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적이지만 결코 여성적이지만은 않은 특유의 직관과 통찰로 시 시계를 펼쳐 온 김승희의 시는 시대를 넘어서 누이를, 아내를, 어머니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신랄한 프리즘이라 할 만하다. 시인의 시집 『왼손을 위한 협주곡』은 ‘날카로운 직관을 통해 한국 사회의 정신적 상처와 기쁨을 이해하기’ 위한 고전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리기에 충분하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 김승희의 등단 30년을 기념하여, 시집 『왼손을 위한 협주곡』이 민음사의 ‘오늘의 시인 총서’ 스무 번째 목록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올해로 등단 30년을 맞이하는 김승희는 1973년에 시로, 1994년에는 소설로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래 특유의 여성적인 글쓰기와 시작(詩作) 세계를 선보였다. 그녀는 시 「그림 속의 물」로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산타페로 가는 사람」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바 있다.
제목에 나오는 ‘왼손’이 가리키듯, 이 시집에서 시인은 ‘배꼽’으로 표상되는 나의 어머니, ‘포장육처럼 냉동실 안에 저장’된 죽어간 아이를 바라보는 어머니로서의 나, 그리고 더 나아가 ‘멸치 한 움큼과 미역 한 바리 그리고 싸구려 헌 옷’으로 분장한 야시장터의 민초들과 같은 소외당한 비주류와 나약한 주변인들을 위한 협주곡을 연주하고 있다. ‘지옥의 코드’, ‘신비 화음’, ‘연가’, ‘광시곡’, ‘모음곡’ 등의 제목으로 이어진 각 부들 또한 하나의 협주곡을 향해 변주되는 악장과도 같다.
그대여, 당신이 누구든지 간에, 당신의 배꼽을 보여 준다면, 나 그대를 사랑하겠습니다, 더럽게 뒤엉긴 자그만 동그람이 굽이굽이 꼬불쳐진 그대의 서러운 배꼽도 나의 배꼽과 똑같이 부끄러운 죄와 어리석은 욕망이 고불고불 서리서리 끼어 있을 테지요, 그대여, 어둠의 태 속에서 영문 모르고 튀어나와 정처없이 죄를 짓고 죽어 가는 그대여, 그대여, ― 「배꼽을 위한 연가 1」 중에서
쭈그러진 목청에서 기름진 흥타령이 / 솟구쳐 나옵니다 /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 누추한 인생은 잠시 벗어 두고, / 여기, 한마음의 신명에 / 휘어잡혀 있습니다. // 멸치 한 움큼, 미역 한 바리, / 그리고 싸구려 헌 옷들은 모두 그들의 분장입니다 / 팔아도 팔아도 안 팔리는 / 한마음의 신명을 위하여 / 여기 서투른 부장을 하고 수줍게 서 있습니다 ―「야시장터에서 4」 중에서
그러나 딸로서, 어미로서, 그리고 아내라는 존재로 일생을 살아 가는 여성들의 삶에 대한 밀착된 시선이 결코 온화하거나 아름답지만은 않다. 오히려 예리하게 날이 선 언어로 그려진다. 김열규는 그런 김승희의 시를 가리켜 “태양의 양수 속에 타오르는 동통(疼痛)의 신명”이라고 한다.
시집 『왼손을 위한 협주곡』을 읽으면서 우리들은 낯선 말들의 이방에 내던져진다. 뜻밖의 낱말, 엉뚱한 표현, 당돌한 비유법, 그리고 예기치 못한 형상들 사이에서 우리들의 헤매게 된다. 그러면서 필경 그것들을 말이라고 부를 것인가 어떨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말이 있으면 이내 친숙한 어떤 상황이 형성되곤 하던 우리들이 평소의 경험은 아무짝의 소용도 없게 된다. 말이 이해이며 타협이란 생각은 버려야 한다.말의 낯설음, 그 이질감 혹은 이화감은 김승희의 시의 본성의 하나다. 그녀의 시를 읽는 동안, 독자들은 눈이 따가운 경험을 할 것이다. 눈을 후벼파는 듯한 따가움, 눈알에다 후추가루라도 뿌려 대는 듯한 자극 없이 그 시를 읽을 수가 없다. 눈동자가 아려 오면서 우리들은 그녀의 시의 내핵에 접하는 어떤 예감을 갖게 된다. 감각적인 아픔이 무엇인가 정신적인 아픔과 맺어져 있으리라는 예감을 갖게 된다. 그것은 독자들이 그녀의 말의 낯설음으로 해서 갖게 되는 시다림이 그녀 자신이 그 말들을 더불어 진통하고 경련하고 몸부림치고 있는 정신적 통증의 생리적 위증후군이라는 것을 눈치채기 비롯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인이 삶의 고뇌로 뒤적이고 비트적거릴 적마다 덩달아 그 말이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김열규, 「태양의 양수 속에 타오르는 疼痛의 신명」(1983)
이는 김승희의 시편들에 등장하는 ‘왼손’의 삶이란 통상 시를 장식하는 미사여구나, 하다못해 익숙한 시어의 사용조차도 허락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대한 방증일 수 있다. 낯설고, 이질적이고, 자극적인 시어들은 ‘감각적인 고통이 정신적인 고통과 맺어져’ 있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아픔의 미학’, ‘슬픔의 미학’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아픔과 슬픔이 뒤범벅된 시편들이다. 독자들은 김승희의 시에서 평화와 안식을 찾기란 힘들 뿐더러, 오히려 자신들이 믿고 있던 평화와 안식마저 송두리째 무너지는 삶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더불어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이 1983년에 처음 출간되었을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과도 맞물렸음을 고백하는 시인의 말은 전체 시들에 면면히 흐르는 외재적인 주제 의식에 대한 확대 해석까지 가능함을 시사한다.
박정희 독재의 암울한 상황에서 극심한 죽음 충동에 사로잡혀 나온 시가 「왼손을 위한 협주곡」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잘못된 세계를 파괴하고 싶다는 욕구의 소산이었다. ― 좌담 ‘여성문학을 이야기한다’(2002)
그러므로 이 시집에 실린 시편들은 소외된 삶의 고통에서 출발해, 나라 전체를 고통에 빠뜨린 시대적인 맥락과, 그 안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시인의 억압된 영혼의 분출 욕구를 표백한 바라 할 수 있다.등단 이래로 여성적이지만 결코 여성적이지만은 않은 특유의 직관과 통찰로 시 시계를 펼쳐온 김승희의 시들은 시대를 넘어서 누이를, 아내를, 어머니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신랄한 프리즘이라 할 만하다. 더불어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변함없는 감동을 전하는 김승희의 시집 『왼손을 위한 협주곡』은 ‘날카로운 직관을 통해 한국 사회의 정신적 상처와 기쁨을 이해하기’ 위한 고전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리기에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