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손에는 빵을, 다른 손에는 펜을 든
아가씨-시인의 탄생
2014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한 심민아 시인의 첫 시집 『아가씨와 빵』이 ‘민음의 시’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시인은 ‘아가씨’라는 호칭이 불려 온 맥락을 거부하며 ‘아가씨’의 자리를 새로 쓴다. 시인이 그리는 아가씨는 낭만적 사랑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아가씨도, 현실을 모르는 철없는 말괄량이도 아니다. 묵직한 빵을 한 손에 든 노동하는 아가씨다. 도시에서 마주하는 삶의 누추를 꾸밈없이 바라보며 “산 것 특유의 구린내가 나는” 일상을 성실히 가꾸어 나가는 아가씨. 그는 일상의 어려움을 초식 동물의 부드러움으로 무찌르고, 삶의 부조리에 식물의 싱그러움으로 투쟁한다. 그의 스텝은 절룩일 때조차 씩씩한 모습이다. 이 아가씨-시인은 “우울한 사람들이 모여 차 한 솥”을 나눠 먹자고, 함께 “깨지지 않는 밤”을 보내 보자고 손을 내민다. 노동하는 아가씨에게, 세상의 모든 ‘휴먼 빙’들에게.
■ 더 데일리 휴먼 빙
어떻게 사나요?
가슴을 베어 내고 살지요
가슴을 베어 내는 건 무엇인가요?
저녁 식탁을 차리는 일이지요
―「우아하고 전지전능한」에서
『아가씨와 빵』에는 매일매일 노동하는 인간의 삶이 있다. 더 데일리, 휴먼 빙이다. 이들이 살아가는 공간은 날것의 비린내가 차오르고 아침마다 어김없이 배고픔과 피곤이 찾아오는 “도시의 샅”이다. 피어나고 부패하는 생물의 세계, “젖은 털과 마른 손톱”이 끝없이 자라나는 징그럽게도 악착스러운 생존의 세계다. 그곳의 휴먼 빙들은 부지런히 일상을 가꾸어 낸다. 그것은 “매일의 미세하고 엉망인 날씨 속에/ 없는 이빨로 밤을 밤새, 기어이 뜯어 먹는” 일이다. 매일 저녁 피곤한 사람들이 모여 청유형의 대화를 나눈다. 오늘 밤을 거대하게 만드는 노래를 최선을 다해 불러 봅시다, 우리 함께 먼지투성이의 아침을 씻으러 갑시다, 라고. 누구도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모르는 채로”, “아직 모르는 말로” 서로 용기 내어 남아 보자고 시인은 말한다. “가슴을 베어 내며” 이들이 나누는 저녁 식탁은 몸으로 나누는 생물성의 위로, 맨살의 에로스다.
■ 토끼의 기분을 헤아리는 아가씨
현실보다 소설에 자신 있는,
빌어먹는 작은 아가씨는
빵의 전생을 생각하는 작은,
아주 작은 취미를 가지고
―「아가씨와 빵」에서
심민아의 ‘아가씨’는 “현실보다 소설에 자신 있는” 아가씨다. 또한 문학 속에 산다는 것은 “기어이 폐를 끼치는 것”, “수챗구멍의 반쯤 썰린 쌀알을 우글우글 세는 것”임을 잘 아는 ‘휴먼 빙’이다. 이 아가씨는 먹고살기 위해 또 다른 ‘아가씨’의 노동에 기대고 있음을 알고 있다. “설거지 후의 물기가 덜 마른 엄마”, “철쭉 같은 할머니들”, “우울한 혀를 가진 언니들”은 아가씨의 다른 이름이다. 아가씨의 또 다른 이름은 “죽고 없는 여자들”, “물을 길어다 제 핏줄을 빨고 있는 여자”, “오래전에 귀를 잃은 여자”. 이 여자들은 죽음과 삶, 인간과 동식물의 경계를 흩트린다. 토끼의 기분을 헤아리고 펠리컨의 붉은 내장을 생각하며, 가슴에는 주렁주렁 녹색 주머니를 달았다. 『아가씨와 빵』은 이 수줍고도 도발적인 여자들을 ‘아가씨’로 호명하며 ‘아가씨’의 새로운 자리를 마련한다.
■ 본문에서
눈이 오고,
엄마가 나를 낳는다
(나는 커다랗게 잠을 잔다)
엄마랑 나랑 사이좋게 피를 흘린다
죽고 없는 여자들이 우중우중 모여든다
―「생일」에서
빵 주머니에 얼굴을 처박은
우울한 아가씨예요
희미한 영혼이 쐬는 안녕, 빵의
두툼한 어깨에 누워서 느끼는
빵의 정직한 콧김
현실보다 소설에 자신 있는,
빌어먹는 작은 아가씨는
빵의 전생을 생각하는 작은,
아주 작은 취미를 가지고
―「아가씨와 빵」에서
아무도, 무엇도 깨지지 않는 밤이기를
우리가 대신 모르고,
우리가 대신 빨간 코를 달기로 하십시다
내팽개쳐진 모든 게 기적처럼 중력을 이기고
가장 가까운 이의 두툼한 손바닥에
적당히 그렇게, 그린 듯이 안착하기를
―「더 데일리 휴먼 빙7」에서
우울에 재능 있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서
사과를 깎습니다, 차를 한 솥 끓입니다
둥글게 이어 깎던 껍질이 끊어지면
머리를 모으고 통곡을 합니다
우울에 재능 있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서
차를 마십니다, 마실수록 묽어져서 더욱 슬퍼집니다
―「더 데일리 휴먼 빙5」에서
■ 추천의 말
낭만적 사랑의 속옷을 걸치지 않은 맨살의 에로스다. 사랑의 에로스가 아니라, 생물의 에로스다. 생물의 에로스가 언어의 에로스에 입 맞추고, 언어의 에로스가 생물의 에로스를 포옹한다. 언어와 몸은 함께 춤추며 뛰어간다. 심민아의 첫 시집이다.
―김행숙(시인)
심민아의 첫 시집 『아가씨와 빵』은 보고 듣고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본 것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들은 익숙한 감각이 아니다. 마치 세이렌의 노래처럼 반복적인 리듬에 휩싸인 언어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이상한 감각들로 온통 “범벅”된 모르는 세계를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김근(시인)
1부
우아하고 전지전능한 13
핑거 라이트 16
선량한 이웃 19
양파 껍질이 흩날리는 방 21
나의 베개 동생 23
와일드 오키드 28
님포마니악 31
맥주와 감자와 애인 34
거의 모든 것의 유니콘 37
프러시안 블루 40
엉덩이 드라이브 42
캐주얼하게 하는 인사 47
2부
생일 53
녹아요 54
속삭이는 것처럼 56
식구 58
젊은 사람들끼리 하는 인사 59
더 데일리 휴먼 빙6 62
단(單) 64
모레의 없음 65
더 데일리 휴먼 빙4 67
비밀 예배 70
누더기와 뼈 72
2월 75
핑크 인 디 애프터눈 77
3부
봄 83
디어 라넌큘러스 84
이제와 항상 영원히 87
친애하는 초록에게 89
크레이지 서울 라이프 93
리빙 데드 98
아기 ― 곰이 되고 싶어요 101
토끼의 식탁 104
엄마 106
할로윈 드롭스 107
진흙의 기원 109
당신은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습니까 113
4부
아가씨와 빵 121
밤 124
생일2 ― 고은이에게 126
더 데일리 휴먼 빙7 127
스모크 블루 130
더 데일리 휴먼 빙2 132
스톤 블루 135
비와 들개 136
더 데일리 휴먼 빙5 139
더 데일리 휴먼 빙8 142
우유가 들어간 144
더 데일리 휴먼 빙1 147
작품 해설–민승기(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도깨비와 엉덩이의 세계 151
추천의 글–김행숙, 김근 1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