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수명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9년 8월 2일
ISBN: 978-89-374-4354-1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35x200 · 380쪽
가격: 22,000원
분야 한국 문학
시와 예술, 미와 시론……
어둡고 날카롭게 모색되는 동행과 연대
이수명의 첫 시론집
『횡단』을 다시 펴내며 4
초판본 책머리에 8
1부 횡단 17
말한다는 것, 그리고 쓴다는 것 19
시론 1 25
시론 2 34
시는 미지의 언어 44
시는 쓰일 수 없는 시의 징후이다 51
소통되지 않는 시간과 공간들의 이상한 집합 59
두 개의 비유 65
고양이가 나를 훔쳤어요 73
우리에겐 더 많은 분산과 상극, 고립이 필요하다 78
우리는 영원히 미끄러진다 81
2부 횡선 87
1950년대 초현실주의의 운명 89
우리는, 투명한 자들은, 더 멀리 나아갈 것이다 109
미래파를 위하여 117
비로소 모든 뚜껑을 열고 148
한국 아방가르드 시의 계보에 대한 노트 182
3부 횡보 201
직선을 그을 수 있는 무한 203
누가 비누를 보았는가 217
빈 과일 바구니를 뜯어 먹는 벌레의 꿈 229
죽음놀이, 질문하지 않는 방식 244
잠들지 못하는 세계의 눈 265
4부 선회 271
흙냄새를 맡으며 비스킷을 273
뼈 없는 뿔 277
상처와 꽃 281
‘그것’의 불가능성 287
눈먼 시계 수리공 303
관점이 소멸하는 곳에 토끼는 있다 310
얼굴에 대한 참회 319
5부 횡렬 325
미의 침입 327
빌보케의 장난 337
선은 인간을 깨운다 352
나는 늘 자신으로부터 달아난다 361
발표지면 370
찾아보기 373
이수명의 첫 번째 시론집 『횡단』이 민음사에서 다시 나왔다. 1994년 《작가세계》로 등단하여 이래 일곱 권의 시집과 비평집, 연구서 등을 출간한 시인은 1990년대 후반부터 10년 남짓 써 온 글을 묶어 2011년 시론집 『횡단』을 출간한다. 『횡단』은 스스로의 예술론뿐만 아니라 당대의 시문학론까지 아우르는 각별하고 이채로운 작업이었다. 또한 동시대 시인과 시 독자의 뭉근한 지지를 확보하며 시를 사랑하는 이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새롭게 단장하여 독자를 다시 찾는 『횡단』이 이전의 독자를 넘어 새로운 독자에게 안길 시적 경험에 기대가 모인다.
■ 횡단하는 보폭에 맞추어
시인이 펴내는 글에서 밟힌 바와 같이 『횡단』에 모인 글들은 뚜렷한 주제와 성격을 갖추고 오와 열을 맞춘 것들이 아니다. 되레 긴 시간을 두고 조각되어 분출된 시인의 사유가 한 권의 책에 느슨하게 모인 모양새다. 당시의 젊은 시인들에서부터 김구용과 이승훈을 호명하거나 1950년대 초현실주의와 2000년대 미래파를 연달아 논의하거나 토마스 만의 소설 혹은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 작품까지도 탐구하는 이수명의 보폭은 제목 그대로 ‘횡단’이라 부를 만하다. 그 경쾌한 동시에 진중한 발걸음에 맞추어 우리는 시인과 같이 묻고 같이 답해 본다. 시란 무엇인가? 당대 시의 징후는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 이후의 시는 어떻게 전망할 수 있는가? 그 횡단의 지도는 대략 아래와 같다.
‘횡단’, ‘횡선’, ‘횡보’, ‘선회’, ‘횡렬’의 다섯 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1부는 시론, 이미지와 상징, 시간과 공간, 시의 언어 등을 탐문하며 시에 대한 생각을 묶은 것이다. 2부 ‘횡선’에서는 김구용과 1950년대 그리고 미래파 등을 통해 문학사적인 조망을 시도한다. 3부 ‘횡보’와 4부 ‘선회’는 각각 시인론과 작품론이다. 5부는 마그리트, 브네, 뒤샹 등의 예술가의 작품을 조명하는 예술론이며 ‘현대’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색이다.
■ 지금의 문학 지형도를 다시 횡단하기
『횡단』은 8년 전 모습에서 더하고 빼는 부분 없이 나왔다. 허나 같은 강물에 발 담글 수 없듯이 같은 글도 시대와 세계에 따라 완연히 다른 글이 되고는 한다. 최초의 글이 발산하는 한결같은 ‘아우라’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리 읽힐 수 있는 유연성이 균형을 이룰 때 그 책은 오래 지속될 것이다. 다시 출간된 『횡단』이 그렇다. 책에 다룬 2011년의 사안과 논의는 지금의 시각으로 다시 평가되겠지만, 8년 전의 오늘을 8년 후에 날씨에 따라 함부로 바꾸지 않았다. “한 작품 속에서는 여러 개의 시간과 공간이 서로 부딪치며 존재한다.”(본문 63쪽) 이는 『횡단』이라는 시론집에서도 그렇지만 이를 읽는 독자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부딪침을 애써 피하고 외면하지 말자고, 균열되고 우회하더라도 결국 함께 보자고, 오랜만에 나온 『횡단』은 말한다.
■ 책 속에서
『횡단』은 부드럽지 않다. 다시 읽어 보아도 억센 글이다. 무엇을 찾으려 했다기보다 버리려 했던 쪽이고, 시가 무엇인지 생각하기보다는 그 무엇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한 것이 다. 할 수만 있다면 시의 갑옷을 벗어 버리고, 시에 대한 생각 에서 멀어져 시를 생각해 보려 한 책이다. 모여 있는 글들이 각각 다른 동작을 하면서도 시의 비무장지대로 나아가려는 시도를 보여 주는 까닭이다.
-‘펴내며’에서
소용이 없다. 소용이 없이 이루어지고 다시 소용없는 것으로 회복된다. 너는 이러한 종류의 순수한 타락에 들러붙어 있다. 이 타락을 설명할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유리되어 있다. 모든 것이 동시적이다. 한 무리의 열렬한 부재가 뚫고 지나가는 벽을 너는 지금 보고 있다. 관통된 벽, 너는 그것을 쓴다. 그것을 만든다. 쓰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만드는 것으로 이해의 길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너는 너 자신과 아무 관련도 없는 관련을 만드는 데 너 자신을 남용하고 있다. 어둠인지 빛인지 알 수 없는 세계의 번쩍거림이 네 안에서 번들거리는 파편들을 명령하지만 너는 그 명령을 자극할 뿐 부르지 않는다. 너를 무관하게 만드는,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위하여 너는 존재하는 것이다. 쓴다는 것, 그것은 볼 수 없는 것이다.
-‘말한다는 것, 그리고 쓴다는 것’에서
시를 쓰는 일은 무엇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혹은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눈앞에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 사물들, 현실의 이름들을 거부하고 그것들로부터 멀어지기를 계속해야 한다. 그들과의 밀착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들과의 사이에 틈을 만들어야 한다. 일종의 공황 상태다. 의식은 무력증을 드러내고, 두뇌는 기능을 잃는 듯이 여겨진다. 지각, 감각, 기억, 연상 등은 활성화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급속히 둔화되어야 한다. 정신이 무장해제되는 것, 바로 이것이 시의 토대이다.
-‘시론2’에서
미래파는 너무 늦게 문화 운동에 뛰어든 것은 아닐까. 이런 느낌은 이들 문학의 새로움으로 이야기되는 것이(적어도 소재의 측면에서는) 다른 장르들을 통해서 너무나 익숙한 것들이었다는 당혹감으로 배가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미래파는 너무 빨리 주목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비주류성이 자체적으로 강력하고 진정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은폐의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들은 숙성에 필요한 무관심이라는 존귀한 선물을 받지 못했다. 그런 여유 없이 곧바로 주 목을 받았고 그들의 비주류성은 평단의 환호 속에 장식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그들은 너무 빨리 주류가 되어 버린 것이다
-‘미래파를 위하여’에서
예술은 손상을 받은 것, 더러워진 것이다. 뒹구는 것, 뒤집어쓴 것, 무언가 잔뜩 묻어 있는 것이다. 예술은 어떤 추가적인 무게를 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 치명적인 관여를 품고 있는 것, 휩쓸림 속에 변형된 것이다. 원형이 사라진 것이 예술이다. 예술은 몸이 없어진다. 미 속으로 파열하는 것이다./ 이 파열은 예술의 발생을 인증한다. 예술은 미를 상상하고 깨우는 것이 아니라 미의 침입을 받음으로써 발생한다. 동 시에 이 침입으로 예술은 소멸한다. 예술의 발생은 예술의 소멸로 나타난다.// 예술은 미에 의해 대체된다.
-‘미의 침입’에서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모든 예술가들은 전위이다.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가장 멀리 나아가는 부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생의 한 시기를 자신을 사로잡은 기존 예술의 완성된 형식을 실험하고, 그 실험이 끝난 후에는 실험실을 빠져나오게 된다. 실험실을 나온다는 것은 그들이 어떤 곳에서 든 전통의 부정이라는 역학 위에 서야 하는 운명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실험실 밖에서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새로운 감각, 새로운 방법, 새로운 미학을 수립하는 데 일생을 바친다. 그것은 때로 새로운 색상을 찾는 일과 같은 측정할 수 없는 작업에서부터 빛의 산란과 사물의 형상을 추적하는 보다 미시적인 방향, 또는 색과 형체를 일그러뜨리거나 극도로 단순화시킴으로써 스스로 극지에 이르게 되는 경향과 같은 여러 갈래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이 각자의 방식에서 전위라는 프리즘을 통해 나타날 수 있다.
-‘나는 늘 자신으로부터 달아난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