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탁환
출판사: 민음사
발행일: 2019년 5월 10일
ISBN: 978-89-374-4219-3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8x188 · 320쪽
가격: 13,000원
분야 한국 문학
“이건 청나라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소설이야.
놀랍지 않은가?”
궁궐, 사대부 가문, 세책방을 가리지 않고
소설 애호가들로 넘쳐났던 18세기 대소설의 시대
꿈과 현실, 결혼과 가문, 삶과 죽음에 대한 걸작을
읽고 쓰고 필사하며 한계에 도전한 여성 독자들이 만든
거대한 소설의 역사가 지금, 베일을 벗는다!
1권
1장 엄씨효문청행록
2장 곽장양문록
3장 유씨삼대록
4장 쌍천기봉
5장 소현성록
6장 현씨양웅쌍린기
7장 보은기우록
8장 천수석
9장 완월회맹연
10장 유효공선행록
11장 벽허담관제언록
12장 임씨삼대록
■ 백탑파 시리즈 16년 동안 5종 10권 출간
김탁환 작가 신작 장편소설 『대소설의 시대』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2003년 『방각본 살인 사건』으로 시작된 백탑파 시리즈가 『열하광인』, 『열녀문의 비밀』, 『목격자들』에 이어 『대소설의 시대』를 선보이며 5종 10권에 이르렀다. 16년 동안 이어져 온 시리즈의 원고지 매수는 1만 매. 경이로움을 보여 주는 기념비적인 숫자다. 백탑파는 18세기 실학파를 중심으로 형성된 집단으로, 백탑파 시리즈는 애호가의 시대를 열었던 백탑파만의 독특한 문화를 보여 준다.
독특한 문화는 한 사람의 시선에 의지하지 않고 매 작품마다 중심인물이 바뀌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열녀문의 비밀』에서는 이덕무가, 『열하광인』에서는 박지원이, 『목격자들』에서는 홍대용이…… 고정 인물인 김진과 이명방에 버금갈 정도로 중요한 인물이 매 작품마다 등장, 새로운 작품이 나올 때마다 김진과 이명방의 캐릭터가 풍성해지며 입체성을 띠어 간다. 백탑파 시리즈가 16년 동안 건재할 수 있었던 것도 이처럼 연속성과 독립성이 공존하는 형식에 힘입은 바 크다. 한편 국학의 발전에 따라 백탑파에 대한 연구 성과도 점점 쌓이고 있다. ‘백탑파 시리즈’는 살아 있는 생물처럼 연구 성과들과 함께 성장해 나가는 열린 시리즈인 셈이다.
■23년째 계속되는 대소설, 작가가 길을 잃으면?
조선 최고의 이야기꾼 임두는 궁중 여인들을 위해 23년째 대소설 『산해인연록』을 써서 매달 혜경궁 홍씨에게 바치고 있다. 『산해인연록』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임두와 그 제자들, 그리고 혜경궁 홍씨를 비롯한 몇몇 공주, 필사 궁녀 성덕임밖에 모른다. 그런데 199권까지 잘 써 오던 임두가 5개월째 200권을 쓰고 있지 못하자 궁에서는 김진과 이명방을 호출해 작가의 상황을 알아볼 것을 요구한다. 특정 시점부터 작품에 오류가 늘어나고 있음을 눈치챈 김진은 임두로부터 치매의 증상들을 읽어 내고,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는 임두는 그뿐만 아니라 작품의 결말을 기록해 둔 수첩 ‘휴탑’까지 잃어버렸음을 실토한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실종된 임두. 소설의 결말을 만들어 내라는 궁의 요구에 두 사람은 임두의 제자 수문과 경문에게 스승의 소설을 이어 쓸 기회를 주지지만 두 소설 다 형편없기만 한데……
한편 1785년은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이승훈이 이벽, 권일신, 정약용 등과 천주교 모임을 하다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서 발각된 사건(을사추조적발사건)이 발생한 해이기도 하다. 정치와 종교, 사회와 문화의 격변기 속에서 궁중, 사대부 가문, 세책방 등 계급과 성별을 막론하고 가장 많은 사람이 읽고 세상을 논한 세계가 있으니, 그것의 이름은 23년 동안 이어진 대소설, 『산해인연록』이다. 『산해인연록』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을까?
■언제부터 소설은 여성들의 장르였을까?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시대. 여성 작가가 쓰고 여성 독자들이 향유했던 100권, 200권 규모의 ‘대소설(장편소설)’은 장편보다 단편이 강세를 보이는 현재 한국 문학 출판계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신세계다.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거대한 장편의 세계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누가 그 긴 글을 쓰고, 베끼고, 읽었을까. 위로는 혜경궁 홍씨에서부터 아래로는 필사 궁녀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궁궐, 세도가, 세책방을 가리지 않고 소설을 통해 그들만의 상상력을 은밀하고 끈질기게 펼쳐 나갔다. 『대소설의 시대』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소설과 더불어 숨 쉬고 즐기며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던 여성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 준다.
『대소설의 시대』에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분주한 것은 김진과 이명방을 비롯한 남성이지만, 걸작을 원하고 베끼고 쓰고 읽는 이는 모두 여성들이다. 『사씨남정기』의 김만중, 『창선감의록』의 조성기처럼 남성 작가가 쓰고 여성 독자가 읽던 구도는 여성 작가가 쓰고 여성 독자가 필사하여 읽는 구조로 바뀌었다. 함께 모여 베끼고 읽고 논하는 자리는 자연스럽게 소설을 즐기는 모임으로 이어졌다. 독자 공동체는 곧 새로운 작가가 탄생하는 요람이기도 했다.
■ 소설로 쓴 소설사
소설의 목차 제목은 모두 실존하는 대소설들의 제목이다. 목차가 주는 낯섦은 그 자체로 18세기 소설이 얼마나 철저하게 망각되었는지를 보여 준다. 각각의 대소설은 각 장에서 등장, 인물의 대화를 통해 스치듯 지나간다. 대소설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시간적 배경이 다양하고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경우도 적지 않다. 더욱이 공간적 배경은 아시아 전체를 아우르고 지상계뿐만 아니라 천상계까지 뻗어 간다. 소설들 중 상당수는 연작인데, 100권인 『명주보월빙』은 105권인 『윤하정삼문취록』으로 이어지는 식이다. 방대한 소설들을 통해 우리는 전에 없이 장대한 스케일의 세계를 경함할 수 있다.
18세기의 소설과 21세기의 소설은 다르다. 18세기 소설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까. 그리고 그 소설의 유전자는 지금 어떤 형태로 남아 이어지고 있을까. 이번 작품은 고전 소설을 전공한 작가의 이력이 백분 발휘된 작품으로, 누구도 재현할 수 없는 만큼 완벽하게 독창적인 작품이다. ‘작가의 말’에서 김탁환 작가는 대학 시절을 회상하며 『완월회맹연』을 읽으려면 180일, 봄부터 가을까지 반년을 매달려야 했다고 말한다. 그때 작가의 공책에는 이런 메모도 남겨져 있었다. ‘기억의 속도보다 망각의 속도가 더 빠른 소설.’ 낯섦은 두려움이다. 하지만 그 고비만 넘기면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한 섬세하면서도 광대한 세계가 펼쳐지기도 한다. 『대소설의 시대』가 바로 그렇다. 목차에서 만나는 낯선 제목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300년 전 거대한 세계다.
■ 18세기 정신사
소설의 시간은 천주교가 유입되며 조선 사람들의 정신사에도 변화가 일대 변화가 일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소설은 시대의 거울이다. 작중 23년 동안 소설을 써 왔던 임두의 작품에 이상한 조짐이 보일 때 사람들은 노작가의 치매를 의심하지만 그 이면에는 소설의 조짐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조짐이 있었다. 우리는 소설을 통해 천주교를 받아들이던 사람들의 마음의 구조, 곧 당대 사람들이 어떻게 절망하고 희망을 배웠는지 볼 수 있다.
연구자들은 꾸준히 연구해 왔지만 일반 독자들에겐 완전히 잊혀진 18세기 장편소설. 『대소설의 시대』는 이러한 소설이 창작되고 유통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활발하게 읽혔던, 여성 주도의 한글 장편소설들이 어떻게 지금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된 것인지, 이에 대한 고민을 독자들과 함께해 보고 싶은 마음이 작가로 하여금 『대소설의 시대』를 쓰게 했다. 한 시절의 특정한 상상과 그 상상을 담은 소설군 전체가 잊혀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놀라게 하지만, 언제든 사라진 세계를 복원할 수 있는 소설의 힘 역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작가의 말에서
『대소설의 시대』에서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분주한 것은 김진과 이명방을 비롯한 남자들이지만, 걸작을 원하고 베끼고 쓰고 읽는 이는 모두 여자들이다. 『사씨남정기』의 김만중, 『창선감의록』의 조성기처럼 남자 작가가 쓰고 여자 독자가 읽던 구도는, 곧 여자 작가가 쓰고 여자 독자가 필사하여 읽는 구조로 바뀌었다.위로는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에서부터 아래로는 소설을 필사하는 궁녀에 이르기까지, 궁궐과 사대부 가문과 세책방을 가리지 않고, 순수 소설 애호가들이 넘쳐났다. 여기서 ‘순수’라는 말을 붙인 까닭은, 그들에겐 소설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사고파는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존여비의 세상,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못하는 사회에서, 소설을 통해 그들만의 상상을 펼쳐나갔다. 함께 모여 베끼고 읽고 논하는 자리는 자연스럽게 소설을 즐기는 모임으로 이어졌다. 새로운 작가가 탄생한 텃밭이기도 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려면 나이나 직업 그리고 생활뿐만 아니라, 그가 상상하는 세계까지 파악해야 한다. 18세기 이 땅의 여자들은 무엇을 상상했을까. 그녀들의 손때 묻은 장편/대하 소설들을 통해 우리는 그 상상의 진경을 맛볼 수 있다. 천상과 지상, 현실과 꿈, 결혼 이전과 이후, 가문의 안과 밖, 젊음과 늙음, 옳음과 그름, 삶과 죽음을 아우르는 거대한 세계!
■본문에서
“산해인연록이 100권을 넘어 가면서, 이 소설의 작가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에 소문이 뱀처럼 꼬리를 물었다. 그중에서 가장 널리 퍼진 이야기가 경기도 적성의 경주 김씨 가문 여인네 십여 명이 대를 이어 집필 중이라는 것이다.”“121권까지 통독하는 동안, 임두의 필력이 쇠한다고 여긴 적은 없었다. 열 권이든 스무 권이든 한꺼번에 나오니 애가 타긴 했지만, 나올 때마다 탄복할 수준이기에 참고 기다렸던 것이다. 23년은 무척 긴 세월이다. 임두도 나이를 먹었으며, 때론 병들고 때론 지쳤을 것이다.”
“임두는 평생을 소설가로만 살았다. 소설이니 어찌 사고 파는 일이 없었을까마는, 거래와 흥정의 도구로 소설을 간주한 적이 없었다. 한 인간의 희로애락과 한 가문 나아가 한 국가의 흥망성쇠를 아우르는 단 하나의 글쓰기, 그것이 곧 임두가 생각하는 소설이었다.”
“산해인연록은 물론 임두 작가님이 홀로 23년 동안 쓴 거작이지만, 그 밑바탕엔 이처럼 여자 작가들과 여자 독자들이 백 년 넘게 쌓아온 상상의 세계가 깔려 있다네. 이건 청나라에도 없고 일본에도 없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우리만의 소설이야. 놀랍지 않은가?”
“23년 전 이 작품을 시작할 때 우리가 원한 건 딱 한 가지야. 황족을 등장시킬 경우 남녀 불문하고 요절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 실존 인물이든 가상 인물이든, 황족은 무조건 마흔 살을 넘기게 하겠다고, 임 작가가 제 입으로 맹세했어.”
“끝이라 체념한 순간, 이어지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인생 하나는 소설. 소설이 끝나도, 그 소설을 쓴 작가와 그 소설을 읽은 독자의 인생은 이어진다. 그리고 가끔은 소설이 끝난 뒤 새로운 소설이 이어지기도 한다.”
“읽어도 읽어도 끝나지 않는 소설, 기억하는 속도보다 망각하는 속도가 더 빠른 소설을 읽고 싶구나. 이 나라에서 그와 같은 소설을 쓸 소설가는 오직 그대, 수문밖에 없겠지?”
“누군가에겐 약인데 누군가에겐 독이죠. 누군가에겐 희한한 소설일 뿐인데 누군가에겐 목숨을 걸고 따른 복음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