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시인선5] 꽃잎(개정판)
시리즈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50주년 기념) 5 | 분야 한국 문학, 세계시인선 5
“난해하면서도 새롭고, 엉뚱하면서도 현대적인”
꽃의 시인, 20세기 한국 모더니즘의 재발견
새롭게 추가된 대표 시 9편과 생생한 문학의 현장을 담은 육필 원고 실어 개정판 출간
● 김수영이 ‘꽃의 시인’인 까닭은?
“시인이 구하는 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오래도록 끌어안아 온 긴 ‘고뇌’의 결실이다. 시인이 요청하는 꽃은 아직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미지 세계의 삶이다. 꽃이 소란스럽게 개화하여 이루어질 그 삶에는 ‘원수’가 없으며, 따라서 착취도 억압도 증오도 없다.”
―황현산(문학평론가)
세계시인선 5번 『꽃잎』이 개정판으로 다시 독자들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이번 개정판은 이전 판에 없었던 김수영의 대표 시 9편 외에도, 시인이 남긴 육필 원고의 사진을 함께 실어 독자로 하여금 생생한 문학의 현장에 함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김수영의 시는 ‘풀’의 이미지로 대표되는 정치적인 참여시로 흔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독재정권 아래서 사회정치적 목소리를 높이고, 예컨대 ‘김일성 만세’라는 것을 할 수 있어야 문학이 문학일 수 있다는 급진적인 태도만 부각한다면, 이것이 그의 더 큰 시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놓칠 수 있다. 김수영은 20세기 초중반 한국 사회가 겪었던 변화에 호응하며, 전에 없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역사적 과제를 문학으로 실천하고자 하였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계가 탄생하는 순간에 관여하는 것이 바로 시’라는 그의 시학은 ‘꽃’으로 표현된다. 『꽃잎』은 그간의 김수영 읽기에서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그러나 그의 시세계의 본질적인 모습에 더욱 가까운, ‘꽃의 시인’ 김수영을 집중 조명한다.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
혁명 같고
먼저 떨어져내린 큰 바위 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
나중에 떨어져내린 작은 꽃잎 같고
―「꽃잎」에서
김수영의 시 전체에서 ‘꽃’은 ‘사람’ 다음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로, 초기 시부터 후기에 이르기까지 지속적 탐구의 대상이었다. 꽃은 꽃을 피우고 지는 행위에 의해 그 다음 세대를 만들어낸다. 이런 이유에서 꽃은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장소이자 사태, 아직 미지의 가능성으로서의 자유의 표상이 되고, 김수영이 말하는 ‘없던 세계가 새로이 탄생하는’ 시의 본질을 상징한다.
● 사회 참여적이면서 가장 개인적인 모더니즘의 시세계
“꽃이 피면 벌써 다른 세상이기에 아직은 ‘글자’로만, 다시 말해서 개념으로만 존재하는 이 꽃. 확연히 보이는 듯하지만, 그러나 떨리며 사라질 것 같은 이 글자의 꽃을 모든 방향에서 살핀다는 것은 얼마나 초조한 일인가. 이 삶을 불태워 버리는 게 얼마나 “싫은” 일이며, 미지의 신비를 향해 우리의 생명 전체를 내던진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황현산(문학평론가)
간단(間斷)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 — 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사랑의 변주곡」에서
당신이 내린 결단이 이렇게 좋군
나하고 별거를 하기로 작정한 이틀째 되는 날
당신은 나와의 이혼을 결정하고
내 친구의 미망인의 빚보를 선 것을
물어 주기로 한 것이 이렇게 좋군
집문서를 넣고 6부 이자로 10만 원을
물어 주기로 한 것이 이렇게 좋군
(……)
선이 아닌 모든 것은 악이다 신의 지대(地帶)에는
중립이 없다
아내여 화해하자 그대가 흘리는 피에 나도
참가하게 해 다오 그러기 위해서만
이혼을 취소하자
―「이혼 취소」에서
김수영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어를 사용하여, 현실의 세부를 드러내어 삶의 진면모를 발견하는 방법으로서의 시를 썼다. 식모를 둔 중산층 가정생활, 아내와의 다툼 같은 개인의 일상부터, 혼란한 정치 현실, 전쟁 경험, 혁명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층위의 소재들이 새로운 표현을 얻었다. 김수영의 시는 해방 후 한국시에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후배 시인들에게 여전히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중 하나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더 독자들의 사랑과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으며, 김수영은 우리 시대의 ‘신화’가 되었다. 김수영 연구의 권위자이자 『김수영 전집』, 『김수영 육필시고 전집』의 편자인 이영준 교수가 엮은 『꽃잎』에서, 한국 모더니즘 시의 ‘거대한 뿌리’이자 ‘피어난 꽃’인 김수영을 새롭게 만나보자.
꽃을 주세요 우리의 고뇌를 위해서
꽃을 주세요 뜻밖의 일을 위해서
꽃을 주세요 아까와는 다른 시간을 위해서
(……)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비뚤어지지 않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소음이 바로 들어오게
꽃을 찾기 전의 것을 잊어버리세요
꽃의 글자가 다시 비뚤어지게
―「꽃잎」에서
꽃잎
구라중화(九羅重花)
꽃
꽃 2
깨꽃
파밭 가에서
설사의 알리바이
거위 소리
H
채소밭 가에서
미역국
반달
장시 1
싸리꽃 핀 벌판
먼 곳에서부터
기도
반주곡
현대식 교량
조국에 돌아오신 상병포로(傷病捕虜) 동지들에게
공자(孔子)의 생활난
너를 잃고
긍지의 날
봄밤
사랑의 변주곡
연꽃
미인
이혼 취소
여름밤
태백산맥
엔카운터지
폭포
푸른 하늘을
작가에 대하여 : 깨어 있던 시대의 양심(이영준)
작품에 대하여 : 꽃의 시학, 혁명의 시학(이영준)
독자 평점
4.5
북클럽회원 4명의 평가
한줄평
밑줄 친 문장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