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얕은 물에 담긴 수초는 잘라 낸 꿈의 일부 같았다.”
과잉된 고독과 자학적 우울
내가 나를 번역하는 자폐적 회로
한국문학이 처음 만나는 어둠, 최영건 첫 소설집
▶나름의 질서와 규칙 속에서, 둥실둥실 저 혼자 살아가는 수초처럼 허약하고도 견고한 소설의 환상. 다름아닌 최영건 소설이다.
-박민정(소설가)
▶최영건의 소설은 일상에서 미처 감각하지 못했던 미세한 균열을 잔인하게 해부한다. 고요하고 우아한 인생 아래 흐르는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 그리고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속도로 조금씩 스러져가는 것들은 무섭고 강렬하며 아름답다. -인아영(문학평론가)
최영건 첫 소설집 『수초 수조』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최영건 작가가 대중에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장편소설 『공기 도미노』(민음사, 2017)를 통해서였다.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쓰러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여섯 개의 시점으로 다룬 이 작품은 인물들 각각의 허위의식이 충돌하며 스러지는 과정을 통해 피상적 관계가 숨기고 있는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독창적 구조로 표현했다. 이에 화답하듯 “칭찬할 만한 시도”라는 평가와 함께 작품이 동인문학상 본심 후보에 오르며 작가의 존재감 또한 한국 문학계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그로부터 2년 만에 출간하는 『수초 수조』는 성장 가능성으로서의 최영건이 새로운 가능성으로 변모했음을 보여 주는 소설집이다. 부서지고 몰락하는 인간 군상을 탐구하는 시선은 여전하다. 그러나 그들 각자의 고독과 상처를 바라보는 시선은 한층 깊어지고 넓어졌다.
■노년의 시간
소설의 도입부에서 만나게 되는 「플라스틱들」, 「감과 비」, 「더위 속의 잠」은 늙음과 젊음의 대립을 축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다. 노년은 『수초 수조』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플라스틱들」은 고부 사이의 갈등을, 「감과 비」는 늙은 카페 소유주와 젊은 카페 알바생 사이의 갈등을, 「더위 속의 잠」은 친척 할아버지 집에 얹혀사는 대학생 여성의 불편을 다룬다. 그러나 각각의 작품은 흔한 ‘세대갈등’을 반복하지 않는다. 비슷한 조건의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일상적 갈등이 아니라 누가 봐도 다른 사람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비가시화된 갈등, 사회적 통념이 감추고 있는 잠복된 갈등을 통해 인간 심연의 고독과 어둠을 불러낸다. 한편 천천히, 소리 없이 죽어 가는 것들을 놓치지 않는 작가의 시선은 시간이라는 불가항력에 대항하는 노년의 심리를 우아하고 섬세한 필치로 그려 낸다. 비정한 아름다움을 환기하는 문장들은 단연 최영건 문체라 부를 만하다.
■약자의 공간
「쥐」 는 일종의 고딕소설이다. 서서히 썩어 가는 화려하고 육중한 저택을 가득 채운 고독과 우울은 이 집에 사는 인물들의 심리를 적절히 대변하고,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서로에게 비난과 폭력의 언어를 쏘아 대는 이들의 갈등은 기묘한 공포감을 자아낸다. 「쥐」 가 타인을 향한 원색적 비난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면 「싱크홀」은 타인을 향하지 못한 분노를 내면화한 개인이 왜곡된 방식으로 자기를 지키는 이야기다. 두 작품은 최영건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또 하나의 특징, 캐릭터화된 공간성을 드러내며 소설의 입체성을 더한다. 고택이 가족에 묻어 있는 불행의 역사와 같은 공간이라면 싱크홀은 언제 빠질지 모를 불안의 공간이다. 인물이 처한 상황과 내면의 풍경을 암시하는 공간의 압도적 이미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전달한다.
■그곳, 수초 수조
현실적이고 사실적인 작품들 가운데 「물결 벌레」와 「수초 수조」는 단연 눈에 띈다. 부재의 감각이 앞서 있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물결 벌레」는 타자 없이 자기 존재와 자기 감각을 증명할 수 없는 상황을 통해 주체의 상대성을 드러내고, 표제작이기도 한 「수초 수조」는 앞선 여섯 편의 소설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드러낸 불안과 불행과 폭력이 제거된 이상적 세계를 보여 준다. 텅 빈 방에 수초가 자라 있는 것을 본 ‘나’는 ‘나’를 꼭 닮은 낙엽과 함께 수초를 기르기로 한다. 수초로만 이루어진 수조 속 세계. 주인공은 폭력이 난무하는 자연스러움보다 평화와 안정만 있는 인공을 더 강렬하게 원한다. 강박적 진술과 초현실적 설정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수초 수조」는 그 완벽함으로 인해 역으로 현실의 불완전함을 드러낸다. ‘수초 수조’는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들의 공통된 심해인 동시에 우울과 고독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현대인의 심해이기도 한 것이다. 폭력이 제거된 세계를 향한 갈망.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곳을 최영건 소설에서 만날 수 있다.
■추천의 말
혼잣말하는 취미를 들킨 기분이다. 내가 예상하지도 못한 다음 말마디까지 알아채는 소설들을 읽었다. 잘라 낸 꿈의 일부와 폐허에 가까운 건축물들이 그려진다. 투조(透彫)하는 방식으로. 최영건 소설의 심해에는 몰락한 세계가 있다. 사소한 차질에 훼손되지 않고 처음처럼, 원래 거기 있었던 것처럼, 혹은 없었던 것처럼, 영원한 법칙을 가진 세계. 여기 없는 것이 거기에는 그토록 분명하다. 철골과 뼈대만 남아 앙상한 공간에서 중얼거리며 언어를 조탁하는 노인, 귀 옆으로 죽음이 육박해 오는 모든 사람. 이렇게나 망했지만 놀랍게도 아름답고 생생하고 활기찬 환각으로 가득하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 너머를 걱정하는 무한한 다정함, 적극적인 체념, 긍정적인 공허함, 이런 것들을 달리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그 나름의 질서와 규칙 속에서, 둥실둥실 저 혼자 살아가는 수초처럼 허약하고도 견고한 소설의 환상. 다름아닌 최영건 소설이다. -박민정(소설가)
최영건의 『수초 수조』를 읽으면 미세한 속도로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목재 저택이 떠오른다. 아주 오래되고 거대하며 아름다운 목재 건축물, 그리고 그 안에 깊이 스며들어 있는 음산하고 오싹한 느낌. 어두움과 습기를 머금고 있는 나무 기둥과 바닥의 벌어진 틈. 멀리서 보면 고요하고 우아한 이 건축물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온통 예민한 균열로 이루어져 있다. 이 균열로 인해 저택은 겉으로는 알아차리지 못할 속도로 서서히 갉아 먹히고 부서지고 무너져 내린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 자체에 대한 메타포다. 우리가 겪는 많은 고통은 시간이 흐르면 나아지는 걸까. 최영건의 소설에는 늙어가는 사람의 눈에 비치는 스러짐이 있다. 그 눈에 비친 인생은 자기혐오, 고독, 거짓말, 비밀, 폭력, 수치심, 욕망으로 조금씩 무너져 내린다. 멀리서 보면 여전히 아주 오래되고 거대하며 아름다울 이 목재 저택을 예민한 렌즈로 들여다보며, 최영건의 소설은 일상에서 미처 감각하지 못했던 미세한 균열을 잔인하게 해부한다. 고요하고 우아한 인생 아래 흐르는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 그리고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속도로 조금씩 스러져가는 것들은 무섭고 강렬하며 아름답다. -인아영(문학평론가)
■ 줄거리
「플라스틱들」 며느리인 ‘나’와 ‘나’의 두 딸이 시어머니 홀로 살고 있는 지방의 전원주택을 방문한다. 고부 사이를 이어 주는 남편이란 존재가 없어서일까. 이들 사이에는 가족인 동시에 가족이 아닌 듯 기묘한 거리감이 감돈다. 두 손녀 중 첫째를 유독 좋아하는 어머니가 첫째에게 플라스틱 블록으로 만들 수 있는 호화스러운 모형 집을 ‘나’와 상의도 없이 선물하자 모종의 불편함은 형태를 갖기 시작한다. 질서 정연한 분위기와 우아한 이미지들 속에 잠복되어 있는 갈등의 기미가 가까스로 조립되어 있던 가족이란 모형을 해체할 것만 같다.
「감과 비」 ‘나’는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노인이다. ‘나’에게는 열두 살 어린 라라는 여자친구가 있다. 둘은 서울의 노른자땅 위에 카페와 주택을 겸한 건물을 소유하고 있다. 카페를 운영하는 라라는 카페에서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며 자기애를 과시하지만 젊음으로 가득 찬 카페에서 라라의 취향은 조롱의 대상이 될 뿐이다. ‘나’와 라라는 이 공간의 주인이지만 어쩐지 이들의 존재는 시든 화분처럼 겉돈다.
「더위 속의 잠」 대학생이 되어 서울에서 살게 된 ‘나’는 할아버지들 집에 머물고 있다. 그들의 공간에 기생하고 있는 ‘나’는 할아버지들의 무심한 행동들을 보며 위축되어 간다. 그러던 중 할아버지들이 여행을 가자 커다란 집에 혼자 남게 된 ‘나’는 남자친구를 데리고 오지만, 할아버지가 부재한 집에서 ‘나’와 남자친구는 좀처럼 자연스럽지 못하다.
「쥐」 비 오는 어느 날 불 꺼진 고택을 배경으로, 병중인 아버지가 부재한 집에 그의 내연녀가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불편한 만남에 대한 이야기. 서로가 서로를 굴복시키기 위해 날선 대사를 내뱉는 ‘최영건적 캐릭터’들이 벌이는 신경증적 대화와 기능을 잃은 채 썩어 가는 음울하고 쇠락한 공간에 대한 묘사가 소설의 깊이를 더한다.
「물결 벌레」 친구인 지호를 만나기 위해 시골로 오는 기차에서 만난 남성과 동행하게 된 ‘나.’ 친구를 만나기 위한 방문이었으나 정작 자신을 부른 지호는 집에 없고 전화기도 두고 나가 연락할 방법마저 요원하다. 더욱이 남자 역시 지호의 초정을 받았다고 말하고, 이들의 관계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의 부재로 모든 것은 불분명해져만 가는데…….
「싱크홀」 백진과 은하는 서로를 특별하게 여긴다. 운영하던 쇼핑몰을 그만두고 사업을 철수한 백진과 오랜 시간 이어진 폭력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버텨 온 은하. 은하는 거짓말을 통해 자신을 방어하고 진실을 잊어버린다. 은하와 백진의 대화는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은 채 부유하며 일시적 감정들을 받아 안은 채 떠다닌다.
「수초 수조」 ‘나’와 낙엽이 밥을 먹고 쇼핑을 하고 돌아와 보니 텅 빈 방에 수초가 자라 있다. 낙엽과 ‘나’는 거실의 수조를 가져와 수초를 기른다. 기억이라는 폭력적인 구조물과 반대인, 불안을 필요로 하지 않는 명쾌한 행복.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장소이자 인간적인 모든 것과 무관한 것. ‘수초 수조’는 불안한 존재가 꿈꾸는 이상향인 걸까.
플라스틱들
감과 비
더위 속의 잠
쥐
싱크홀
수초 수조
물결 벌레
작가의 말
추천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