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속에 잠겨

히구치 이치요 | 옮김 강정원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20년 8월 21일 | ISBN 978-89-374-2973-6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13x188 · 200쪽 | 가격 9,800원

시리즈 쏜살문고 | 분야 쏜살문고

책소개

글쓰기를 생활의 유일한 연장으로 삼은 일엽편주의 삶
아직 낡은 시대에 선보인 찬란한 서정의 조각들

편집자 리뷰

“그림을 배워서 뭐 하려고.” 하고 다시 물은 데에 “그리울 때 모습을 그려서라도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요.” 하는 말을 듣고 요노스케는 더는 물을 수도 없이 홀로 가슴속으로 눈물지었다. ㅡ「꽃 속에 잠겨」에서

2004년 선보인 일본 화폐의 주인공으로 익숙한 근대 소설가 히구치 이치요. 극심한 가난에 시달린 그녀의 짧은 생을 돌이켜보자면, 고액권 화폐 속 그의 초상은 얄궂은 농담 같다. 아버지와 큰오빠의 죽음으로 16세에 호주가 된 이치요는 실질적인 집안의 가장으로서, 생계 수단을 소설로 삼은 전업 작가다. 메이지 시대 초, 아직 불안정한 미디어였던 ‘소설’에 본인과 가족의 삶을 태우고 나서, 그는 나쓰라는 본명 대신 달마대사가 강을 건널 때 탔다는 일엽편주의 이름을 빌려 이치요(一葉)라 자처한다. 상류층 사교계 등 협소한 세계의 경험, 결혼이라는 대단원 구성이 주되었던 당시 여성 소설의 스펙트럼을 훌쩍 벗어나, 다양한 처지의 여성들 삶과 고뇌를 그려 낸 히구치 이치요의 문학은, 그저 자신에게 떨어진 조건 너머로 본인 스스로 설정한 한층 중요한 것, 즉 문학을 향한 소신을 단호한 에너지로 뿜어낸다.
그간 여러 판본으로 흩어져 있던 서정성 짙은 단편들을 한데 모은 데 더해 상당량의 초역을 실은 쏜살문고 소설집 세 권 『가는 구름』, 『꽃 속에 잠겨』, 『배반의 보랏빛』은 히구치 이치요의 소설 22편 전부를 감상할 수 있는 드문 기회를 선사한다. 옮긴이는 젊고도 세심한 번역으로, 작가가 삶의 도정에서 가졌을 법한 사상 내지는 사고의 경향이 헤아려지도록 각 권마다 전·후기작을 아울러 목차를 구성하고 표제작을 선정했다. 2권에는 이치요의 최고 단편이라 불리는 「키 재기」를 비롯, 「섣달그믐」, 「십삼야」 등 수작들이 빼곡 담겨 있다. 이번 소설집 표지를 장식한 일러스트레이터 마리아 메뎀의 단순하고도 상징적인 선과 색상은, 지난 시대이자 먼 공간에 자리한 소설가의 목소리와 어우러지며 색다른 울림을 조성한다. 현실의 진창 속에서도 줄곧 추구하고, 끝내는 붙잡아 낸 히구치 이치요의 진실이 발하는 빛을 마주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돈 없는 사람도, 돈 많은 사람도, 돈에 놀아나는 돈의 세상 한가운데에서

하여간에 돈의 세상에서는 고상하다느니 정교하다느니 해 봤자 결국은 거래되는 시세 위에 놓이는 것이다. 도매상이 좋은 평판의 물건을 가장 고마워한다는 건 무릇 어디서 나오는 말일까. 역시나 나라를 팔아먹는 간사한 장사치들에게 휘둘려 값을 깎고 또 깎는 것일 터다. 그러잖아도 미약한 기술은 목이 꺾이고 있는데 아직도 무명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수지에 맞지 않게 도매상에서 하청받은 일을 하는 데 시간을 아끼고 비용을 줄이니 열 개가 하나 값인 조잡한 그림에 함부로 붓을 놀리는 것이다. ㅡ「파묻힌 나무」에서

실력은 있지만 뒷배 보아줄 사람이 없어, 세상에서는 무명이나 다름없는 「파묻힌 나무」 속 라이조의 어려움은, 꼭 지금 이야기 같다. ‘돈의 세상’에서 ‘고상’과 ‘정교’를 추구하는 미련하고도 고매한 이상을 좇는 것은 일견 이치요 작가의식의 반영일 터다. 다른 작품 「섣달그믐」은 이치요의 문학에서 보기 드문 유쾌한 희극으로 돈에 관련한 소동을 다룬다. 부모 없이 가난한 삼촌 집에서 자라다가 살림을 돕기 위해 부잣집의 하녀가 된 오미네의 쌀통 하나 없는 처지는 비극으로서의 충분조건이지만, 막다른 처지에 몰려 주인의 돈에 손을 댄 오미네에게 수호신이 나타난다는 설정은 다감하다. 주인집의 철부지 아들이 돈을 홀랑 들고 가출하면서, 오미네의 위기는 극적인 소강상태를 맞이한다.

한 가락 거문고 소리가 구원하는 한 생의 무게

그런데 마음 깊숙한 곳에 잦아든 다정함이 삼경 월하의 거문고 소리와 어울리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달빛이 점점 맑아지는 밤, 울타리에 핀 국화의 향기가 논바닥을 메우는 가운데 밤바람이 세차게 불며 마음의 구름을 날리자 다시 타는 거문고의 소리는 과연 백년의 벗이 될까, 백년의 번민을 남길까. 긴고는 이로부터 백화난만한 세상으로 나섰다. ㅡ「거문고 소리」에서

녹록지 않은 세태 속에서 이름난 도적이 되어 자포자기한 채 살아가는 「거문고 소리」의 긴고는 어느 날 거문고 한 자락을 듣는다. 이날의 거문고 소리는 “덧없는 세상에 사람 한 명을 낳”는 온정을 베푼다.
구시대적 활기와 메이지 시대의 어둠, 아이다운 익살과 유년 끝의 슬픔이 교차하는 이치요의 대표작 「키 재기」의 주인공 미도리는 쾌활한 예비 유녀다. 미도리가 내심 짝사랑하는 신뇨는 주지의 아들로, 절을 이어받아 운영해야 한다는 주변의 기대를 짊어지고, 승려 수행에 나서기 전에 수선화 한 송이를 미도리의 집 격자문에 몰래 꽂아 두고 떠난다. 히구치 이치요가 1년에 걸쳐 잡지에 연재한 이 작품은 모리 오가이, 고다 로한 등 당대 문학가들에게 격찬받으며, 이치요를 일약 문단의 총아로 자리매김시켰다. 어릴 적부터 서로 키를 재 보던 허물없는 사이에서 어느덧 사랑의 미묘한 감정에 번민하는 성인의 문턱에 선 존재들을 예리하고 아름다운 문어체로 포착한 이 작품은 연약한 존재들이 가난과 세상의 풍모에 스러지기 전에 빛을 발하는 찰나의 화양연화를 오롯이 담아낸 히구치 이치요 문학의 정수다.

목차

파묻힌 나무
거문고 소리
꽃 속에 잠겨
섣달그믐
십삼야
키 재기
작가 연보

작가 소개

히구치 이치요

히구치 이치요는 일본 근대 여성 문학의 선구자이자 여성 서사의 신경지를 개척한 인물이다. 2004년 일본 5000엔권의 도안으로 선정되며 화제를 모았다. 본명은 나쓰(奈津), 1872년 도쿄에서 하급 관리의 딸로 태어났다. 유년에는 중산층 가정에서 고전 문학을 접하는 등 비교적 모자람 없이 배우며 자랐으나, 큰오빠를 폐결핵으로 잃고,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마저 병몰하며, 방년 18세에 파산과 동시에 파혼을 당한다. 이에 일가 호주로서 이 상황을 타개하고자 소설을 써 돈을 벌기로 결심하는데, 이는 지인의 성공 사례에서 동기를 얻은 것이었다. 1892년 「어둠 진 벚꽃」으로 문단에 등장한 이래 「파묻힌 나무」로 호평을 얻지만 생활고는 여전했다. 급기야 요시와라 유곽 근처에서 잡화점을 운영하는 가운데 「꽃 속에 잠겨」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집필에 매진하기 위해 폐업한 이후 ‘기적의 14개월’이라 불리는 기간 동안 「섣달그믐」, 「가는 구름」, 「도랑창」, 「십삼야」, 「키 재기」 등 수작을 완성한다. 「배반의 보랏빛」으로 문학적 전기를 꾀한 듯하나 「바다대벌레」에 모티프를 제공하고 미완에 머물렀다. 1896년 11월, 25세에 폐결핵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강정원 옮김

대구에서 태어났다. 부산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한 후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독자 리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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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쏜살문고] 꽃 속에 잠겨
코양이 2024.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