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동안의 자료 조사와 현지 답사로 결실을 맺은 영화배우 김염(金焰)의 평전
김염에 대한 저자 박규원 씨의 열정은 김염의 아버지 김필순에서 비롯됐다. 서병호, 김규식, 김필례, 김순애 등 집안에 많은 항일 투사들이 있었지만 이들을 독립 운동가로 인도한 정신적 지주였던 김필순은 정작 잊힌 것이다. 김필순의 업적을 제대로 기록하고자 했던 저자는, 당시 집안이 모두 항일 운동에 투신해야 했던 격동의 시기에 김염은 어떻게 배우가 될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렇게 김염과 김필순의 자취를 쫒던 저자는 결국 김염의 화려한 삶 뒤에 불행한 역사와 운명을 함께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정신적 고뇌에 매력을 느끼고는 이 작품을 기획하게 되었다. 김염이 자신의 작은외할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저자는 지난 8년 동안 온전히 이 작품에만 매달렸다. KBS <일요스페셜>(1996)을 통해 김염이 알려지긴 했으나,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저자는 중국 곳곳과 미국을 찾아다니며 김염의 행적을 조사하고 지인들과 인터뷰하고 자료를 수집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우리나라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을 발굴하기도 했고, 이 책이 갖는 역사적 의의를 중요하게 여긴 한국외대 사학과 반병률 교수가 세심히 감수를 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직접 중국어를 배우고 자료를 번역하는 등 무리하게 정진하던 저자는 건강이 나빠져서 큰 수술을 하게 되었고, 시력 감퇴 및 여러 가지 합병증으로 고생했다. 그러나 김염의 삶을 재현할수록 그의 매력에 빠져 들어 이 작업을 중단할 수 없었다. 결국 저자는 심한 어지럼증으로 정신이 혼미해질 때를 대비하여 돗자리와 양산을 항상 들고 다니면서 중국을 돌아다녔다. 이렇게 힘든 노력으로 얻은 결실이 바로 이 책이다. 이 책은 김염의 예술관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김필순의 삶, 조국을 잃은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당시 1930년대 ‘올드 상하이’ 속에서 영화 예술가로서 겪어야 했던 김염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다. ▶ 세심한 자료 조사와 친족들과의 인터뷰, 치밀한 현장 답사를 통해 김염이라는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예술가의 잊힌 생애를 생생하게 복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논픽션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을 잘 보여 준다. 또 이 작품의 의의는 여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김염이라는 한 천재 예술가의 부상과 침몰이라는 개인사를 통해 불행했던 일제 식민지 시절 궁핍 때문에, 또는 독립 운동을 위해서 가족과 헤어져 탈향하지 않을 수 없었던 처절한 디아스포라와 그러한 이산의 아픔을 딛고 중국이라는 이방 나라에서 생존을 위해, 또는 조국 독립을 위해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고 강인하게 살아갔던 한국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 문화대혁명이라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밟혀 어떻게 천재 예술가 한 개인과 그 가족들이 처절하게 침몰해 갔는지를 실감 있게 보여 준다. 즉 중국 ‘영화 황제’ 김염의 복원과 더불어 ‘역사와 개인의 운명’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함께 탐색하고 있는 점이 이 작품의 보편적 감동과 격조를 더 확산시킨다.-김승희(시인/서강대 교수), 심사평에서 ▶ 감동 속에서 흥미롭게 읽힌다. 그 감동은 대부분 김염의 삶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그 감동의 이면에는 김염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복원하려는 저자의 희생적인 노력뿐만 아니라 한 인간의 내면과 깊게 공명(共鳴)해 보려는 성실한 내면적 이해가 있다. 김염의 삶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다. 역사가 거대하지만 한 인간 또한 거대하다는 것을 김염의 생애는 말해 준다. 격변하는 역사와 맞물려 움직이는 한 인간의 삶, 그 운명과 실존의 서사를, 실감나면서도 역동적으로 그려낸 점을 높이 평가한다. 활인검(活人劍)과도 같은 펜의 힘에 의해 우리는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김염을 본다. 혈연의 감정에 이끌려 감상에 치우치기 쉬운 글인데도 객관적인 시선의 거리를 늘 유지하려고 애쓴 것이 결과적으로 작품의 격조를 지키는 큰 힘이 되었다.-최승호(시인), 심사평에서 ▶ 인간이 너무나 인간적일 때의 아름다움과 문학보다 현실이 더 문학적일 때의 울림이 합쳐졌기에 이 작품은 문자로 만든 한 편의 영화 같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인 김염의 인생이 위대한 것은 그가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삶을 살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영화 속에 자신의 삶과 자기 자신을 담았기 때문이다. 이로써 한국 문학은 \’휴먼 다큐멘터리\’라는 거의 불모에 가까운 장르에 깊고도 넓은 우물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김미현(이화여대 교수), 심사평에서 ▶ 나는 김염에게서 육체의 아름다움 너머에 깃든 정신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아리랑>의 작가 님 웨일즈중국 영화 100년사에서 지금도 ‘영화 황제’로 기억되는 전설적인 한국인 배우

\”1930년대의 상하이는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했던 곳이다.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가 가장 극적으로 섞이어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는데, 그 중심에 영화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나의 외증조부인 독립 운동가 김필순과 그의 아들이자 중국의 전설적인 영화배우 김염의 삶을 8년간에 걸친 취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혁명가들은 자신의 희생 속에서 행복하게 죽어 가는 것이요, 그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김산의 말이 떠오른다. 김필순과 김염, 그들은 진정한 혁명가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자신의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데 단 한번도 회의를 품지 않았던 진정한 개척자들이었다.\”(본문 4쪽, <저자의 말>에서) ■ 독립 운동가의 아들로 태어난 김염이 상하이 영화계에 들어가기까지
김염(본명은 김덕린)은 1910년 4월 7일 김필순의 3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필순은 세브란스 의학교 1회 졸업생으로 한국 최초로 면허를 받은 의사다. 신민회의 독립 운동 자금을 조달했던 김필순은 ‘105인 사건’과 연루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여 치치하얼에서 조선인 이상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 지원을 통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훗날 영화배우로서의 김염의 삶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아버지가 일본인에게 독살 당하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어린 김염은 상하이의 고모 집(김순애와 김규식)에 의탁한다. 집안이 모두 항일 운동에 전념했기 때문에 언제나 생활 형편은 어려웠다. 고학으로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영화에 대한 열정을 키워 나갔으나 집안에선 그의 꿈을 광대 짓으로 치부했다. 김염은 운동과 예술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다. 축구, 농구, 수영, 그림, 바이올린, 하모니카 등 무엇이든 손에 잡으면 금방 그것을 배우고 익히는 소년이었다. 재능은 있었지만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그는 1927년 열일곱 살 때 친구들이 마련해 준 뱃삯 7원을 갖고 상하이로 향한다. 당시 상하이는 세계에서 뉴욕과 시카고 다음으로 가장 번화한 금융 도시이자 무역 중심지였다. 이 화려한 도시에서 무일푼으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던 김염은 1929년 쑨유 감독의 과감한 기용으로 드디어 꿈을 펼치게 된다. 그리고 당시 최고의 여배우였으며 우리나라에도 영화 ｢완령옥｣으로 알려진 롼링위(阮玲玉)와 주연한 <야초한화(野草閑花)>(1932)의 성공으로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1930년 겨울 나는 김염과 함께 <야초한화>를 찍었는데 롼링위의 완벽한 연기와 더불어 김염은 상하이 관중들의 경이에 찬 시선을 한 몸에 받았고 이때 그의 영준한 모습이 널리 알려졌다. 그는 겨우 스무 살이었다. 그는 학생 역할을 맡아 순수하고 자연스러운 기품을 출중하게 소화해 냈고, 그의 잘빠진 준수한 몸매는 청춘의 활기로 빛났다. 그의 출현은 옛날의 주역들을 초라하게 만들었고 관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본문 416쪽, 쑨유 감독의 글에서) ■ 스크린 위에서 항일 정신과 예술 혼을 꽃피운 김염의 삶과 정신
이후 출연작마다 대성공을 거둔 김염은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 황제’로 뽑혔고, 중국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지금까지도 김염을 소개하는 공식 문헌에 오직 김염만 ‘영화 황제’로 소개되고 있다. 김염의 사인을 받기 위해 그에게 넙죽 절하며 ‘황제 페하!’라고 부르는 영화 팬도 있었다. 한편 동포애가 강했던 김염은 조선인교포협회를 조직하고 조선인 학교를 후원하는 등 동포들을 도왔으며, 특히 조선인 예술인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다. 김염에게 도움을 청한 예술인 가운데는 무용가 최승희도 있었다.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김염은 자신의 사인을 담은 브로마이드를 판매하여 항일 자금을 지원했고, 상하이 사변 후에는 구국운동에 참가했으며 부상병들을 구호했다. 1934년 ｢들장미｣에서 만난 배우 왕런메이(王人美)와 결혼했다. 김염은 “배우는 부자들의 심심풀이 노리개가 아니다. 자기의 예술이 사회에 유용하도록 힘쓰고 항일 반제 투쟁의 힘이 되어야 한다.”는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영화는 국민의 염원을 담아야 하며 희망을 주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신념이다. ｢들장미｣ 역시 항일 정신을 담은 영화라 더욱 인기였다. 국공 갈등이 심했던 당시 국민당은 국민들의 항일 열망을 무시하고 공산당 타도에만 열을 올리고 있던 때라 사람들은 국민당 정부조차 감히 나서지 못하는 항일 운동을 영화가 선봉에 섰다는 것에 대해 아낌 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국민당은 “톈한, 샤옌, 부완창, 후핑, 김염 등의 시나리오 작가, 감독, 배우가 관계하는 영화를 상영해서는 안 된다.”며 언론 탄압을 했다. 이처럼 김염이 출연한 영화는 대부분 항일 영화였는데 특히 ｢장지릉운(壯志凌云)｣(1936)은 일본이 홍콩을 점령했을 때 가장 먼저 필름을 찾아 없애 버린 작품이다. ｢장지릉운｣을 찍은 다음해 룽징에서 제창병원 원장이었던 큰형 김영(저자의 외할아버지)이 갑자기 목숨을 놓았다. 김염의 영화가 들어오면 항상 가족 모두 영화관에 갔었는데 그날도 마침 김염이 주연한 영화를 보러 가려던 날이었다. 그런데 일본 순사들이 극장 문을 잠그고 불을 질러 그날 김염의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이 모두 불에 타 죽고 말았다.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모두를 구한 것이다. 중일 전쟁이 터지자 참전을 결심하고 전투기 조종사 시험을 쳤지만 낙방했다.(1937) 그리고 일본이 제안한 일중 합작 영화의 출연 요구를 거절하고 홍콩으로 피신했다.(1938) 김염은 1947년 여배우 친이(秦怡)와 재혼했다. 친이가 데려온 딸(페이페이)과 함께 둘 사이에는 아들 첩(쇼우린)이 있다. 친이를 특히 아꼈던 저우언라이 총리는 김염을 중국의 부마라고 부르곤 했다. 조국이 해방되자 독립 운동을 하던 가족들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상하이에 남은 김염은 국공 내전의 혼란 속에서도 미국에서 제의한 영화 출연까지 거절하면서 제2의 조국 중국을 떠나지 않았다. 신중국 수립 후 김염은 상하이 영화제작소 부주임, 상하이 시 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인민 정치협상회 상하이시 상무위원, 중국영화작가협회 이사 등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김염은 공산당에 들어간 동료들의 변한 모습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고 또 무엇보다도 “나의 정신을 어디엔가 묶어 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끝까지 공산당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이례적으로 중국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사람의 정신이나 영혼을 묶어 둘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껏 살아오면서 늘 꿈꾸고 소중히 여겼던 것은 바로 자유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이데올로기로도 인간의 정신을 속박할 수는 없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잘살아야 한다는 사회주의를 신봉해 온 것은 틀림없지만 나를 어떤 틀이나 형식 안에 집어넣고 싶지는 않다. 꼭 어디엔가 소속되어야 하는 당원이어야 한다면 내게 그것은 영화뿐이다.” 마오쩌둥은 그를 국가 일급배우로 임명했는데 이것은 행정상으로 장관보다 높은 대우였다. 팬레터는 “상하이 김염”이란 주소만 있어도 도착했다. 후에 김염의 조카 우애 할머니가 미국에서 만난 중국인들은 “김염을 모르면 중국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염에 대해 귀족주의, 부르주아라는 시기 어린 비난도 있었으나 그의 가까운 지인들은 모두 김염을 존경했다. 김염은 남달리 자긍심이 강한 영화배우로서 자신이 자유로우면 남도 자유로워야 한다는 평범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떤 것에도 갇혀 있기 싫어했다. ■ 문화대혁명과 김염의 가슴 아픈 삶
<폭풍 속의 매> 촬영 도중에 상한 위 때문에 1962년 수술을 받았는데, 그때 위 신경이 잘려 나가는 사고가 생겼다. 이후 혼자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땀을 뻘뻘 흘리고 밥을 먹고 나면 너무 고통스러워서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만 했다. 결국 영화계를 은퇴했다. “그것은 위 신경이 마비된 절망보다 더한 절망이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은 또 다른 시련을 가져왔다. 장칭(江靑)은 무명 시절의 난잡했던 사생활을 감추기 위해 자신을 아는 예술인들을 모조리 숙청했다. 그 와중에 김염과 친했던 동료들이 모진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렀고, 친이와 김염 또한 수용소에 들어가 중노동을 했다. 이때 보살핌을 받지 못한 아들 첩은 이후 정신 장애자가 되어 성인이 된 지금도 친이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폐기종 등의 합병증으로 투병 생활을 하던 김염은 1983년 12월 27일 일흔셋의 나이로 상하이에서 눈을 감았다. “스크린의 거대한 별이 사라졌다.”

▶ 박규원
1954년 서울 출생. 경기여고와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자신의 작은외할아버지 김염의 자취를 따라 중국과 미국 곳곳을 찾아다니며 8년 동안 취재했다. 그 가운데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크리스틴 최(뉴욕대 교수), 김염의 두 번째 부인 친이, 도산 안창호의 딸 안수산, 김염이 무명일 때 몰래 용돈을 쥐어 주던 사촌 형 서재현의 아들 서경석 목사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났으며 이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저자의 말
.나의 할아버지 김염을 찾아서 .치치하얼의 조선인 이상촌 .중국 영화 황제 김염의 불꽃같은 삶 .에필로그
.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