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적 통찰력으로 본 투쟁과 생산의 유럽사
유명한 영국 작가 D.H.로렌스가 쓴『역사, 위대한 떨림(Movements in European History)』은 로렌스가 옥스퍼드 대학교로부터 의뢰를 받고 쓴 <유럽의 역사>로, 로마 시대에서 19세기 후반 독일의 통일에 이르기까지의 유럽의 역사를 작가다운 생생한 필치와 상상력으로 풀어 쓰고 있다.
역사적 통찰력
『역사, 위대한 떨림』은 로렌스가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로부터 의뢰를 받고 쓴 유럽사이다. 당시에 로렌스는 소설『무지개』의 판매 금지 조치에 연루되어 있어서 초판은 로렌스 H. 데이비슨이라는 가명으로 출판되었다. 이런 무리를 감행하고도 소설가에게 옥스퍼드에서 역사책 집필을 의뢰한 것은, 로렌스가 단순한 소설가가 아니라 교직에 있었던 데다가 중후한 철학 논문과 문학 비평들을 쓴 바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 책은 초판이 1921년에 출간되었는데도(2판은 1925년, 3판은 1972년) 역사관이나 서술 방식에 있어서 매우 현대적인 데가 많다. 로렌스는「서문」에서 기존의 나열식 역사를 비판하고, 새로운 역사는 <서술적인> 역사이거나 <과학적인> 역사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역사를 지나치게 인간화하는 서술적인 역사를 비판하면서, 역사는 과학적이어야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발견이 아닌 유추>라고 말하고 있다. 이미 당시에『케임브리지 근대사 (Cambridge Modern History)』(1902~1912)가 나와 있었고, 더구나 그 편집자인 액턴 경은 <역사의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는 실증사학의 희망을 피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로렌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러한 사실에 순서와 질서를 부여하는 역사적 능력을 너무 자신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연역적인 인과 관계는 나중에 추측된 것>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로렌스의 역사관은 50여 년 뒤에『신판 케임브리지 근대사(New Cambridge Modern History)』(1957~1979)의 편집자인 조지 클라크 경이 <역사적 탐구는 끝이 없다>고 고백하는 데서 확인되었다. 이처럼 로렌스는 역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은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진정한 역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오른 물결을 외경심과 존경심을 갖고 지켜보며 이 엄청난 조수의 만조와 간조를 바라보는 것 뿐>이라고 말한다. 따라서『역사, 위대한 떨림』은 <유럽인의 마음속에서 커다랗게 솟아오른 움직임>, 그 <인간 역사의 샘과 기원>을 기록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유럽사의 흐름: 투쟁에서 생산으로
『역사, 위대한 떨림』은 몇몇 사건들을 드라마틱하게 묘사하는 동시에, 유럽사를 이끌어갔던 커다란 흐름을 그리고 있다. 로렌스가 보기에 이 흐름은 투쟁에서 생산으로, 전쟁에서 상업으로, 정복에서 평화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초기 유럽이 로마의 폐허 위에서 야만족들의 정열로 성립되었을 때, 유럽을 이끌어가는 힘은 전쟁터에서의 명예, 즉 정복욕이었다. 사람들은 순간적인 열정(그것이 종교적 열정이든 투쟁의 열정이든 쾌락과 사치의 열정이든)에 의해 살았고, 삶은 변화무쌍하고 무계획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차차 생활이 안정되고 유럽이 몇 개의 민족 국가로 나누어진 르네상스기를 지나면서, 서서히 생산의 욕구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제 전쟁은, 영광으로 가는 대단히 존경받는 길이 아니라, 공인된 악이 되었다. 평화에 대한 자긍심과 위험이 전쟁에 대한 자긍심을 대체했다.> 로렌스가 보기에 투쟁과 생산이라는 이 두 가지 욕구는 인류의 역사에 필연적인 것이고,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이 두 가지 욕구 사이에서 <떨게(진동하게)> 된다. 한 가지 욕구가 만족되면 다른 욕구가 생겨나 반대 방향으로 이끄는 이 힘이야말로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인 것이며, 이것은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역사로는 파악할 수 없는 <생의 법칙>인 것이다.
독특한 역사 서술과 생생한 사건 묘사
『역사, 위대한 떨림』은 세부적인 묘사에서도 기존의 역사책과 다르다. 우선 <로마 제국의 파괴자>로만 기술되어 오던 <야만족>들에도 꽤 많은 분량을 할당하고 있다. 여기서 로렌스는 그들의 자유분방한 삶과 호전적이고 격렬한 기질, 신비 종교 숭배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또 십자군 원정의 경우에도, 경제적ㆍ군사적 원인 등을 분석하는 기존의 역사책과는 달리 중세인들의 심성과 삶에서 기독교가 주는 의미, 종교적 열정과 헌신의 욕구 등을 설명하고, 이런 열정이 어떻게 투쟁욕과 물욕으로 변질되어 갔는지를 박력 있게 기술하고 있다. 이처럼 로렌스는 객관적 사실의 나열과 분석ㆍ해석에 치중하던 기존의 역사책과는 달리, 살아 있는 인간 군상들의 열망과 움직임, 좌절과 승리의 역사를 유려한 필치로 역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은 교황과 황제의 투쟁(절대 군주제의 성립), 신교와 구교의 갈등(종교 개혁), 제3신분과 특권층 간의 싸움(프랑스 혁명) 등 중요한 사건들의 경우에 특히 두드러지며, 덕분에 이러한 사건들을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역사적 인물들을 각각 열정과 개성을 가진 인물로 묘사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선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로렌스가 사료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몇몇 위대한 인물들 중심의 영웅사관을 전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로렌스가 이 책을 쓸 당시의 정치사와는 반대로, 종족과 민족, 일반 민중 등 다양한 인간 집단들의 커다란 흐름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러한 흐름을 이끌어냈던 설명할 수 없는 원동력을 강조하고 있다.
역사, 숭고함의 미학
『역사, 위대한 떨림』이 기존 역사책과 가장 다른 점은 로렌스만의 독특한 역사관일 것이다. 기존 역사책들이 <일정한 목적을 향해 전개되는 인류 역사의 발전>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면, 로렌스는『역사, 위대한 떨림』을 통해 <어떤 정해진 방향 없이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무수한 인간 집단들의 파노라마>를 보여주려고 한다. 이렇듯 <모두 제각각의 방향으로 뻗어가고 제 나름의 꽃과 열매를 키우는 인간의 나무>는 <아름다움>이 아닌 <장엄함>을 보여주는, <숭고한 역사>이다.『역사, 위대한 떨림』의 기저를 흐르는 이 <숭고미>야말로 <합리적인> 현대의 역사 서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점이며, 인간의 숨길 수 없는 본성을 해방하고자 한 로렌스의 인간관과 세계관이 그대로 투영된 것이다. 로렌스가 무수한 검열과 삭제, 출판 금지 조치를 당하면서도『아들과 연인』,『무지개』,『사랑하는 여인들』,『채털리 부인의 연인』등의 소설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한 것은 인간의 성(性)이라는 비합리적인 욕망이었다. 마찬가지로『역사, 위대한 떨림』을 통해서 로렌스가 보여 주고자 한 것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정리될 수 없는 인간 집단들의 움직임과 흥망의 순환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천착해 온 작가 로렌스가 자신의 비전을 역사를 통해 전개한 것이 바로 이 책 『역사, 위대한 떨림』이며, 여기서 로렌스는 알 수 없는 내면의 욕구에 의해 추동된 인간들이 이루어낸 거대한 움직임과 흐름, 그 장엄한 역사를 보여 주고 있다.
서문 …9 1. 로마 …19 2. 콘스탄티노플 …30 3. 기독교 …44 4. 게르만족 …74 5. 고트족과 반달족 …89 6. 훈족 …107 7. 갈리아 …125 8. 프랑크족과 샤를마뉴 …144 9. 교황과 황제들 …167 10. 십자군 …194 11. 호엔슈타우펜 왕조 이후의 이탈리아 …224 12. 신앙 시대의 종말 …241 13. 르네상스 …268 14. 종교개혁 …294 15. 대군주 …317 16. 프랑스 혁명 …335 17. 프로이센 …364 18. 이탈리아 …382 19. 독일의 통일 …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