단순하고도 상징적인 선과 색상은, 지난 시대이자 먼 공간에 자리한 소설가의 목소리와 어우러지며 색다른 울림을 조성한다. 현실의 진창 속에서도 줄곧 추구하고, 끝내는 붙잡아 낸 히구치 이치요의 진실이 발하는 빛을 마주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눈물이 적신 무거운 소매,
그 끝으로 나와 맞잡은 우정의 두 손
유코가 고마워서 오야에의 손을 잡고 “전생에 우린 무슨 사이였을까. 친자매한테도 없을 배려구나. 이 뒤에도 잘 부탁한다. 앞으로는 특별한 일이라면 뭐든지 네 충고를 따르마. 이제 방금 전과 같은 말은 하지 않을 테니 용서해 주렴.”이라고 하자 오야에는 사과를 받기도 황송해,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하잖아요.” 하고 가벼운 듯이 말했지만, 의리는 무거웠기에 눈물에 젖어 무거운 소매는 마를 새가 보이지 않았다. …..한 가지를 꺾어서 한 송이는 주인에게, 또 한 송이는 자기에게 꾸며 보는 것도 기분을 풀어 주는 일이었다. 각자 서로의 마음은 알 수도 없이 논두렁길을 오가며 놀다 어느덧 해가 저물었다. ㅡ「여름 장마」에서
흔히 이치요 문학은 냉담한 세계를 향해 부르짖는 외톨이의 고독한 외침이라 표현되지만, 그 속에는 귀한 우정이 고요히, 그러나 눈에 띄게 빛을 발한다. 특히 신분을 넘어선 소녀 간의 갈등과 우정을 다룬 「여름 장마」는 여러 날을 거듭해서 비가 내리지만, 사계 속에서 보면 잠깐의 궂은 시기에 불과한 장마처럼,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하면서도 해가 저물도록 시간을 함께 보내는 거룩하고도 소박한 우정의 온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궁핍하고 외로운 삶을 절절히 경험한 만큼, 이치요는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일깨운다. 그의 문학 안에서 지배와 피지배의 계층적 질서는 그저 일시적인 현상이자 겉껍질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가진 자, 배운 자의 크게 타이르는 소리보다
연약한 생의 나직한 목소리에 귀 기울인 기록
이 아이의 웃는 얼굴처럼 바로, 눈앞에서 집을 뛰쳐나가려 한 제 발을 붙잡아 주거나 틀어진 마음을 가라앉혀 준 건 없어요. 무심히 팥베개를 베고 양손을 어깻죽지에 내던지며 잠들어 있을 때 보이는 이 아이의 얼굴은, 대학자가 머리 꼭대기에서 큰소리로 타이르는 것과는 다르게 마음으로부터 눈물을 차오르게 하기에, 아무리 제가 고집이 세다고 하지만 저도 “아이는 조금도 불쌍하지 않다고요!” 하며 억척 부리지는 못해요. ㅡ「이 아이」에서
새로운 시대, 자본주의의 파도로 에도적인 일상이 난파되던 시점, 실제 자신이 중류계급에서 빈곤층으로 전락하고 고된 육체노동을 체험하면서, 이치요는 인간을 인위적인 신분으로 구별하는 허상을 깨달았다. 진실은 여성과 아이, 처참한 처지의 사람들에게서 구해야 할 것을 안 이치요의 문학은 한 인간의 본질과 그를 뒤덮은 표피를 예리하게 발라낸다.
이치요의 후기 명작 「바다대벌레」는 하급관료로서 소박하게 사랑하며 살고자 했던 요시로가 아내를 잃고 나서 물불 가리지 않고 돈을 좇는 붉은 귀신으로 변하는 과정을 담았다. 차별과 억압이 어느 때보다 심했던 메이지 시대에, 쉽게 입신양명하지 못하는 자아, 맺어지지 않는 사랑, 가련한 밑바닥 인생을 제 삶과 견주며 이 차가운 세상을 뜨겁고도 섬세한 필치로 그려 냄으로써 이치요는 낡은 시대의 변화의 여명을 길어 올렸다.
다마다스키
여름 장마
경상
눈 오는 날
캄캄한 밤
처마에 걸린 달빛
이 아이
바다대벌레
배반의 보랏빛
작가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