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과거 이해 없이 적정한 현재 이해는 불가능하다.해방 전후 십 년간 우리 삶의 참무리 ▶ 해방 이튿날 이제 이종환이라 불러 달라는 담임 니시하라 선생과의 기이했던 통성명 의식. ‘붉은 산’이 우리의 국토 현실이었던 시절. 학급 3분의 1이 기계총을 앓고, 도시락 도둑질이 끊이지 않던 시절. 영양 부족으로 누구나 부스럼을 앓아 조고약과 이명래고약이 방방곡곡에서 매상을 올리던 시절. 일 년에 두 번씩 구역질나는 회충약을 한 국자씩 떠먹어야 했던 시절. 좌우로 나누어진 중학생들이 피 터지게 싸우고 교사도 무서워 말리지 못했던 시절로의 감상 여행.
한국 문학 평단의 거두 유종호 선생의 저서 『나의 해방 전후: 1940~1949』가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유종호 선생이 시도한 것은 해방 전후 10년간 우리네 삶의 결과 세목을 재현하는 것이다. 저자는 국민학교에 들어간 해(1941년)부터 중학 3학년 때(1949년)까지의 유년기 동안의 과거 체험을 다룬다.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는 주체의 이런저런 사연을 늘어놓는 게 아닌, 각자 살아온 시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재현하여 근접 과거의 온전한 사회사 정립에 기여하기 위한 바람에서이다. 따라서, 이 책은 문단 원로 평론가의 첫 회고록이라는 의미를 넘어선, 지나간 과거를 이해하기 위한 단초를 제시하는 유의미한 시도이다. 온전한 과거 이해 없이 적정한 현재 이해는 불가능하다. 근접 과거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는 너무나 허술하고 그것은 현재의 온전한 파악을 저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각자 살아온 시대를 생생하게 증언해서 근접 과거의 온전한 사회사(社會史) 정립에 기여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그러한 면에서 조그만 사회사적 기여가 되기를 바라며 쓴 것이요 결코 자전이 아니다. 화자이자 회상의 주체로서 내가 등장하고 또 그러한 과정에서 나 자신의 얘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에 \’참무리\’ 혹은 리얼리티를 부여하는 기능으로 국한되어 있다. 개체의 매개 없이 사회도 전체도 드러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삶의 세목 제시이지 기억 주체의 이런저런 사연이 아니었다. 저자의 세대라면 공통된 경험으로서, 8.15 해방과 6.25 전쟁은 당시의 가장 큰 공적 사건이었다. 이 당시 유소년기를 지난 저자의 세대라면 당연히 그 다음 세대에 비해 일제 시대나 해방 직후의 경험을 생생히 기억 속에 보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일제 시대나 6.25 같은 근접 과거에 대해 풍문에 의해서 왜곡된 그림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경험한 원자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과거의 경험을 얘기할 때 경험 당사자만이 가지고 있고 드러낼 수 있는 진정성의 후광이 있다”고 본다. 그것을 편의상 “참무리”라고 부른다. 아무리 매혹적인 상상력의 소유자라도 도저히 포착해 내거나 마련할 수 없는 이 참무리는 경험 당사자의 기억에 의해서 비로소 “재현”이 가능하다. 이런 “참무리를 두른 세목”이 우리 과거사 이해의 단초가 되고 사회사의 정립을 위한 기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국민학교에 들어갔던 1941년 무렵과 1945년 해방 전후, 그리고 전쟁 발발 한 해 전인 1949년 무렵의 이야기를 주로 담았다. 1941년 대동아 전쟁을 선포하였던 일제의 식민 통치기에 국민학교에 들어가 일제의 식민 교육의 실상을 몸소 체험한 일, 1945년 해방 전후로 사회적 분위기와 학교 일선에서 직접 겪은 변화들, 전쟁 발발 한 해 전까지 좌우의 대립이 극심했던 시절로 나누어 근접 과거의 기억에 대한 재생술을 펴보인다. 특히, 음악(노래)과 시를 좋아하던 유년 시절 문예 잡지와 신문, 책을 통해 한 문학소년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담기도 하였다. 내용0장 기억의 복권을 위하여
1939년 11월, 일제는 한민족 고유의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를 설정하여 1940년 2월부터 8월까지 씨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저자는 집에서는 물론 본명을 썼으나 학교에서는 야나모도 마사오(柳本正雄)가 되었다. 지금 세대에서는 창씨 문제에 대해 당사자의 친일 성향이나 반일 성향과 직접 관련된 것으로 생각하는 편견이 많다. 순진한 학생이 윤동주 시인(히라누마(平沼))이 창씨개명한 것을 두고 크게 실망하는 것은 당대 상황에 대해 너무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본문 14~15쪽 참조)1장 유년의 지도
저자는 충북 괴산군 증평에서 유년기의 몇 년을 보냈다. 1941년 일곱 살 나던 해, 증평국민학교에 입학한다. 1학년 때 담임은 조선인 교사 가네무라(金村) 선생. 그에게서 일본어 가나를 배운 일, 도화 시간 첫 시간에 도화 교과서 첫 장에 있던 일장기(日章旗)를 그렸던 일, 조회 때 궁성요배를 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외었던 일, 전쟁 전몰 장병을 위한 모쿠토(黙禱) 의식, 퇴비 증잔을 위해 풀을 베오게 한 일, 송탄 채취 강제 사역 등을 이야기한다. 2학년 담임이었던 일본인 여교사 오기하라 마사에 선생에게 느껴던 풋풋한 감정은 저자의 유년기 활동사진의 최고 서정시이다.(50쪽)2장 지적, 정서적 빈민굴
초등학교 4학년인 1944년에 증평에서 충주로 이사하여 충주남산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담임인 가쓰라기 선생(조선인 교사)과의 8개월은 긴장감과 공포감의 연속이었다. 당시를 지적․정서적 빈민굴 속이라 표현한 저자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와 교사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는다. 이 당시 학교를 그만둔 이종형과의 교우에서 묘한 정서적 공감을 얻는다. 충주에서 처음 접하고 신기해했던 것은 책방. 거기서 문예춘추를 같은 잡지를 만난다. 3장 발팃재 가는 길
1945년, 5학년 담임 니시하라 선생에게서는 노래(창가)를 배우기도 했다. 비록 「해양소년단의 노래」나 「충령탑」, 「독수리의 노래」 등이지만. 송근 채취나 아동 강제 노역은 계속 이어졌고, 방공 훈련이 빈번하였다. 집집마다 방공호를 파놓게 하였다. 교과서에서도 대동아전쟁을 미화하고 그들이 저들이 조작한 전쟁 영웅을 찬양하는 전의 고취 일변도였다. 그러던 어느 오후 일본이 항복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제 지긋지긋한 솔뿌리 캐기나 방공호 파기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커다란 안도요 해방이었다. 설령 그 나이가 아니더라도 그것이 한 시대의 종언이면서 길고 긴 새로운 고난의 태동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도리는 없었을 것이다.”4장 좋다! 좋아!
해방은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 왔다. 어제까지 듣던 얘기와는 정반대의 얘기를 같은 교사의 입을 통해 듣는다. 다만 그 이튿날이던가 다시 있었던 조회에서는 자기의 본래 성이 아마기가 아니라 조(趙)씨이니 조교장 선생으로 불러 달라고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때는 해방이니 독립이니 생소한 낱말을 사용하며 그 전과는 정반대되는 얘기를 하여 무엇인가 세상이 크게 달라졌다는 실감을 다시 갖게 되었다. 담임인 니시하라(西原) 선생이 들어와 칠판에 커다랗게 이종환(李鍾煥)이라고 한자로 판서를 하더니 이종환이라고 발음을 하고 나서 이것이 나의 이름이니 그리 알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각자 집에서 부르는 이름과 성을 대라고 하였다. 돌아가며 출석부 번호 순서대로 자기의 성명을 밝혔다. 이렇게 기이한 통성명을 통한 이름 찾기가 해방 이후 치른 첫 의식(儀式)이었다. (111~112쪽)5장 지프차와 엿목판
해방은 또한 ‘자유’와 ‘변화’를 가져왔다. ‘창가’ 시간이 ‘음악’ 시간으로, 수신이 공민으로, 도화가 미술로, 체조가 체육으로, 직업이 실업으로 변했다. 후문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을 일제의 잔재라고 하여 마음대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6장 잃어버린 사람들
해방이 가져온 변화 중에 하나로, 학생 수가 매우 불어났다. 일본인 교사가 빠진 자리를 조선인 교사들이 메웠는데, 임시로 왔거나 무슨 일인가로 곧바로 그만두었다. 7장 그때 부른 노래
‘신탁통치’를 놓고 찬반의 입장 대립. 좌우익 간의 대립. 10월 폭동 등의 사건이 있었다. 저자는 학교 밖의 세계, 즉 극장과 서점에서 지적 정서적 교양을 얻는다.9장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1947년 9월 충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10장 전국학련 잘 싸웠다!
중학에 들어갔을 때 학생들 사이의 좌우 대립은 한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좌파 세력이 퇴조하고 우파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국학련 학생들의 부당한 지배(?)하에 놓여 있던 학교생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11장 어느 예언자
11장 어느 예언자 민족주의 일변도의 테제인 일민주의를 주창하였던 당시 안호상 문교장관의 교육 정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월북한 문인 정지용의 시 「고향」과 「춘설」을 교과서에서 먹칠하였던 일을 회상한다. 12장 그 전날 밤
1학년 입학 후 3학년이 되기까지 만 삼 년이 채 못 되는 시기에 중학교에서 겪은 교사들의 면면은 그 무렵의 시대상과 교육의 실상을 밝혀주는 단초이다. 지방 학교에선 교사를 구하기 힘들어 대학 재학생들이 잠시 왔다가 떠나곤 했다. 의예과 학생이 수학 교사로 잠시 있었고, 잠시 영어를 배웠던 고성진 선생도 있었다. 충주중학교와 공립농업학교 사이의 대립. 교사의 부당한 폭력. 학도호국단의 수안보 행군 등. 정부 수립 후 여순 반란 사건이 있었고 국회 프락치 사건과 김구 선생 암살 사건이 있었다. 옛 좌파들도 이제 몸조심하며 체제 순응 쪽으로 돌아설 무렵. 삼팔선에서의 조그만 충돌 사건이 끊임없이 보도되기도 했지만, 그런 소충돌은 이미 일상사로 편입되었다. 최은희 주연의 「마음의 고향」이라는 영화며, 이향 주연의 「배신자」라는 영화, 폐결핵 특효약이라는 ‘폐특신’의 약광고가 신문 제1면에 크게 나왔고, ‘사바사바’란 속어가 그 무렵 번지기 시작하였다. 《문예》라는 새 잡지가 생겨나서, 문학소년 비슷하게 되어가던 내게 큰 관심을 일으켰다. “이렇게 우리들의 ‘그 전날 밤’은 하릴없이 깊어갔다.”
유종호
1935년 충북 충주 출생.서울 문리대 영문과를 나와 뉴욕 주립대(버팔로) 대학원에서 수학.현재 연세대 문과대학 특임교수.1957년 이후 비평 활동을 해왔으며 저서로 『유종호전집』(전5권) 이외에 『시란 무엇인가』,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다시 읽는 한국시인』, 『내 마음의 망명지』 등이 있음.
책머리에 들어가면서-기억의 복권을 위하여 유년의 지도 지적·정서적 빈민굴 발팃재 가는 길 좋다! 좋아! 지프차와 엿목판 잃어버린 사람들 그때 부른 노래 고향의 사계 달 뜨걸랑 나는 가련다 전국학련 잘 싸웠다 어느 예언자 그 전날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