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포착하기 위해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결항과 파국의 미학
김성대 신작 시집 『나를 참으면 다만 내가 되는 걸까』가 ‘민음의 시’로 출간되었다. 김성대 시인은 전통적인 서정의 문법에 기대어 있으면서도 기존의 발성법으로 표현할 수 없는 낯선 언어를 선보이며 ‘실험적 존재론’을 확립해 왔다. 첫 시집이자 김수영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귀 없는 토끼에 관한 소수 의견』이 자기 정체성을 확정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수많은 “귀 없는 토끼”들을 위한 “소수 의견”을 제출했다면 두 번째 시집 『사막 식당』은 경계를 지워 가며 감각의 기저 세계를 무너뜨렸다. 그로부터 6년 만에 출간되는 세 번째 시집에서 시인은 기저가 사라진 세계 위에서 인간의 유동하는 정체성을 탐구한다. 앞선 두 시집에서 집중한 테마를 결합해 한층 원숙한 목소리를 만들어 낸 이번 시집에서는 ‘나’에게서 비롯된 모든 것들이 공기 중에 표류한다. 그것은 흡사 메아리 같다. “지르지 못한 소리로 빠져나가는 메아리”, “탈색된 소리로 푸석거리는 메아리”, “숨 막히게 파고드는 살의 메아리”, “숨죽이며 타들어 가는 뼈의 메아리”…… 출발한 소리가 벽에 부딪쳐 출발한 곳 가까이 되돌아오는 이 메아리의 길은 김성대만 그릴 수 있는 자아의 회로다. 우리 시대의 “메아리 수집가”, 김성대가 돌아왔다.
■ 나는 나를 연습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연습하지 않으려 한다
나에게 닿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린다
다른 누구일 수 있다는 생각을
-「또 다른 기일」에서
도달할 내가 없기에 나는 나를 연습하지 않는다. 반복될 핵심이 없기에 나는 나를 연습하지 않는다. 나를 참으면 다만 내가 된다는 문장에는 나와 대립적인 것이 결국 나를 이루는 역설적인 세계관이 담겼다. 시집에는 ‘마조라나 페르미온’이라는 제목의 시가 2편 나온다. ‘마조라나 페르미온’은 스스로가 스스로의 반입자인 소립자를 뜻하는 말이다. 우리는 많은 순간을 인내하며 버틴다. 그것이 진정한 자아를 찾는 방법이라 여기면서. 그러나 그 많은 습관성 인내는 자아라는 허상과 환상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나를 찾는 것은 사실상 “나에게 위조되어 있”는 누군가를 찾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대립자인 반목의 이미지 안에서 시인은 무구한 자아의 역사를 다시 쓴다.
■ 이제 가슴을 잃어요. 그게 있어 힘들었잖아요.
등을 잃었다
가리고 가려도 등이 없다
등을 잃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가 없다
(중략)
등을 잃은 게 나뿐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밤중에 등을 고르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등받이를 모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등을 잃었다」에서
시인은 없는 등을 토닥이는 모양을 두고 “텅 빈 자세”라고 말한다. 등이 없어서 가릴 수도 없고 가리킬 수도 없는 부재의 상태. 하나씩 둘씩 “나를 추려”내고 나면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건 뭘까. 등을 잃은 사람을 바라보던 화자는 이제 가슴을 잃어버리라고 말한다. 그게 있어 힘들지 않았느냐고. ‘나’에 대한 환상을 부수어 자아의 역사를 다시 쓴다는 것은 연못에 빠져 있는 ‘마음’이라는 돌을 들어내는 일과도 같다. ‘나’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한다는 것은 내가 욕망하는 것의 역사도 다시 쓴다는 말이다. 『나를 참으면 다만 내가 되는 걸까』를 읽는 동안 우리는 잃어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결핍은 상실이 아니다. ‘나’와 반복하는 ‘나’를 인식하는 일은 분명 “사람의 슬픔”임에 틀림없지만 슬픔을 통해 원숙해지는 것이야말로 사람의 일이기 때문이다.
■해설에서
김성대의 세 번째 시집은 언어를 통해 드러나지 않는 세계의 얼굴과 그것에 귀속된 시적 주체 ‘나’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시인은 죽음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현실에 속하는 이마고처럼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얼굴이자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얼굴인 ‘그것’을 포착하고, ‘그것’이 ‘나’의 삶에 개입하면서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고 있다고 진술한다. (중략) 김성대에게 시는 매순간 다시 태어나는 얼굴이다. 그것은 낯설고 모호한 것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기적의 얼굴이다. -장은영 (문학평론가)
■ 추천사
나와 나의 괴뢰를 구분하기 위해 체를 흔드는 손이 있다. 체가 걸러내는 ‘나’는 누구이고 걸러내지 못하는 ‘나’는 누구인가. 체를 통과하는 ‘나’는 누구이고 남아 있는 ‘나’는 누구인가. 나를 인내하며 내가 되어 가는 역설적이고 기만적인 ‘자아’의 환상이 흔들리는 체 안에서 미분을 거듭하는 사이, 체 바깥에서는 “나는 나를 보지 못하고 타인은 나를 보지 않는” 이중의 소외가 발생하는 중이다. 체를 흔드는 손은 궁극의 ‘나’, 또는 최후의 ‘나’를 만날 수 있을까. 김성대는 이번 시집을 통해 나의 이편과 저편을 구분하는가 하면 서로의 암전이 되어 그 구분을 지운다. 얼굴에 자정이 번지는 시간이라든가, 세수를 하면서 얼굴을 비는 순간이라든가, 매일의 시간 속에서 무구한 ‘자아의 역사’는 다시 또다시 허물어지며 적분된다. 미분과 적분이 교차하며 간신히 존재로운 상태에 이른 나, 그리고 우리. 이 유동하는주체는 다름 아닌 “사람의 슬픔”이다. -박혜진(문학평론가)
3인칭
장마가 시작되었고 차이나타운에 있었다
오진된 행려병
숲은 밤에 있다
무산
배웅
잘잘못
나의 조울메이트
등을 잃었다
del
마자르
가제
마조라나 페르미온
마조라나 페르미온2
미귀
목이 부어오르는 동안
수의사
번역자의 개
야수의 선택
은영의 눈
차연
하드 트레이닝
메아리 수집
엄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 파라오처럼 누울 수 있다면
튜브
seesaw
몰라본다
미아들의 호수
숲가의 토론토
소여와 분홍
나라
화해에의 강요
아픈 사람의 방
아픈 사람
비의 학교
우리의 회색 겨울 서울
잡놈들의 세계사1
잡놈들의 세계사2
잡놈들의 세계사3
잡놈들의 세계사4
잡놈들의 세계사5
잡놈들의 세계사6
잡놈들의 세계사7
잡놈들의 세계사8
멸치묵시록
파국의 미학
파국의 미학2
귀 얇은 처녀들의 도시
스케이트
민달팽이
아이스크림이 녹는 길
밤의 어시장
또 다른 기일
필적이 닮아 간다
작품 해설/ 장은영
소리 없는 울음이 귀를 붙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