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든 거처 위를 유랑하는 20세기 난민들
무작위로 클로즈업되는 가지각색의 눈동자
내가 없는 동안 파리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1917년부터 시작된 도덕 면의 혁명적인 변화를 확인시켜 주었다. 한 세대가 전쟁에서 돌아왔다. 그들은 과거를 혐오하고 미래를 알고 싶어 했다. 또 자신들에게 미래를 설명해 주고 새로운 세상과 자신들이 살고는 있지만 잘 모르는 세계의 지리를 알려 줄 사람들을 찾았다.
1차 대전 이후 곳곳에서 혁명을 겪은 유럽의 풍경, 그중에서도 도덕적인 긴장을 의식/무의식적으로 해제한 젊은이들의 동요를 그린 폴 모랑의 소설집 『밤을 열다』(1922), 『밤을 닫다』(1923)는 연달아 나오며 당대 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한다. 작가는 이 인기에 대해 “(어떤) 책의 성공은 종종 사람과 그 사람이 살던 시대의 만남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겸양했다. 그러나 한 사람, 그것도 여럿의 사람을 압축해 낸 단 한 사람과 시대의 교차점을 끄집어내고, 이를 본인 최적의 러닝타임으로서 갈무리해 내놓는 작가는 흔치 않다. 독자의 감정이입이 쉬운 장편도, 작가의 절묘한 기지를 뽐내기 좋은 단편도 아닌, 폴 모랑의 중편 소설들은 그래서 귀하다.
요약은 잘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호해서, 나중에 다시금 돌아와 연구해 보려고, 왜인지는 모르지만 마음에 들어서 그어 놓은 독자의 밑줄들은 20세기 초에도 그랬듯 정확히 100년 뒤인 오늘도, 낯설지만 기꺼운 문학적인 탐험을 인도해 줄 것이다.
나는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유명인이 되었소. 말하자면 국제적이 된 거요. 그때 나는 보기 좋게 골탕을 먹었소. 내 나라를 과도하게 추구한 나머지 나는 조국을 잃고 말았소. 이제 해야 할 일은? 회의주의자인 채로 죽어서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는 것, 그리고 조금 전에 당신한테 조언했던 것처럼 최대한 일찍 전설 속으로 도피하는 일이오.
「포르토피노쿨름의 밤」에서
외교관이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두루 여행하고 시대정신을 흡수하면서, 폴 모랑은 궁극적으로는 오류임에 분명할, 국적과 영토와 거기 자란 사람에 대한 선입견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한다. 「포르토피노쿨름의 밤」의 휴양지 호텔에는 아일랜드의 늙은 지성이 앉아 있다. 그의 “주변에서는 모든 상황이 들뜨고 기발하고 익살스러운 희가극같이 되어 버렸고, 어쩐지 격하면서 게을렀”는데 이는 “아일랜드의 기질”이다. 「샤를로텐부르크의 밤」에선 깔끔한 독일인 신사의 집에 머무는 하숙인이 맞게 되는 기묘한 밤이 그려진다. 수십 마리의 뱀을 풀어놓고 하숙인을 놀래는 집주인은 귀족 성을 쓰면서 가난하게 사는, 한때 진보를 믿었던 독일인이다. 「바빌론의 밤」에는 성공가도를 달려온 파리의 굵직한 정치가가 등장하여 마치 은퇴 예고와도 같은 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읽는 사람은 오히려 지금이 그의 인생 출발점이라고, 그는 인생과 운명이라는 거대한 것 앞에 신참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된다. 「퍼트니의 밤」에는 역사의 무자비한 기복과 굴곡 속에서도 자기를 계발하고 그 값을 끌어올리는 순발력 넘치는 미용 기술자가 나오는데, 그의 무용담은 마치 “바그다드 위로 날아가는 마법의 양탄자, 열여덟 개의 황금 나팔 소리에 무너지는 가난”만큼이나 흥미롭다.
이런 도시의 위험에 대한 나의 무관심을 기억하고 있다. 위험한 사람들과 책들이 나의 금욕적인 젊은 시절을 유지해 주었었다. 입법부에서 근무하던 초기, 대학로에 위치한 가구 딸린 내 방에서 나는, 마치 고인을 기리기 위해 늘 식탁에 그의 식기를 차려 두는 집에서처럼 이곳 파리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코미디를 비웃곤 했다. 사람들은 관례적인 몸짓들, 말장난들, 떼었다 붙였다 하는 칼라, 남들은 모방할 수 없다고 생각한 일화들을 끊임없이 반복했지만, 그러나 실상 아무것도 없었다.
「바빌론의 밤」에서
포르토피노쿨름의 밤
샤를로텐부르크의 밤
바빌론의 밤
퍼트니의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