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에게 찾아온 이상하고 비밀스러운 기미들을
우리는 어떻게 지나왔을까.”
비밀과 거짓 사이, 징조와 확신 사이
주술처럼 번지는 우연한 진실들
2014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우다영의 첫 번째 소설집 『밤의 징조와 연인들』이 출간되었다. 『밤의 징조와 연인들』은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모든 일들이 돌연히 벌어지는 사고에 가깝다고 말하는 소설집이다. 우연의 신비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그날의 온도처럼 아주 미세하게 달라지는 ‘징조’를 포착하는 작가의 살갗은 예민하고, 눈은 날카롭다. 데뷔 후 작가는 수상소감을 통해 자신에게 소설은 “키스 같은 것”이며 앞으로도 자신의 소설이 “따뜻하고 관능적이길” 바란다고 밝힌 적 있다. 그의 말처럼 우다영의 소설을 읽는 일은 메마른 입술에 닿는 키스 같을 것이다. 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이 은밀하고 치명적이며, 이후가 더욱 궁금하고 설렐 것이다.
■연애의 몸통에서 도려낸 비밀과 거짓말
표제작 「밤의 징조와 연인들」은 긴 호흡으로 섬세하게 남긴 연애의 생몰에 대한 관찰기다. 작가는 ‘연애’라는 생생한 사건을 포획하여 호흡이 느려질 때까지 묵묵히 바라본다. 이 소설에서 사랑이 숨 트는 순간은 거짓말을 하는 순간이다. 연애는 서로의 아름다운 면에 감탄하면 그만인 일이 아니라, 탐탁지 않은 면까지 견뎌야 하는 일이다. ‘나’는 애인인 ‘석’의 불안정하고 예민한 면을 견딘다. 더위에 약한 석을 위해 짐짓 쾌활하게 여름이 지나갈 때까지 석의 방에서 데이트를 하자고 제안하는 ‘나’와 감동하고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석’. 사랑은 그런 틈 사이에서 자란다.
한편 사랑이 죽어 가는 순간은 비밀이 생기는 순간이다. 파열의 순간을 침묵으로 넘길 때 이별은 실체를 드러낸다. 해외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석은 “다시는 여행을 하지 않겠다”고 말하고, 나는 그런 석을 그저 바라본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이미 사랑이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는 이별의 공기가 차오른다. 감정이 숨을 죽일 때, 연애의 몸통을 가르고 그려낸 해부도는 기묘하다. 작가는 우리에게 이 해부도와 함께 가설을 던진다. 연애의 심장처럼 보이는 사랑은 사실 비밀과 거짓말 사이에 위치한 우연을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어두운 구덩이에서 건져 올린 빛나는 진실
우다영은 세계가 논리적 인과 관계가 아니라 무수한 우연의 집합이라고 믿는 작가다. 삶은 “발을 헛디디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구멍”(「조커」) 같은 함정으로 가득하다. 때문에 삶에서 벌어지는 기쁘거나 슬픈 사건들은 다만 함정과 함정 아닌 곳을 번갈아 디디게 되는 일일 뿐이다. 이러한 세계관 덕에 『밤의 징조와 연인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비애의 순간을 대하는 태도는 신비로워진다. 살면서 한 번쯤은, 그리고 하루에도 여러 번은 그런 구덩이에 빠질 수 있다는 듯한 태도를 지닌다.
오빠가 개에게 심하게 물린 순간 자신의 병이 나았다고 주장하는 여자(「조커」)와 알고 지내던 남자에게 염산 테러를 당하고도 “이건 아주 평범한 사고예요.”라고 말하는 여자(「기분에 이르는 유령들」). 그들은 모두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에게 닥친 불행을 태연하게 여긴다. 삶이 슬퍼지리라는 징조를 미리 느끼고 있던 것처럼, 그리고 그들이 불행 이후에 다시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작가는 그런 인물들을 내세워 다채로운 삶의 진실들에 가 닿기 위해 기꺼이 어둡고 깊은 구덩이로 들어간다. 그리고 빛나는 소설을 건져 올린다. 우연이라는 우리의 존재 조건을 덤덤히 받아들인 독특한 표정을 하고서.
■본문에서
내가 석이를 용서했다고 생각한 일들을 석이는 자신이 나를 용서했다고 기억했다. 내가 자신을 걱정시키고 불안하게 할 때마다 그렇게 참아 주었는데도 나는 달라질 듯 달라질 듯 굴다가 결국 오늘처럼 원점으로 돌아가 버린다고 말했다.
(……)
“나는 노력하고 있어.”
내가 가까스로 말했다.
“너에게 다가가려고 나를 바꾸고 내 삶을 변형시키고 있다고.”
“나는 내가 널 위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석이도 지지 않고 말했다.―「밤의 징조와 연인들」, 92~93쪽
“네가 했던 가장 나쁜 짓이 뭐야?”
(……)
파파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는 눈꺼풀이 자꾸 감겨서 깊게 생각하지 못하고 되는대로 말했다.
“실은…….”
나는 정말 그랬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 사람을 사귈 때 세 명의 남자를 동시에 만나고 있었어.”
“지난주에 죽었다는 그 사람 말이야?”
파파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노크」, 150~151쪽
그해 겨울이 오기 전에 두 사람이 죽었다.
한 사람은 영건 언니였다. 나는 그 소식을 뉴스로 먼저 봤다. 오토바이를 타고 해안 다리를 건너던 중학생 남녀. 헬멧을 쓰지 않고 달리다가 덤프트럭과 충돌.
(……)
까진 여자애가 남자랑 놀다 죽었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아무도 우리에게 영건 언니의 빈소를 알려 주지 않아 우리는 조문도 하지 못했다. 그냥 자기 몫의 의자나 차가운 길 위에서 잠시 언니의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얼굴 없는 딸들」, 256~257쪽
“나는 그날 모텔 앞에서 밤을 샜어요.”
그 목소리에는 분노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조금 기운 없는, 오랜 시간 휘저어 굳은 양초처럼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해리가 나를 용서하기 위해, 그리고 비밀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순간들을 들었다. (……) 나는 내가 지켜 준 행복 속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해리를 은근하게 비웃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해리는 그때마다 돌아선 나의 등을 가만히 지켜보았을지도 모른다.―「셋」, 344~345쪽
■추천의 말
우다영은 소설을 쓰고 읽는 일이 곧 지금의 세계를 다른 기분에 젖어 돌아보게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는 작가다. 그녀의 소설을 추동하는 힘은 세계를 탈주술화시키려는 로고스적 의지가 아니라 세계를 재주술화시키려는 충동에 가깝다. 이때 그녀가 우리에게 제안하는 대표적인 기분은 ‘신비로움’이다. ‘보통의 이론이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하고 묘함’을 의미하는 이 단어 속에 우다영의 소설 세계를 압축해서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모두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는 무엇보다 그녀가 현실을 이성의 빈틈없는 자기 전개의 장이 아니라 논리적 인과 관계로 환원시킬 수 없는 우연한 징조들의 무수한 집합으로 바라보고 있는 데서 비롯한다.
―한영인(문학평론가)
■작품 소개
▶밤의 징조와 연인들
‘이수’는 신인 큐레이터들을 소개하는 릴레이 전시에서 ‘석’을 만난다. 연인이 된 후 석은 그들의 만남을 두고 매번 “전혀 상관없는 궤적을 그리다가 우리가 이렇게 만나다니.”하고 경이로워한다. 우리는 왜 서로를 알아본 걸까? 그런 우리는 왜 헤어지게 된 걸까?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청춘의 시간을 함께 보낸 연인의 평범하고 특별한 연애 관찰기.▶노크
외국계 잡지사에서 일하는 ‘나’는 ‘슈즈파파’라고 불리는 슈즈 디자이너의 인터뷰를 하기 위해 호텔로 가는 길에 어떤 여자의 전화를 받는다. 여자는 ‘내’가 오래전 잠깐 사귀었던 남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 때문에 자신이 ‘나’를 만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자의 도착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나’는 결국 슈즈 디자이너의 방에서 여자를 기다리게 되는데…….▶조커
오래전 소개팅에 나간 날, 나오기로 한 여자는 독감에 걸려 나오지 못한다. 남자가 알고 있는 여자의 정보는 어릴 적 개에 물린 적이 있다는 것뿐이다. 혼자 앉아 있는 남자에게 한 여자가 다가와 가벼운 부탁을 하고, 그 사이 이야기를 나눈다.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어릴 적 개에게 물린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인 양 말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어릴 적 개에게 물린 오빠 이야기를 들려준다. 잊은 줄 알았던 이 이야기는 세월이 흘러 결혼한 남자가 아내의 친구를 만나며 반복되는데…….▶얼굴 없는 딸들
‘나’는 ‘오로’라는 동네에서 중학교에 입학하며 다섯 명의 친구를 사귀게 된다. 승은이, 주란이, 세희, 봄이, 경진이. 그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보며 ‘나’는 소속감과 든든함을 느낀다. 다섯 친구들과 그해 봄 전학 온 영건 언니까지, ‘나’가 이들 무리에서 경험하는 즐거움은 사실 폭력이고 비행이며,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상실이다. 여름을 지나 다시 오로에 겨울이 오기까지, 친구를 얻고 친구를 잃었던 시간. 위태롭고 따스했던 중학생 시절, 우리의 여자 친구들.▶미래와 밤
장강명 작가의 장편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여자 주인공 ‘계나’가 한국을 떠나온 지 30년이 지났다. 『미래와 밤』은 행복을 찾아 한국을 떠난 계나의 미래, 그리고 계나가 떠나온 한국의 미래를 들려준다. 세월은 벌써 흐르고 흘러 노인이 된 계나와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딸이 살아가는 2045년이다. 내가 떠나온 후, 한국은 어떻게 되었니? 그 질문에 계나의 어린 손녀는 말한다. “한국은 이제 없잖아요.”▶기분에 이르는 유령들
‘현철’은 백화점 엘리베이터에서 괴한으로부터 염산 테러를 당해 하얀 뼈를 드러낸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딸의 과거를 추적한다. 딸의 친구를 통해 딸이 나이 많은 남자와 만나고 있었다는 걸 확인한 날, 공교롭게도 유부남인 범인이 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를 듣는다. 묻지 마 범죄인 줄 알았던 딸의 사고는 교묘하게 계획된 치정극인 걸까?▶셋
P시에는 속담이 있다. ‘셋이 모이면 문제가 풀린다.’, ‘셋이 모이면 문제가 생긴다.’, ‘셋이 모이면 비밀이 생긴다.’ 결혼을 앞둔 ‘나’는 얼마 전 이혼한 ‘해리’, 그리고 또 한 명의 친구 ‘연희’와 함께 P시로 여행을 떠난다. 세 친구가 앉고 남은 한 자리에 한 명의 남자가 앉게 되고, 이들이 P시에 도착하기 전 기차는 고장으로 Y시에서 멈춘다. 계획이 틀어진 세 친구에게 남자는 함께 여행할 것을 제안하는데……. 변주되어 전해 오는 속담 중 세 친구에게 해당하는 것은 무엇일까?▶크림
아버지가 재혼을 앞두고 있던 겨울, 집에는 ‘황’이 함께 살았다. 잘나가는 사진 작가였던 아버지는 형편이 좋지 않았던 황에게 흔쾌히 방을 내주었고, 황은 대신 집안일을 돕는다. 아버지의 재혼 상대자인 어린 배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황과 은밀히 공모의 감정을 공유한다. 아버지가 새엄마가 될 배우와 저녁 식사를 제안한 날, ‘나’는 열이 난다고 거짓말을 하고 황과 단둘이 집에 남는다. 그날 밤, 황은 아이스크림을 사 달라고 조르는 ‘나’를 데리고 밤거리로 나가는데…….
밤의 징조와 연인들 7
노크 127
조커 163
얼굴 없는 딸들 201
미래와 밤 263
기분에 이르는 유령들 281
셋 315
크림 347
작가의 말 385
작품 해설
이토록 서늘한 우연의 세계_ 한영인 3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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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징조와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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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깊은 나무 | 2019.5.16 |