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맣게 잊었던 과거가 낙석처럼
눈앞에 굴러떨어지는 날이 있다.”
죽지 못해 사는 사람과 살기 위해 잊는 사람
고장난 시계와 조각난 기억으로 맞추어 보는 삶의 조건
시와 소설을 오가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선보이는 ‘전방위 작가’ 김선재의 신작 소설집 『누가 뭐래도 하마』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소설집에는 그간 작가가 천착해 온 주제인 ‘죽음’과 ‘기억’에 대한 사유가 한층 더 짙게 드러난다. 김선재가 붙드는 삶의 진실은 지나왔다고 생각한 과거, 잊었다고 생각한 기억으로 꾸역꾸역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사정과 사연에 있다. 소설의 인물들은 서로 다른 사연을 지녔지만 어쩐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듯하다. 그들은 갑작스레 걸려 온 전화, 어느 날 가게 된 낯선 도시, 오랜만에 만나게 된 사람을 통해 까맣게 지웠던 삶으로 되돌아간다. 오래 비워 둔 집에 시계가 고장 난 채 걸려 있듯, 그들 마음속에 걸린 시계는 늘 같은 시간을 가리킨다. 김선재는 ‘살기 위해’ 마음속 시계에서 어떤 시간을 지워 버렸지만 결국 늘 그 시간을 되풀이해 살아 온 사람들의 표정 없는 표정에 주목한다.
■기억을 지운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을까?
김선재는 고통스러운 과거를 지닌 인물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되 섣불리 그들의 회복이나 치유를 암시하지 않는다. 잊었던 기억이 되돌아오는 일은 25년 만에 만난 사촌과 한낮 뙤약볕 아래 묘지에 속수무책 서 있는 것만큼(「한낮의 디지」)이나 괴롭고 견디기 힘든 일이다. 가난한 마음에, 여유 없는 시기에 무시하거나 건너뛰기로 한 어떤 기억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찾아온다. 3년 만에 다시 만나 느닷없이 “도를 아느냐”고 묻는 과외 학생이 털어놓는 트라우마에 떠올리고 싶지 않던 자신의 일그러진 면을 떠올리게 되는 일(「아는 사람」). 그 기억들은 묻는다. 삶에서 이런 기억을 빼 버리고,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 걸까? 그 시간을 빼 버린 채 살았던 삶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인물들이 보여 주는 잊으려는 의지, 외면하려는 태도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결코 그 기억과 시간에서 놓여날 수 없음을 더욱 분명하게 지시한다. 도망치려 했던 스스로의 삶의 궤적, 보려 하지 않던 나이테를 직시하고 자각하는 순간. 작가는 그런 ‘잊으려는 다짐’이 파열되는 순간들을 붙든다. 우리가 사는 동안 ‘왜 사는가?’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사이에서 고민할 때마다, 김선재의 소설이 필요할 것이다.
■기억을 품고 우리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동전처럼 앞뒤를 지닌다. 살기 위해 잊은, 그러나 완전히 잊지는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줌과 동시에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일’에 대한 의심도 내려놓지 않는다. 「죽지 않는 사람들」의 노인 ‘안병수’는 늙고 병들어 기력을 잃어 가는 와중에도 불쑥불쑥 “사람답게 살고 싶으냐”는 한마디를 떠올리는데, 그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보낸 나날들은 지옥과 다름없던 하루하루다. 「3번 국도」에서 한 달 간의 유급 휴가를 받은 스포츠 칼럼니스트는 여행지에서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이 있음을 서서히 깨닫는다. 그런 남자에게 주변 사람들은 “산 사람은 살 궁리를 해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할 뿐이다. 어떤 기억과 함께라면 살아도 죽은 것처럼 살게 되는 인물을 보여 주며, 작가는 비슷하지만 다른 질문을 남긴다. 잊었던 과거는 기어코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그러나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고스란히 안은 채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기억과 망각이라는 능력을 함께 지닌, 인간인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내내 유효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하마』는 이러한 물음에 소설의 외형을 씌워 건네려면 어떤 식이어야 할지를 유심히 고민하여 탄생한 ‘질문의 책’이다.
■작품 소개
누가 뭐래도 하마
▶ ‘양’은 엄마에게 버림받고 ‘유조 씨’의 집에서 생활한다. 기상 시간과 식사량, 끼니마다 염분의 정도를 지키며 건강관리에 몰두하는 유조 씨는 양의 체중 조절, 식사량 관리에도 열을 올린다. “사람답게” 식욕을 견디라는 유조 씨의 말에 양이 떠올리는 건 언젠가 동물원에서 본, ‘먹고 싶을 때 먹고 싸고 싶을 때 싸는’ 동물의 일을 당당하고 우아하게 해내는 하마다.
한낮의 디지
▶ 25년 만에 걸려 온 사촌 언니의 전화. ‘나’에게 그것은 영문 모를 것이다. 작은 항구 근처에 살던 큰이모의 막내딸, ‘디지’는 오래전 ‘나’의 집에 얹혀 산 적이 있다. ‘나’의 아버지의 묘지에 가자는 디지의 제안을 수락한 ‘나’는 한낮의 묘지에서 디지에게 그때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묻는다. 오래전에 물었어야 할 질문을 하는 ‘나’에게 디지는 되묻는다. “넌 정말 몰랐니?”
일일시고일
▶ 어머니의 죽음을 수습하기 위해 P시로 간 ‘남자’는 어머니가 운영하던 게스트하우스의 마지막 손님인 ‘소녀’와 마주친다. 예정되어 있던 연인의 이별 통보를 보류하고, 예상치 못한 어머니의 죽음과 맞닥뜨린 남자의 사연만큼이나 돌아갈 곳도 나아갈 곳도 없어 보이는 소녀의 사연을 듣는다. 게스트하우스에서 낯선 이와 치킨을 뜯으며, 결국 혼자가 되리라는 사실을 무섭도록 예감하며.
아는 사람
▶ ‘지혜’는 오래전 ‘나’의 과외 학생이었다. ‘나’는 지혜에게 7년 간 과외를 했고, 지혜가 대학에 진학한 후로도 느슨하게 연락을 이어 왔다. 3년 전 ‘나’의 결혼식에 지혜가 오지 않은 이후로 멀어졌던 관계는 지혜의 연락으로 다시 이어진다. ‘나’의 반응에는 상관하지 않고 전화를 걸어 자신이 겪은 성폭력 트라우마를 늘어놓는 지혜로 인해 ‘나’는 일그러졌던 그때의 기억을 소환한다.
아무도 모른다
▶ 말을 잃어버린 ‘너’를 대신해서 ‘나’는 증언한다. ‘너’는 어두운 방에 홀로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너’의 부모는 손가락을 빤다는, 반찬통을 엎었다는 이유로 ‘너’를 때리고 가두고 묶어 놓는다. ‘나’는 ‘너’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너’의 곁을 맴돌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틔워지고 사라진다. ‘너’의 생을 기록하는 ‘나’는 누구일까?
죽지 않는 사람들
▶ 사고로 몸이 자유롭지 못한 노인에게 지원되는 복지 프로그램의 일부로 청년 ‘알’은 책을 읽어 주러 온다. 누워 있는 노인은 책을 읽는 알의 목소리를 들으며 드문드문 과거를 떠올린다. 그는 산 채로 묻힐 뻔하던, 군홧발에 밟히던 청년 시절의 자신을, 그때 시체가 된 수많은 청년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잊고 싶은 기억을 마지막으로 떠올리는 노인에게 알은 어디서고 해 본 적 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다.
남은 사람
▶ 정류장에서 껌이나 간식 따위를 파는 매점에 머무는 노년의 ‘나’는 난생 처음 글이라는 걸 써서 남겨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을 한 이후로 ‘내’가 가장 많이 복기하는 것은 이전 연인에 대한 것들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가정과 후회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이제 ‘새롭게 사랑하기로’ 결심하고 산을 오른다. 그리고 익숙한 뒷모습을 따라가는데…….
3번 국도
▶ 스포츠 칼럼니스트인 ‘남자’는 한 달 간의 유급 휴가를 받는다. 여행지에서 남자가 받는 아내의 전화는 어딘지 전과 달리 불안한 분위기를 풍긴다. 후배, 어머니와의 통화에서도 남자는 자신의 기억과 타인들의 기억이 조금씩 다름을 알게 되는데……. 남자가 애써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는 펭귄이 그려진 노란 우산, 그것뿐이다.
■본문에서
양은 몸속에 하마 한 마리가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언젠가 보았던 딱 그만 한 하마. 집채만 한 유리 수조에 하마를 가둬 놓은 그 동물원에 간 게 언제였는지는 모른다. (……) 하마가 양의 눈앞에서 물보라를 일으키며 다시 천천히 멀어져 간 건 한 무리의 아이들이 지나가고 난 뒤였다. 물속을 둥둥 떠다니던 풀색 똥을 기억해 낸 양이 미간을 찌푸린다,
-「누가 뭐래도 하마」, 11쪽
엄마는 이모에게 약속한 대로 디지를 근처 고등학교에 진학시켜 주었고 가끔 용돈을 쥐여 주기도 했으나 그게 다였다. 처음에 약속한 주산 부기 학원에 등록시켜 준다든지 졸업 후 적당한 취직자리를 구해 주는 일은 함께 사는 동안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내가 그때의 얘기를 꺼낼 때마다 엄마는 그래도 나와 차별 없이 대했다고 주장했다. 걔는 그 고집 때문에 평생 빌어먹을 거야. 우연찮게 튀어나온 디지의 얘기는 늘 엄마의 그 말로 마무리됐다.
-「한낮의 디지」, 47쪽
그날도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키스를 하다가 한 명이 상대방 가슴을 더듬는 걸 보니까 화가 나더라고요. 물론 거기까지도 참을 만했어요. 그런데 가슴을 더듬던 손이 치마 밑으로 들어가더니 한 애가 다른 애한테 “다리 좀 벌려 봐.” 이러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가 숨을 막는 것 같았어요. 숨이 잘 안 쉬어지더라고요.
-「아는 사람」, 138쪽
언젠가 여자는 네 유치가 벌어지고 비뚤어진 것이 그 손가락 빠는 버릇 때문이라고 했다. 빼라고. 사과를 갂던 여자는 손가락을 문 너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네가 말을 못하는 아이라는 사실도 떠올렸다. 어느 날부터 그냥 말을 안 해. 제 어미를 닮아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 언젠가 남자가 여자에게 자신도 답답하다는 듯 털어놓았던 걸 떠올린 거다.
-「아무도 모른다」, 158쪽
■추천의 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서 ‘왜 살아야 하는가’ 혹은 ‘왜 죽지 못하는가’로, 또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 것일까’에서 ‘기억이란, 시간이란 무엇인가’로 이 작가는 물음의 방향을 바꾸었다. 아니, 바꾼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를 묻기 시작했다고 해야 조금 더 정확할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을 감당해 나가는 방법이 아니라 그 조건을 의심하는 형태로, 죽음과 시간이 대체 어떤 의미인지 그 끝자락에 서 있는 인물들을 통해 김선재는 심문한다.
―노태훈(문학평론가)
누가 뭐래도 하마 7
한낮의 디지 43
일일시고일 79
아는 사람 115
아무도 모른다 153
죽지 않는 사람들 169
남은 사람 207
3번 국도 241
작가의 말 279
작품 해설 281
사람의 조건_노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